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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全琫準)

시대 : 조선
생몰년 : 1855년(철종 6)~1895년(고종 32)
호 : 해몽(海夢)
본관 : 천안
관련전투 : 황토현(黃土峴)전투
상세내용

조선 말기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이 수탈을 자행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정부는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케 했으나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동학교도 탄압과 탐학을 자행하였다. 이에 3월 하순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명이 넘었으며, 여기에서 그는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4개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창의(倡義)의 뜻을 밝혔으며 또한 격문을 작성, 통문으로 각처에 보내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1894년 4월 4일 그가 이끄는 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하던 중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하고 이어 무장을 점령하여 이곳에서 창의문을 발표하였다. 4월 12일부터 영광·함평·무안 일대에 진격하고, 장성에서는 관군을 대파하고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동시에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입국하여 국가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 홍계훈(洪啓薰)의 선무를 받아들여 탐관오리의 응징, 노비의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폐정개혁에 대한 약속을 받고 화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執綱所)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청일전쟁에서의 우세를 이용하여 침략행위를 노골화하자 이에 격분, 재봉기하였다. 한때는 중부·남부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규모가 확대되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였으며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과의 대격전 끝에 대패하였다. 전봉준은 전라도 순창에 피신 재기를 모의하던 중 지방민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3월 사형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