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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공산성 이야기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2대왕인 유리왕 22년 도읍을 국내로 천도하면서 위나암성을 축조하였다. 유리왕대에 천도한 국내성의 위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압록강 근처나 의주남쪽의 인조, 환인 오녀산성 등으로 추정되기도 하였지만 19세기 후반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된 이래 현재의 집안 국내성지로 비정되고 있다.

국내성과 위나암성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평지성과 배후산성으로 파악된다. 평상시에는 국내성에 거주하다가 적이 쳐들어오거나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방어력이 높은 위나암성으로 대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구려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은 현재의 집안현성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위나암성은 국내성지의 서북쪽 2.5km 지점에 있는 산성자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상왕 2년(198)에는 환도성을 축조하고 산상왕13년(209)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다.

82년 조사 지당1의 복원 정비후 전경 82년 조사 지당1의 복원 정비후 전경

산상왕 2년(198)에는 환도성을 축조하고 산상왕13년(209)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다. 이후 동천왕 20년(246)에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은 파괴되었으며, 고국원왕 12년(342)에 다시 환도성이 수리되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산성자산성이 초축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볼 수 없다.

물론 수축된 환도성은 다시 전연 모용황의 침입으로 파괴되었다. 따라서 현존하는 산성자산성은 고국원왕대에 개축된 환도성으로 볼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축성법이 오녀산성 등 다른 초기산성에 비하여 세련되었다는 점 등은 개축의 결과로 짐작된다.

역사적 이야기
82년 조사 지당 1의 전경 82년 조사 지당 1의 전경

공산성은 웅진시대 백제 왕도로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기기까지 64년간(문주왕 원년 457년~성왕 16년 538년) 백제의 수도였습니다. 특히 공산성은 요즘 중국이 자기네 역사라고 왜곡하는 고구려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에 더욱 의미있습니다. 공산성이 있는 공주(당시 웅진)가 백제의 왕도가 된 것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산물이죠. 장수왕이 이끄는 3만여명의 고구려군이 파죽지세로 밀려들자 백제는 왕(개로왕)까지 살해되는 참패끝에 한성을 내주고 남쪽으로 쫓기기 시작했죠. 457년 개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주왕은 밤잠을 설쳐가며 남쪽으로 내려가다 금강을 넘고서야 비로소 한숨을 돌립니다. 도도히 흐르는 금강을 바라본 문주왕은 "이곳이면 안심이다"며 정착을 명한뒤 웅진성(공산성)을 쌓고 백제 중흥의 야망을 키웁니다. 고구려에 쫓기던 문주왕이 공산성을 비롯한 공주에서 받은 느낌은 아픈 상처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어머니의 품과 같았죠. 그 이유는 공산성에 올라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같은 분위기 때문인지, 백제 마지막왕 의자왕도 나당 연합군에 의해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자 태자와 함께 공산성(당시 웅진성)으로 피신했으며, 822년(신라 헌덕왕14년)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데 불만을 품고 `정안'이라는 국호를 내걸고 난을 일으킨 김헌창도 광주, 전주, 충주, 청주 등을 아우르며 승승장구하다 관군에 쫓기자 공산성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조선 인조도 이괄의 난때 반군들에 쫓겨 혼비백산 도망치다 난이 평정될때까지 10여일 동안 몸을 숨긴 곳이 바로 공산성입니다때문에 역사속 공산성은 쫓기는자의 피란처이자 아픈 상처를 어루만저 주는 어머니 품속같은 곳이었습니다.

문헌자료속의 공산성
84년 조사 지당 2출토 금동불 84년 조사 지당 2출토 금동불

문헌자료는 삼국사기(三國史記) 권(卷)26에 A.D 475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해 온 지 3년 후에 궁실을 중수하였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궁성에 상당하는 대형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궁실은 9년 뒤 동성왕 8년에 다시 중수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나올 뿐이다. 동성왕은 왕궁 동쪽에 높이 5척의 임유각(臨流閣)을 세우는 한편 연못도 파고 진기한 새도 길렀다고 한다. 왕궁과 웅진성의 축조 내지 중수의 시기는 대개 동성왕대로 추정된다.
당시 지배체제는 동성왕이 남당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서 만당제도가 이때까지 계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한편, 북부인 15세 이상의 장정을 징발해서 2성을 축조하였다고 하는 기록과 무령왕 23년에 한북주군민 15세 이상 장정을 징발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축조하였다고 하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서 역시 주·군제도의 지배체제를 답습해 내려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부(部)명와와, 이본서기(日本書紀), 안한기(安閑紀) 원년조에 나오는 전부,상부,하부가 있었다고 하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서 초기의 동.서.남.북 중의 오부제도가 전.후.좌.우.중의 오부제도로 명칭만 바꾸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진으로 보는 공산성

시 대 : 백제
면 적 :
위 치 :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

공산성은 웅진시대 백제 왕도로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기기까지 64년간(문주왕 원년 457년~성왕 16년 538년) 백제의 수도였던 성이다.
공산성은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능선과 계곡에 따른 모습은 포곡형이며, 원래는 토성이었으나 조선 선조, 인조 시대에 대부분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성곽의 총 길이는 2,660m로 외성을 제외하면 2,193m가 되며, 토성과 석성으로 구분해 보면 토성은 735m, 석성은 1925m로서 석성이 전체 산성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성의 면적은 약 21만㎡이고, 현재의 성벽은 높이 약 2.5m, 너비 약 3m로 대부분이 보수되었다.
성내 유적으로는 진남루 공북루의 남북 문루와 암문, 치성, 고대, 장대, 수구문 등의 방어시설과 동문과 서문의 문지만 남아 있고, 이외에 쌍수정, 명국삼장비 등의 시설물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