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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영의 디지털 복원중국,일본 성곽과의 비교

중국,일본 성곽과의 비교

한국의 성곽과 비교되는 주변국가의 성곽으로는, 국내에 임진왜란때 왜군이 쌓은 왜성이 있었고, 국외에 중국, 일본, 유구(오키나와)에 성곽이 있었다. 이후 디지털 수영의 콘텐츠를 활용하여 좁게는 수영과 왜성간 넓게는 한국과 중국·일본·유구와의 전쟁게임 혹은 상선을 통한 교류게임을 만들 수 있다.

중국 성곽 건축

중국은 북방의 이민족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북부의 장성을 쌓았다. 진대 이후 한·북위·북제·수·금 등의 왕조의 수리를 거쳐 주로 명대에 건설되었다. 명대의 장성은 9개의 진으로 나누어져 속한다. 각 진에 소속된 장성은 모두 5,660km에 달하며, 그 합이 11,300여리에 이른다. 세칭 만리장성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성곽과 비교되는 주변국가의 성곽으로는, 국내에 임진왜란때 왜군이 쌓은 왜성이 있었고, 국외에 중국, 일본, 유구(오키나와)에 성곽이 있었다. 이후 디지털 수영의 콘텐츠를 활용하여 좁게는 수영과 왜성간 넓게는 한국과 중국·일본·유구와의 전쟁게임 혹은 상선을 통한 교류게임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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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성곽 건축

일본에서 중세 후반에 계속되는 전란은 성곽 건축의 급속한 발전을 유발시켰다. 성곽 종류를 보면 군본거지의 방어진지인 본성 외에 영내 요새지에 설치한 전진기지인 지성(支城), 영외 경계를 맡은 방위용 경목성(境目城), 연락용인 계성(繫城), 최후의 거점인 힐성(詰城), 또는 공격의 거점이 되는 향성(向城) 등으로 나누어지며 규모도 점차 커지게 된다.
오래 전에는 험준한 자연을 이용하여 산 위에 성을 만들었으나, 계속되는 전란으로 가신(家臣)들이 가까이 살 수 있는 평산성(平山城)이 출현한다. 이에따라 성곽을 중심으로 가신들과 상공업자들의 주거가 되는 도시가 발달하였다. 성의 출입구로서 호구(虎口)를 옹호하는 옹성형, 말의 출입구, 노출을 방지하면서 적의 직진을 막기 위한 덧문, 측방화력을 발휘하기 위한 성루의 휨 등의 기법이 설치되어 본성, 제2성, 제3성으로 겹겹이 성곽을 둘렀다. 석축이 많아지고 토벽이 많이 설치되고, 천수(天守)·망루(櫓)·도노(渡櫓)가 발달하고, 그 건물들은 방화와 방탄을 위해 두텁게 벽을 쌓는데, 여기서 근세 성곽 건축의 의장이 확립된다. 성곽 건물 중에 가장 특징있는 것은 천수각(天守閣)으로, 그것은 전망대이기 때문에 성 내외의 정세를 잘 살필 필요가 있어서 성의 중앙이나 본성에 두고 고층 건축으로 세워졌다. 성은 영주의 일상 생활지로서 그 건축은 영주 위세의 상징이 되며, 평화로울 때나 전시를 통해 군과 민의 정신적 통일의 핵심이 되어야 했기에 의장적으로도 장엄하게 지어졌다.

한국의 성곽과 비교되는 주변국가의 성곽으로는, 국내에 임진왜란때 왜군이 쌓은 왜성이 있었고, 국외에 중국, 일본, 유구(오키나와)에 성곽이 있었다. 이후 디지털 수영의 콘텐츠를 활용하여 좁게는 수영과 왜성간 넓게는 한국과 중국·일본·유구와의 전쟁게임 혹은 상선을 통한 교류게임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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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내 왜성

ㆍ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쌓았던 성곽으로 현재 24개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대부분은 한반도의 남단 해안지대에 소재하고 있다. 위치가 남부의 해안가로 집중된 이유는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일 년 후에 강화교섭이 시작되면서 일본군이 조선의 경상도 연안으로 퇴각하여 방어전략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요토미의 명에 의하여 서생포(양산), 임랑포(양산), 기장, 부산포, 구포, 가덕도, 장문포, 안골포, 웅천 등에 왜성을 축성하여 일본군 일부를 주둔시켰고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도의 울산, 양산, 마산, 사천 등과 함께 전라도의 순천에 왜성을 추가로 축성하여 주둔하였다.

· 왜성들이 대부분 해안가에 세워진 이유는 첫째, 일본으로부터의 보급물자를 육지로 운반하기 위한 항만을 확보하려는 의도와 둘째,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정박지가 될 수 있는 양항(良港)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 왜성과 조선성의 차이점은
① 조선성은 평지성과 산성인데 반해, 왜성은 이 두가지를 혼합한 평산성(平山城)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왜성은 항구를 볼 수 있는 산정의 돌출부에 작은 규모로 축성된데 비해, 조선의 성은 완만하게 이어진 넓은 산 능선을 따라 넓게 울타리 치듯 축성되었다.

② 왜성은 주성곽을 중심으로 하여 겹겹이 성벽을 축조한 반면, 조선성은 기본적인 성벽이 한 겹이고 성안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내부에 별도의 성곽은 축성하지 않았다.

③ 왜성의 성벽은 크고 작은 돌을 조합하여 쌓았다. 반면, 조선의 성벽은 편평한 돌을 어울려서 쌓았기 때문에 조선의 성은 수직인데 반해 왜성은 70° 각도로 경사져 있게 된다. 또한, 조선식은 많은 양의 돌로 기초공사를 하고서 그 위에 성벽을 쌓아올리는 데 반해 왜성은 기초공사 없이 지면 위에 바로 쌓아올렸다. 따라서 성벽의 두께도 조선식에 비해 왜성은 두께가 보통 2∼4m 정도로 두텁게 쌓아졌다.

④ 성문을 들어가면 조선식은 성안이 훤히 다 보이게 되어 있는데, 왜성은 ㄱ자형의 돌담 사이를 통과하여 나가도 가까운 거리 맞은편에 돌담이 있어 군사가 돌담에 몸을 은폐하고서 침입자를 활 또는 조총으로 격퇴할 수 있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만들었다.

⑤ 조선식은 총지휘소의 일정한 원칙이 없는데, 왜성에는 성내 가장 높은 자리에 천수각(天守閣) 또는 본환(本丸)이라고 부르는 망루가 보통 삼 층 건물로 지어져 있다.
· 순천왜성(順天倭城)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장 고니시가 일본군의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하여 쌓은 왜성으로, 낮은 구릉지대에 내·외성을 갖춘 돌로 쌓아 만든 성이다. 왜교 또는 예교(曳橋)라 하며 일본사람들은 순천성이라 부르고 있다. 성벽은 외성 3첩과 내성 3첩으로 쌓았는데 내성만 그 흔적이 분명하고 외성은 분명치 않으며, 성 주위에는 연못을 둘러 판 흔적이 남아 있다. 1598년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 사이에 최대의 결전이 벌어진 곳이며, 이순신 장군이 고니시를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승을 거둔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일본 성곽 건축

일본에서 중세 후반에 계속되는 전란은 성곽 건축의 급속한 발전을 유발시켰다. 성곽 종류를 보면 군본거지의 방어진지인 본성 외에 영내 요새지에 설치한 전진기지인 지성(支城), 영외 경계를 맡은 방위용 경목성(境目城), 연락용인 계성(繫城), 최후의 거점인 힐성(詰城), 또는 공격의 거점이 되는 향성(向城) 등으로 나누어지며 규모도 점차 커지게 된다.
오래 전에는 험준한 자연을 이용하여 산 위에 성을 만들었으나, 계속되는 전란으로 가신(家臣)들이 가까이 살 수 있는 평산성(平山城)이 출현한다. 이에따라 성곽을 중심으로 가신들과 상공업자들의 주거가 되는 도시가 발달하였다. 성의 출입구로서 호구(虎口)를 옹호하는 옹성형, 말의 출입구, 노출을 방지하면서 적의 직진을 막기 위한 덧문, 측방화력을 발휘하기 위한 성루의 휨 등의 기법이 설치되어 본성, 제2성, 제3성으로 겹겹이 성곽을 둘렀다. 석축이 많아지고 토벽이 많이 설치되고, 천수(天守)·망루(櫓)·도노(渡櫓)가 발달하고, 그 건물들은 방화와 방탄을 위해 두텁게 벽을 쌓는데, 여기서 근세 성곽 건축의 의장이 확립된다. 성곽 건물 중에 가장 특징있는 것은 천수각(天守閣)으로, 그것은 전망대이기 때문에 성 내외의 정세를 잘 살필 필요가 있어서 성의 중앙이나 본성에 두고 고층 건축으로 세워졌다. 성은 영주의 일상 생활지로서 그 건축은 영주 위세의 상징이 되며, 평화로울 때나 전시를 통해 군과 민의 정신적 통일의 핵심이 되어야 했기에 의장적으로도 장엄하게 지어졌다.
근세 성곽의 양식은 노부나가(信長)의 아즈치성(安土城)에 의해 확립되었다. 이 양식은 계속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秀吉)의 후시미성(伏見城), 오사카성(大坂城)으로 이어지고, 각 지방의 장군들도 이것을 본떠 각자의 성곽을 건설하여, 성곽 건축은 전성기에 이른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천화통일이 이루어지고, 중앙집권제 유지를 위해 다이묘(大名)의 주택인 본성 이외의 것은 모두 철거를 명하고, 1615년엔 신축을 금하여 1국1성제(1國1城制)를 시행하기에 이르며, 성대함을 과시했던 성곽 건축의 발전이 여기서 일단 막을 내리게 된다. 본성까지도 신축과 개축이 모두 제한되고 수리도 정부의 엄중한 감독을 받았다. 대명의 주택인 본성은 한 나라의 정치 중심지로서 영내 통치의 정신적 중심이라는 의미는 조금도 감소되지 않았으나, 계속된 평화와 제반경제의 궁핍은 대성곽의 수리 유지도 곤란하게 되어 정부의 엄중한 제한과 함께 성곽 건축의 발달은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 오사카성(大阪城)
오사카는 막부말까지 대판(大坂)으로 불려져 왔으나 명치이후 대판(大阪)에 통일되었다. 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의 두가지 특징을 가진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은 석산본원사일향종(石山本願寺一向宗)의 기점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최후의 성을 이곳에 건립하겠고 생각했었지만, 일향종(一向宗) 무리와의 대립으로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 노부나가(信長)의 뜻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 계승하였다.
오사카는 일본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여, 내해(內海)에 면해서 서쪽의 여러 나라들과의 교역에 유리하였다. 1583(천정11)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수길이 15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성곽은, 지금의 수 배의 규모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오사카에서 도요토미(豊臣)가 점멸한 후 도쿠가와(德川)가 그 폐허 위에 도요토미풍을 제거한 성을 재건했다. 그러나 천수각(天守閣)은 40년후 벼락으로 소실되고, 이후 재건되지 않다가 소화6(1932)년에 히데요시의 천수각을 모방하여 복원되었다. 현재, 오사카성은 에도성과 동급의 높은 천수각을 가지고, 건노(乾櫓)와 천관노(千貫櫓), 대수문(大手門), 훌륭한 석축(石垣)과 해자(堀) 등 수길의 색깔이 보이는 영향이 많고 성지는 국가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마쯔에성(松江城)
흰색의 히메지성(姬路城)과 대조적으로 마쯔에성(松江城)은 검은 하견판을 많이 사용한 무골의 외관으로 지역색이 강하다. 도쿠가와(德川) 직계의 마쯔헤이(松平) 가문이 10대에 걸쳐서 통치하였다. 성곽은 일본사적, 천수각(天守閣)은 중요문화재이다. 수리는 되었지만 건조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마쯔에성에는 성문과 망루 등은 있고 건축물은 전부 남아있지 않지만, 평성9년에서 12년까지 4년에 걸쳐서, 태고노(太鼓櫓), 중노(中櫓), 남노(南櫓)가 복원되었다. 해자(堀)의 북측에 있는 염견승수(?見?手)에는 무사주택(武家)이 잘 보존되어 있다.

유구 (오키나와) 성곽 건축

일본의 오키나와현은 옛날에는 유구라는 독립된 국가였다. 유구는 동아시아해에 떠 있는 많은 섬들로, 그 범위는 동서 약 1000km, 남북 약 400km이다. 쿠로시오(黑潮)로 대표되는 해류와 계절풍을 이용해서 고대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교류가 전개되었다.
유구는 14세기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서 금귀인성(今歸仁城)을 기점으로 북산(北山), 포첨성(浦添城)을 기점으로 하는 중산(中山), 도고대리성(島尻大里城)을 기점으로 하는 남산(南山)이라는 3개의 세력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그 시기를 유구역사에서는 삼산(三山)시대라 한다. 그 난세의 시대는 남부에서 등장한 쇼하시(尙巴志)라는 인물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
쇼하시(尙巴志)가 유구 전체를 통일함으로, ‘유구왕국’이 탄생되었다. 이후, 슈리성은 유구의 많은 성의 정점에 서서, 역대 국왕의 거성이 되었다. 슈리성은 왕국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으로서, 특히 중국과 일본, 조선, 동남아사아의 여러 나라와의 외교·교역의 기점으로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슈리성(首里城)
오키나와 최대 규모의 성인 슈리성은 낮고 높은 구릉에 건축된 평산성으로, 성벽은 자연의 지형을 이용하여 건축하였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통치자가 계속적으로 지어 성벽은 복잡한데, 16세기 이후 슈리성의 성역은 크게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하게 되었다. 성벽쌓는 방법은 허튼층쌓기와 바른층쌓기가 주류로 야면적쌓기가 일부 보인다. 재료는 전부 유구석회암으로, 유구에 있는 성은 전체적으로 그 돌로 쌓았다.
슈리성을 비롯한 유구에 있는 성벽의 특징은, 평면으로는 부드러운 커브를 그리고 모서리의 각은 유선형이다. 그러나 단면으로는 대부분 직선적이다. 근세 일본본토의 성에서 성벽의 각은 예각이고, 단면의 균배는 부드러운 커브를 그리고 있다. 이와같이 성벽이 전혀 대조적으로 구성되었다.
정전은 2중 지붕 3층의 목조건축이다. 정면에 당파풍(唐破風) 지붕이 붙어있고, 윗지붕에는 용두동장식이 보인다. 건축양식은 일본 선종양식을 기초로 하여 중국의장을 혼합한 유구 독자의 것이다. 크고 작은 다수의 문 가운데, 정문인 환회문(歡會門)은 석조아치문으로 상부에는 기와를 얹은 망루가 놓여 있다. 수례문(守禮門)은 상청왕(尙淸王)시대의 1529년에 창건되었다. 왕성으로의 중요한 어프로치 공간인 능문대도(綾門大道)에 지어진 문에는 1644년에 ‘수례지방(守禮之邦)’이라는 편액이 걸려, 그 이후 강수례문(降守禮門)이라고 불려왔다. 구조에는 유구건축의 특징이 보여진다.


ㆍ참고문헌
국립진주박물관, 『새롭게 다시보는 임진왜란』, 1999
윤장섭, 『중국의 건축』, 서울대학교출판부
윤장섭, 『일본의 건축』, 서울대학교출판부
太田博太郞, 『일본건축사』, 박언곤 역, 발언, 1994
李允?, 『중국고전건축의 원리』, 시공사, 2000
劉敦楨, 『중국고대건축사』, 세진사,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