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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산성

역사적배경
대성산성 소문봉 여장 대성산성 소문봉 여장

고구려는 427년에 압록강 북안의 국내성에서 평양지역으로 천도를 단행하게 된다. 이때 천도한 평양성에 대하여 조선시대의 학자들은 현재의 평양시 중심의 대동강가에 있는 평양성으로 알고 있었다. 이리하여 평원왕 28년에 재천도한 장안성을 현재 대성산성 남쪽 대지에 있는 안학궁지로 비정하였다.
이와 같은 종래의 인식에 대하여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 이는 일본인 학자 관야정(關野貞)이였다.

그는 평양일대의 유적유물에 대한 조사연구와 문헌적인 고찰을 결부하여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이 지금이 대성산일대라는 설을 제기하였으며, 그 때의 왕궁에 대해서도 안학궁의 것이 아니라 대동강 기슭에 있는 청암동토성일 것으로 주장하였다.그후 장수왕 천도시의 평양이 현재의 평양성이 아니라 대성산일대라는 점에 한해서는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왕궁-청암리토성’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논의가 반복되었다. 그의 주된 논지는 청암리 토성에서 나온 고구려기와와 대성산성에서 나온 것이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인정되는 반면에 안학궁지에서 출토된 기와는 이보다 후세인 고구려말기의 것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인식에 기초하여 안학궁은 고구려 후기의 별궁이었을 것으로 주장하였다.

이후 1938년 청암리토성의 발굴되어 왕궁 터로 추정하던 성내 건축 터가 8각탑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의 절간 터로 판명됨에 따라 재검토의 대상이 되면서 한때 학계의 사각이 안학궁설 쪽으로 쏠리는 듯 싶더니, 고구려기와는 편년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다시 인정을 받고 있다.
이에 반해, 북한 학계에서는 50년 대말 대성산성과 안학궁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을 계기로 안학궁지를 고구려 도성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기와편년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납득할 만한 해석을 내높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찌되었든 대성산성이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이라는 것만은 틀림없으며, 따라서 대성산성은 늦어도 427년 이전에 축성된 성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발굴을 통하여 드러난 막새기와의 형태나 성안의 별궁유적, 그리고 주변에 분포되어있는 무덤떼 등은 모두 이를 뒷받침해 준다. 특히 숫키와 막새의 문양 중에 집안의 장군총이나 천추묘, 태왕릉에서 나온 기와막새의 문양과 같은 점은 5세기초에 대성산성이 이미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북한 학계에서는 그 축조시기를 247년으로 보고 있으며, 그 후 334년의 증축을 거쳐 남방진출의 기지로 자리를 굳혔고 5세기초 천도를 계기로 규모가 더욱 크고 완벽한 산성으로 축조되었다고 인정된다.

대성산성 소문봉 성벽 전경 대성산성 소문봉 성벽 전경

대성산성은 고구려가 장안성으로 도성을 옮긴 후에도 계속하여 수도의 가장 중요한 방어성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인정되나, 산성발굴에서 고구려 이후의 유적, 유물이 거의 없는 것을 보아 고구려가 망한 후에는 조선시대까지 계속 폐성으로 방치되어 왔던 것으로 보여진다.

대성산성 이야기

대성산성은 평양시의 중심에서 동북쪽으로 약 6km정도 거리에 있다.. 대성산은 북으로부터 남으로 뻗어내려 온 청룡산(지모산)줄기가 대동강가에 이르러 마지막 매듭을 지은듯한 산으로 남쪽에는 대동강에 의하여 막혀있고 북쪽으로는 산줄기를 타고 청룡산-묘향산-낭림산과 연결되며, 동북쪽으로는 부전령과 마천령산줄기와 연결된다.

이처럼 대성산은 동, 서, 남 세면은 평지와 잇닿아있으나 북쪽만은 산줄기에 연결되어 있어 그것을 타고 북부지방으로 통할 수 있다.
대성산의 남쪽 약 5km거리에는 대동강이 산을 반달모양으로 둘러싸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리고, 서쪽 약 4km되는 거리에는 합장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대동강에 합류한다. 또한 대동강 양안에는 기름진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대동강을 따라 서해와 통할 수 있어 이 지역은 군사, 교통및 경제적으로 모두 유리한 위치에 놓여있다.

대성산성 내 국사봉 대성산성 내 국사봉

대성산성은 주봉인 을지봉(274)을 정점으로 소문봉, 장수봉, 북장대, 국사봉, 주작봉 등 6개의 봉우리와 능선을 둘러막아 쌓은 고로봉식 산성으로 서남쪽을 제외한 기타 면은 가파른 능선으로 되어있다. 성안은 주작봉의 사이에 두고 두 개의 큰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대성산성의 성벽 흔적을 따라 바깥 벽을 실측한 것에 의하면 둘레가 7,076m 정도이다. 남문이 위치한 주작봉과 소문봉사이의 골안은 2중 성벽을 쌓았으며 주작봉과 국사봉사이의 골안은 3중 성벽으로 되어 있어 이것까지 합하면 성벽의 총 길이는 9,284m에 달한다.

대성산성 시설물
대성산성 남문지 축대 대성산성 남문지 축대
성벽

소문봉 성벽의 밑바닥은 바위 또는 진흙땅으로 되어 있었고 성벽은 두께가 8m이며 성돌은 사암을 4각추 모양으로 다듬어 썼다. 중간벽과 안벽 사이의 너비는 420cm되고 안벽에서 다시 480cm너비로 경사지게 돌을 쌓아 내탁을 만들었다. 중간 벽과 안벽도 4각추 형태로 다듬은 돌을 수직으로 쌓았으나 대충 가공하여 성벽 표면이 바깥벽처럼 정연하지 못하다.
성벽의 맨 밑에 놓은 성돌은 위층의 성돌 보다 훨씬 클 뿐만 아니라 20cm정도 내 쌓아서 성벽의 받침돌 역할을 하게 하였다.주작봉의 성벽은 2중으로 되어있었으며 또한 산 능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간 내려온 경사면에 쌓은 것이어서 구조상 소문봉의 성벽과 차이 난다. 주작봉의 성벽은 사암을 4각추형태로 다듬어 바깥벽을 수직으로 쌓고 그것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긴 다각추형의 돌을 그 뒤에 쌓아올리는 방법으로 쌓았다. 그리고 바깥벽만 쌓고 안쪽은 돌과 흙을 다져서 쌓아올려 따로 내성벽은 없다. 성벽 기초는 밑바닥이 바위로 된 곳에는 바위를 그대로 기초로 이용하였으며 바위가 없는 곳에는 흙을 다지고 그 위에 큰돌을 놓아 기초를 만들었으며 기초돌이 밀려나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일정한 간격으로 큰 돌을 버티어 놓았다. 주작봉의 성벽을 2중으로 쌓은 것은 이곳이 경사가 완만하여 적들이 성벽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성의 방어력을 강화할 목적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주작봉과 소문봉사이의 골짜기는 산성 안의 물이 흘러 내려오는 곳으로 산성에서 가장 낮은 지형이다. 여기에 정문인 남문터가 있다. 남문터 양쪽으로는 성벽이 연속되어 있는데 남문터를 중심으로 약 220m구간은 평지에 성벽을 쌓았다.성벽은 안팎을 모두 다듬은 돌을 수직되게 쌓았는데 두께는 530cm된다. 현재 성벽의 높이는 잘 남아있는 곳이 4m되나 성벽표면에 쌓았던 다듬은 돌은 거의 다 없어졌다. 안벽에는 2.8.m두께로 진흙과 돌을 섞어서 내탁을 했다.
그리고 남문부근의 성벽은 2중으로 되어있다. 남문터가 있는 성벽 밖으로 110m거리에 바깥성벽이 있었던 흔적이 보이나 발굴하지는 않았다. 남문 부근의 성벽을 2중으로 쌓은 것은 이곳이 평지인데다 문이 있으므로 방어에 불리한 지형이기 때문에 그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문 앞의 2중 성벽이 간소화하여 옹성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성문

대성산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19개 작은 문이 있다. 문들은 모두 외부와 나들기 좋은 곳에 있으며 국사봉에 있는 성문은 북쪽으로 자모산주릭와 연결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이 문을 이용하여 북쪽의 여러 성들과 통할수 있다. 성문이 있는 곳은 양쪽에서 오는 성벽이 서로 어긋나게 지나가 19m구간이 2중 성벽으로 되었는데 성벽의 두께는 각각 10.5m되고 두 성벽사이 거리는 2.7m된다. 성문 자리는 안쪽성벽 끝 부분에 있다. 성문이 있는 곳의 바깥 성벽은 성문에서 12.5m 더 나오게 쌓았는데 성문의 방어를 위한 것으로 인정되며 성문 앞 35m되는 곳에 치가 있어 성문을 방어하게 하였다.
대성산성에는 모두 65개의 치성 터가 확인되었다. 치는 주로 성벽이 직선으로 된 곳에 많으며 굴곡이 심한 부분에는 상대적으로 적다. 그 중에서 제일 잘 남아있는 치의 크기는 성벽에서 직각으로 내어 쌓은 부분의 길이 12m, 너비 10.3m~9.8m이며, 현재 남아있는 치의 끝 부분의 높이는 3.3m된다. 치의 세면은 성벽을 쌓은 것처럼 쌓았는데 기초 돌은 매우 큰 것을 썼으며 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간 안으로 경사지게 쌓았다. 대성산성은 다른 산성들에 비해 치가 특히 많은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대성산성 소문봉 성벽 전경 대성산성 소문봉 성벽 전경
건물지

성안의 집자리는 기와집자리와 초가집자리가 있는데 대부분이 초가집자리며 기와집자리는 20여개 확인되었다. 집자리는 성문자리를 비롯하여 산성벽과 산성안의 높은 지대, 산중턱 그리고 골짜기에 배치되어 있다.
대성산성 안에서는 170개의 못자리가 확인되었고 그 중에는 형태와 구조사가 각기 다른 8개의 못자리가 발굴되었다. 대성산성안의 못 분포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물이 솟아나거나 고일 수 있는 곳에 못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있어 물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것이다. 대성산성의 못은 외형상으로 4각형, 원형, 3각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4각형 못은 다시 정방형과 장방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4각형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다음은 원형 못이고 3각형은 극히 적다. 고구려의 다른 산성들에서 발견한 못들도 4각형 못과 원형 못인 점을 고려하면, 이 두가지 형태의 못이 고구려 못의 기본을 이루는 형식으로 볼 수 있다.
대성산성에는 불경(妙法蓮華經), 불상, 청동마구, 질그릇과 청동그릇, 기와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서 산성의 축조시기를 밝히는데 귀중한 참고자료로 되는 것은 기와이다. 대성산성에서는 20여 지점에서 많은 기와들이 발굴되었다. 기와들은 모두 진흙으로 구운 붉은 색 기와이며 그 형식과 무늬가 고구려의 다른 유적에서 나온 것과 공통점이 많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왕궁, 관청, 절간 건물에만 기와를 쓸 수 있었다. 따라서 대성산성 안의 기와집 자리들은 모두 대성산성과 관련 있는 관청건물 혹은 절간을 지었던 자리라고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