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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申乭石)

시대 : 근대
생몰년 : 1878(고종 15)~1908
자 : 순경(舜卿)
본관 : 평산
상세내용

조선 말기의 의병장. 본명은 태호(泰浩), 자는 순경(舜卿), 이명은 돌석(乭錫)·태홍(泰洪)·태을(泰乙)·대호(大浩). ‘태백산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불렸다. 석주(錫柱)의 아들이다.

그가 태어난 영해지방은 1871년(고종 8)에 이필제(李弼濟)가 중심이 되어 부사를 죽이고 관아를 불태운 농민봉기가 일어났던 곳으로 봉건체제에 항거하는 기질이 강한 지방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반봉건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아울러 일제의 침략으로 강렬한 항일의식에 눈뜨게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세의 젊은 나이로 1896년(건양 1) 3월 13일 영해에서 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기의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재개되자 1906년 3월 13일 의병 100여명을 모아 그가 사는 마을에서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라는 기호를 내걸고 재차 기의하였다. 4월에 울진 장흥관(長興館)에 이르러 일본군의 배 9척을 기습파괴하고, 6월에는 원주의 병정들을 굴복시켰다. 이어 삼척·강릉·양양·간성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을 무찌르고 또 그들의 전선가설을 방해하였다.

1907년 다시 의병을 모집, 영덕의 관공서를 습격하고 원구(元邱)에 진을 쳤다. 이때 일본군이 청송에 집결해 있었는데 이를 공격하기 위하여 의병을 청부역(靑鳧驛)으로 진군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지방민 3,000여명이 가세하자 주둔병은 영양의 주곡(注谷)으로 퇴각하였는데, 이를 추격하여 격전 끝에 물리쳤다. 이곳에서 10여 일간 머물면서 흩어진 주민들을 위무하고, 진보(眞寶)의 삼위(三危)에서 또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이어 경주의 대산성(垈山城)에서 연일 전투를 벌이다가 다시 청하(淸河)로부터 영덕의 조현(鳥峴)에 이르러 적과 싸워 이기고 소항(所項)을 지나 대동(大洞)에 이르렀다. 10월에 영해경무서를 습격하고, 수동으로 돌아와 군량을 조달하였다.

12월에 의병장 이인영(李麟榮)을 중심으로 13도의병이 연합하여 서울 공격을 목적으로 전국의 의병부대가 양주로 모여들었다. 이때 신돌석도 경상도 의병을 대표하여 의병 1, 000여명을 이끌고 올라왔다. 그러나 13도연합의병의 서울 침공계획은 실천하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진호(鎭護)와 부서개편에서 신돌석부대는 제외되고 말았다. 당시 13도연합의병부대의 각도 의병대장은 양반·유생출신의 의병대장으로만 편성되고, 평민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을 비롯하여 홍범도(洪範圖)·김수민(金秀民) 등을 참여시키지 않아 폭넓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는 부하 장병을 이끌고 경상도 영해로 되돌아와 1908년 1월에 평해의 독곡(獨谷)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2월에 영양읍에 진을 쳤다가, 3월에 수비(首比)로 돌아와 안동·울진·삼척·강릉 등지의 의병과 합쳐서 군세를 강화하여 춘양·황지 등지의 적을 격파하였다. 4월에는 울진 도곡(道谷)에서 적의 무기를 다수 빼앗았으며, 7월에 평해 한곡(寒谷)에서, 9월에는 희암(喜巖)에서 싸웠다. 10월에 안동 재산(才山)으로부터 영양 검정여점(黔丁旅店)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추워져 이듬해 봄을 기약하고 장병을 돌려보낸 후 눌곡(訥谷)의 부하 김상렬(金相烈)의 집에 은신하였는데, 이들 형제의 계략에 빠져 암살당하였다.

신돌석은 한말 의병투쟁에 있어서 평민출신의 의병대장으로는 가장 먼저 기병하여 민중적 기반 위에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그는 교묘한 게릴라전법으로 장기간 전투를 계속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의병부대가 군율이 엄격하고 민폐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민중들의 환영과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양반과 유생출신 의병장들의 봉건적인 신분질서관념은 평민출신인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백안시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지도자간의 이념적인 차이는 의병부대간의 통일전선 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어, 평민출신 의병장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