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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전투원형해유령(蟹踰嶺)과 신각(申恪)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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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령(蟹踰嶺)과 신각(申恪)장군

시대 : 조선
시기/년도 : 1592년(선조 25)
지역 : 경기도 양주 해유령고개
관련유적 : 해유령전첩지
관련인물 : 김명원(金命元) 이양원(李陽元)
상세내용

임진왜란의 첫 승리를 거두고도 처형을 당한 신각 장군의 억울한 죽음에 얽힌 이야기.

양산전투가 벌어진 경기도 해유령은 현재 경기도 양주 백석에서 파주 광탄으로 가는 국도상의 나지막한 고개로, 임진왜란 때의 승첩지이다.

1592년 5월 2일, 왜군은 서울을 향해서 거칠 것 없이 북진하고 있었다. 한강을 지키고 있던 도원수 김명원은 왜군에게 패하여 도성방어와 한강 수비를 포기하고 임진강쪽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을 따라 후퇴하지 않았다. 그는 왜군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유도대장 이양원과 함께 양주 산 속으로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곳에서 함께 함경도 남병사 이혼이 거느리고 온 군사들과도 합세하게 되어 도성 안에 있는 왜군을 토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런 와중에 양주를 중심으로 도성을 점령한 왜군의 활동이 매우 빈번하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해유령 부근에 잠복하였다. 드디어 왜군 1개 부대가 해유령을 넘어오자 미리 매복 중이던 신각과 그의 군사들이 적을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적을 급습하여 1개 부대를 몰살시켜 버렸다.

그러나 이 전투의 승리는 길이 막혀서 조정에 전달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임진강에서 도망쳐 산골짜기에 숨어있던 김명원은 한강 패전의 책임이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패배의 원인이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도망간 신각에게 있다고 하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였다. 조정에서는 사실의 진위를 밝힐 여유가 없는데다가 전쟁 중에 군대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신각의 처형을 결정하였다. 후에 김명원의 보고가 허위로 드러나고 양주전투에서 승리한 신각의 공이 알려지자, 조정은 신각에게 내려진 참형의 명을 거두고자 하였으나 이미 신각은 참살당한 후였다. 그의 처 정씨는 남편이 죽자 장사를 지낸 뒤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였는데, 정조 때 열녀문이 세워졌다.

해유령에서 있었던 양주전투는 임진왜란 초기에 계속 패배를 거듭하던 때 이루어진 최초의 승리로 기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