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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영의 디지털 복원병영,읍성과의 비교

병영,읍성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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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 지역은 왜와 인접하여 왜구의 침략을 가장 먼저 막아야 하는 국방상의 요지이기 때문에, 변방의 요지에 설치되는 군사적 성격의 진성(鎭城)이 비교적 많이 축조되었다. 군사시설로 해군기지였던 수영외에 군사시설로 육군기지였던 병영과 군현의 주민 보호와 군사·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가지는 읍성, 유사시 피난과 항전을 위해 쌓은 산성 등이 있었다. 디지털 수영 콘텐츠를 활용하여 조선시대 행정시설과 군사시설의 디지털 조영이 가능하다.

병영(兵營)

조선시대의 영문(營門)으로 지방에 주둔한 병마절도사와 그의 지휘·감독을 받는 절제사·첨절제사·동첨절제사·만호·도위가 있던 곳을 말한다. 병영은 주둔자에 따라 주진·거진·제진 등으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병영이라 함은 병마절도사의 병영인 주진을 뜻한다.


· 진주성(경상우병영) : 경남 진주시 남성동, 본성동
진주성은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된 곳이다. 원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조 우왕 5년(1379)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석축하였다. 조선조 선조 24년(1591) 7월, 경상감사 김수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을 쌓았다. 동 25년(1592)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이 3,800명의 군사로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에는 전년의 패배를 설욕코자 10만 여명이 또 침략하여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동 37년(1604)에는 합포, 마산의 우병영을 진주성으로 옮겨 이래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고종 32년(1895)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 건양 원년(1896) 8월부터는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있었다. 성의 둘레는 1.7㎞이고, 성내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있다.

읍성

우리나라의 읍성은 조선초기에 전란에 대비하여 고을 주민의 일부를 수용할 수 있는 읍성의 축조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따라서 조선후기에 제작된 『여지도서』에 나타난 전국 읍성의 분포지역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읍성이 축조되었던 지역을 개략적으로 알 수 있다.
조선 성종때 전국의 행정구역수는 330개소인데, 이 당시 읍성의 수는 190개소나 된다. 읍성의 설치구역을 분석해 보면 충청 20개소, 경상 45개소, 전라 39개소, 함경 23개소, 평안 33개소로 이 5개도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다. 이는 북방 및 왜적에 대비 해안 및 국경지방에 중점적으로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낙안읍성: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서·남내리
낙안성은 관에 의해 계획된 한국읍성 마을의 전형적인 예로 성곽과 권위건축, 민가, 마을구조 등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마을외곽은 막돌로 쌓은 성곽으로 경계를 이루었고 동쪽과 남쪽 부분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마을은 임경업 장군이 1626년 군수 재직시 기본골격이 갖추어 졌다고 전하며 장군에 관계되는 유적이 많다. 성곽은 조선 태조 6년(1397)에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흙으로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마을의 도로 체계는 T형으로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도로가 주도로가 되며, 남문에서 중앙의 객사로 통하는 도로는 의식과 상징적인 도로가 된다. 중심이 되는 객사는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객사의 전형적 형태를 하고 있고, 관아 부분이 있다. 이 마을엔 현재 150여호의 가옥이 있는데 18세기말부터 20세기초에 걸쳐 건축된 것들이다.


ㆍ참고문헌
문화재청
김봉렬, 『한국의 건축』, 공간사,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