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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시대 : 고려
시기/년도 : 1388년(우왕 14)
지역 : 평북 의주 압록강 위화도
관련인물 : 이성계(李成桂) 최영(崔瑩)
상세내용

요동정벌에 나선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사건에 얽힌 이야기.

1388년 3월 명나라는 고려 조정에 쌍성총관부 지역을 영유하기 위해서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였다. 고려 대신들은 명과 화친을 맺을 것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최영은 이를 반대하고 명의 대 고려 전진기지인 요동정벌론이 제기하였다. 이에 우왕은 최영(崔瑩)을 팔도도통사로 삼아 평양을 지키게 하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4대 불가론을 들어 요동정벌을 극구 반대하였다. “지금 출정하는 일에는 4가지 불리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을 옳지 못하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무리이며, 셋째 대군을 동원하여 멀리 원정을 나가면 왜적이 이 틈을 타서 쳐들어 올 것이며, 넷째 지금은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부디 감안해주소서.” 그러나 이성계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요동정벌이 결정되었다.


이 해 5월 이성계는 5만 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요동으로 출발하였다. 압록강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큰 장마를 만나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장마로 야반도주하는 장졸이 생기고 모두들 불안하여 사기가 저하되었다.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되돌아가기를 간청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신속히 진군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성계는 스스로 회군을 결정하면서 장수들에게 “상국의 지역을 범하여 천자께 죄를 얻으면 종묘사직과 백성이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다. 내 순리와 역리로써 상소를 올려 회군을 간청해보았으나 왕과 최영 장군이 허락하지 않으니 인군 곁에서 참소하는 악당을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케 하려 한다.” 하니 모두들 찬동하였다.

5월 20일 이성계를 비롯한 장졸들이 간신히 배를 타고 나니 수십일 내린 큰 비로 위화도가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출발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4만의 부대가 꼼짝없이 수장될 위기였던 것이다. 이를 바라본 장졸들은 한마음으로 이성계를 칭송하게 되었다. 장졸들이 신속하게 회군하려 하자 이성계는 “급히 올라가면 최영 장군의 군사와 만나게 된다. 사람을 살리려고 회군하는데 어찌 쓸데없는 충돌을 하려 하는가.” 라며 천천히 행군하였다.

갑작스러운 사태 변화에 놀란 우왕과 최영은 정벌군과 싸우려 하였으나, 얼마 뒤 우왕은 강화도로 쫓겨났고 최영은 이성계에게 붙잡혀 고봉현(현 고양)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최영은 죽으면서 “내가 나라를 위해 큰 일을 도모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원통하도다. 내가 일신의 영달을 꾀한 적이 없고 오직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으니 내 말이 틀리지 않다면 내가 죽은 후 산소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연대로 최영의 묘에는 풀에 돋지 않아 사람들은 이를 적분(赤墳)이라고 불렀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는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한손에 잡아 조선 창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