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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유인석(柳麟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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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석(柳麟錫)

시대 : 조선
생몰년 : 1842(헌종 8)~1915
자 : 여성(汝聖)
호 : 의암(毅菴)
본관 : 고흥
관련전투 : 제천전투(堤川戰鬪)
상세내용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론자로서 항일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제자들과 함께 의병항전을 개시하면서 제자들에 의해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유인석은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라는 격문을 발표하여 사방의 의기를 고무하는 한편, 의병진을 개편하여 본격적인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유인석 의병진은 한때 3,000명을 넘었으며, 1896년 2월 충주성을 장악하고 친일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단하는 한편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을 발표하여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관군과 일본군은 충주성의 외곽을 포위, 보급로를 차단시키자 더 이상 충주성을 지탱할 수가 없어 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환군하고 말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들이 제천으로 모여들어 5월 제천성이 함락될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수안보·가흥·음성·단양 등지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활발한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제천의 함락으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자 재기 항쟁을 도모하기 위해 황해도·평안도로 이동하였다가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갔다가 의병을 해산시키고 말았다.

1907년 고종의 퇴위를 계기로 다시 연해주로 망명하여 1910년 6월 연해주 의병세력의 통합체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여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되었다. 이 때 <통고13도대소동포(通告十三道大小同胞)>라는 포고문을 반포, 전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최후의 항일구국전을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

한일합방으로 무력항일투쟁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모든 지사(志士)와 사우(士友)들은 국내에 머물지 말고 간도로 건너와 함께 수의(守義)하여야 한다.”며 ‘수화종신(守華終身)’할 것을 주장하였다. 1914년 연해주를 떠나 서간도의 봉천으로 3차 망명을 단행하여 관전현(寬甸縣)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