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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弓裔)

시대 : 태봉
생몰년 : ?~918년(고려 태조 1)
상세내용

신라의 왕족으로 군사를 일으켜 후고구려(태봉)를 건국한 왕.

통일신라 말기 신라왕실의 쇠약으로 지방 호족들이 대두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두드러진 인물로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 있었다.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하여 뜻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큰 대우를 받지 못하자,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궁예는 양길로부터 군사를 지원받아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지금의 예천)·내성(奈城:지금의 영월)·울오(鬱烏: 지금의 평창)·어진(御珍:지금의 울진)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고 894년에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이르렀는데, 그 무리가 3,500명이나 되었다. 궁예는 이들을 14대로 편성하여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았고, 이들에 의하여 장군으로 추대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기반으로 저족(猪足:지금의 인제)·부약(夫若:지금의 김화)·금성(金城)·철원(鐵圓) 등을 점령하는 등 군세가 매우 강성해지자, 패서(浿西) 지역의 무리들이 속속 투항해왔다.

이어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갖춘 뒤, 896년경 임진강 연안을 공략하여 개성 일대를 주무대로 삼던 왕건(王建) 부자의 투항을 받고, 승령(僧嶺:지금의 장단 북쪽, 토산 남쪽)·임강(臨江:지금의 장단) 등 여러 현을 점령하였다. 이듬해에는 공암(孔巖:지금의 양평)·금포(黔浦:지금의 김포)·혈구(穴口:지금의 강화) 등을 복속시켰다. 899년(효공왕 3)에는 송악군을 수리하고 왕건을 보내어 양주·견주(見州)를 수중에 넣었다. 그 다음해에도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 지금의 화성시 남양)·청주(靑州)·괴양(槐壤:지금의 괴산) 등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마침내 901년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으며,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다. 그해 7월 청주인 1,000여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에 서울을 정하고 상주(尙州) 등 30여 현을 얻었다.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긴 궁예는 연호인 무태를 성책(聖冊)으로 고치고 패서의 13진(鎭)을 평정한 바 있다.

911년에 연호를 다시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고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이후 궁예는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역을 지배하고 해상권을 장악하여 나주정벌을 하는 한편 신라를 병합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왕건을 추대한 신하들에 의하여 918년 왕위에서 축출되었다. 궁예는 왕위에서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태봉을 건국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훗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는 데 주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