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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송(松)’자에 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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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松)’자에 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 조선
시기/년도 : 1592년(선조 25)
지역 : 평양성
관련유적 : 평양성
상세내용

우송즉패(遇松則敗) 즉 ‘송(松)’자를 만나면 패할 것이라는 말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출병을 결심하고 났을 때의 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인은 출병에 앞서서 전투의 승패를 점쳐보고자 했다. ‘우송즉패(遇松則敗)’라는 점괘가 나왔다. 부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송(松)’을 만나면 패한다는 점괘가 나왔습니다.”라며 점괘의 결과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왜군들은 우리나라의 수많은 지역을 누비고 다녔지만 ‘송(松)’자가 붙은 마을은 공격하지 않고 피해 다녔으며, 경남 진양군 금곡면 송곡리 같이 ‘송(松)’자가 붙은 마을들은 화를 면했다고 한다.

1592년 섣달그믐 즈음 드디어 명나라에서 조선의 청을 받아들여 군사 4만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항복(李恒福)이 이들을 영접하게 되었는데, 명군을 이끌고 온 이여송은 강을 건너오자 대뜸 손을 내밀었다. 어떤 의미로 손을 내밀었는지 알 수 없어서 모두들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 때 접반사 이항복이 나서서 자신의 소매 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이여송이 펼쳐보니 그것은 전투에 필요한 조선 지도였다. 이여송은 마음속으로 이항복에게 크게 감탄하였다.

이여송은 즉시 대군을 움직여 평양성으로 이동하여 성을 사면에서 포위하였다. 왜군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공격하였으나 진천포와 홍이포의 위력에 점차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평양성 안으로 돌격하자 왜군은 내성으로 몰려 들어갔다. 이 싸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가 2만 5천여 명에서 4·5천명으로 줄어들 정도로 피해가 컸다. 명나라 부대 역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서 일단 후퇴하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더 이상 전투를 엄두내지 못하고 나머지 군사의 전열을 추슬러서 밤사이에 대동강을 건너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더 이상의 피해를 내지 않고 평양성을 탈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송즉패(遇松則敗)하지 않기 위해서‘송(松)’자가 들어간 마을은 피해 다녔는데, 결국 우송즉패의 ‘송(松)’자는 이여송의 ‘송(松)’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