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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조헌(趙憲)과 700의사(義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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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趙憲)과 700의사(義士)

시대 : 조선
시기/년도 : 1592년(선조 25)
지역 : 충남 금산군
관련유적 : 7백의총
관련인물 : 영규(靈圭)
상세내용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 조헌과 7백 의병에 대한 이야기.

1592년 왜군은 3개 부대로 나누어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이때 조헌은 급히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참가한 인원이 약 천 오백여명이 되었다. 조헌은 승장 영규와 함께 청주성에서 첫 전투를 벌였는데 의병의 기세가 등등하여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청주성이 거의 함락되던 때에 갑자기 서북쪽에서 소나기 구름이 몰려와 사방이 깜깜해지자 조헌은 징을 울려 군사를 철수시켰다. 이 날 밤 의병의 기세에 눌린 왜군들이 모두 도망가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청주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조헌의 승전 소식을 들은 전라도 순찰사 윤선각은 조정에서 승전 소식을 듣고 나면 자신을 문책하리라 생각하고 조헌의 의병에 속해 있던 관군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또한 관군 백여명을 데리고 의병에 가담한 청양 현감 임순을 공주 옥에 가두기까지 하였다.

조헌의 의병대는 윤선각의 관군 회수 명령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의병의 수가 반이나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은 7백여 명의 의병들은 흔들림 없이 조헌에게 그 뜻을 같이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때 승장 영규의 부대에서 “고경명 장군이 금산에서 전사했습니다. 지금 금산에는 여기저기에서 모여든 수만 명의 왜병이 있소.” 라는 파발이 왔다. 조헌은 금산을 공격하고 싶지만 7백 명의 의병으로는 어림도 없는 전투였다. 다시 승장 영규에게서 파발이 왔는데 “현재 호남 지방에 순찰사로 있는 권율 장군의 군대와 연합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우리도 연합할 것이니 17일 금산에 도착하여 18일에 일시에 공격하는 것을 합시다.” 라는 것이었다. 조헌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당장 금산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갑자기 권율 장군의 부대의 사정이 어려워져서 거병을 잠시 미루게 되었다. 영규는 이 소식을 조헌에게 바로 전했으나 이미 조헌의 부대는 금산성 근처에 진격한 뒤였다.

왜군은 금산성에 다다른 조헌의 부대에게 후속병이 없음을 알고 군사를 출동시켰다. 1592년 8월 18일 제2차 금산성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수만의 왜군과 700명의 의병의 싸움은 중과부적이어서 의병들이 쓰러져갔다. 그러나 조헌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의로움을 버리지 마라!” 라고 외치며 끝까지 싸웠다. 승장 영규도 조헌이 사지에 몰리자 적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갔으나 그 역시 죽음을 당했다. 조헌의 아들 조완기는 부친의 죽음을 알고 그 시신에 해를 입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장군의 차림으로 싸움에 임했다. 싸움은 끝났고 조헌, 영규를 포함한 모든 의병이 죽었다.

후에 조헌의 아우 조범이 죽음을 무릎 쓰고 조헌의 시신을 찾으니 아들 조완기의 생각대로 큰 상처가 없었으며 장군 복장을 한 조완기의 시신은 무참하게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또한 왜군들이 물러간 후에 문인 박정량과 김승절이 이들의 뼈를 모두 모아 하나의 무덤으로 만들고 ‘7백 의총’ 이라고 이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