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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단산성

검단산성 이야기
검단산성 남문지 검단산성 남문지

검단산성은 정유재란때에 조선명군(朝鮮 明軍)의 연합군이 주둔하여 순천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倭軍)과 격전을 벌였던 전적지이며 그 당시에 축성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왔던 유적이다. 순천 왜성은 정유재란때 소서행장군(小西行長軍)이 쌓아 약 1년 이상을 주둔하였기 때문에 관련 문헌자료가 비교적 풍부한 편이나, 검단산성에 관한 문헌자료는 거의 없고 단지 구전(口傳)만 전해져 오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유적으로 알려져 왔던 검단산성은 1996년 12월에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하였던 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의 유구나 유물은 전혀 없었고 뜻밖에도 백제 후기에 축성하였던 백제시대의 석성(石城)으로 밝혀졌다. 시굴조사 이후 본격적으로 1998년부터 2001년까지 3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약 250m에 달하는 성벽조사를 비롯하여 문지 3곳, 지상건물지 5동, 수혈건물지 4동, 집수정 2곳, 대형우물 1곳, 팔각집수정 1곳, 장방형 수혈유구 1곳, 저장시설 1곳, 옹관 2기 등 많은 유구가 조사되었다. 검단산성은 전남 순천시 해룡면 성산리 산 48번지 일대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산성이 있는 산은 주민들에 의하면 ‘안산’ 혹은




‘검단산’으로 부르고 있으며 도상(圖上)에는 피봉산(皮峰山)으로 나타나 있다. 피봉산 혹은 검단산은 해발 138.4m의 낮은 산이며, 여수반도와 순천지역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광양만이 눈 앞에 보이는 요새지역이다.산성은 피봉산의 7~9부 능선에 형성되어 산의 중복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산정부의 일정한 공간을 둘러싸고 있다. 해룡면사무소에서 고법마을 지나 순천 왜성으로 가는 도로변에서 등산로를 따라 약 15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면 산성에 이른다.
광양만과 순천만의 중간부분 내륙에 있는 검단산성은 동경 127°31′33″, 북위 34°54′41″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에 있는 순천 왜성과는 직선거리로 2.5km 정도 떨어져 있어 산성에서 육안으로 보이며, 백제시대 당시 순천의 치소(治所)로 추정되고 있는 순천시 홍내동에 위치한 해룡산 토성과는 직선거리로 4.3km 떨어져 있다. 검단산의 서쪽에는 해발 182m의 천황산(天皇山)이 있고 동남쪽에는 해발 103.5m의 배부락산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해발 121.9m의 옥녀봉(玉女峰)이 있다. 검단산은 이들 산 중간에 첨산과 같이 뾰족 솟은 작은 산이지만 광양만과 순천만의 중간 내륙에 자리잡고 있으며 여수반도의 길목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 산의 남쪽 고개 즉 현재 국도 17호선이 관통하는 고개를 ‘검단고개’라 하는데 옛부터 이곳은 순천과 여수간의 대로(大路)로서 여수반도에서 순천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처야 하는 길이고 고개였다.
이와같이 검단산성은 순천의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해의 광양만과 여수반도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검단산에 얽힌 이야기
검단산 금돼지와 최치원

아득한 옛날이다. 호주(湖州)라는 고을에 검단산이 있었고 이 산에는 금빛을 한 돼지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이 금돼지는 몇천년을 묵은 것이어서 온갖 조화를 다 부렸는데 하루는이 금돼지가 고을 원이 살고 있는 마을에 내려와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온 고을안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고을원의 부인을 잡아가는 일이었다. 이 호주 고을에 새로운 원이 부임하기만 하면 금돼지는 사람으로 변해가지고 읍내에 내려와 어떤 술책을 써서라도 원의 부인을 납치해 가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원은 온 고을안에 방을 써붙이고 현상금을 내걸었으나 조화가 무궁한 금돼지의 행방을 알아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소문은 호주고을은 물론 멀리 성루까지 퍼져 사람들은 호주고을 원으로 가기를 꺼려하였고 혹시 임명을 받아도 병이나 집안일을 핑계하면서 도무지 가려고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호주고을을 폐읍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고을원을 자청 하고 나서는 사람도 없는지라 무척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데 마침 그때 아주 담력 이 세고 힘께나 쓰는 장수 한사람이 호주 고을 원을 자청하게 되었다.

이 신관 사또는 호주고을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관속들을 불러놓고 금돼지의 행패에 대하여 물어보았지만 어는 누구한 사람 속시원하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원은 잠시동안 이궁리 저궁리를 하다가 관속들을 항하여 "듣거라, 이제부터 너희들은 나가서 오늘 해지기 전까지 명주실 오천발만 구해가지고 오너라"하고 명령을 내렸다. 관속들은 도무지 영문을 몰라 궁금하였지만 신관 사또의 명이 지엄하므로 그날 저녁 때까지 명주실을 구해왔다. 그날 해가 지고 밤이 되자 원은 명주실을 가지고 내실로 들어가 실 한끝을 자기 아내의 치마주름 끝에 단단히 매어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내의 곁에서 자는 체 눈을 감고 동정을 살피고 잇는데 한밤 자정쯤 되었을 부렵이었다. 옆에 누워서 곤히 자던 아내가 부시시 일어나더니 사방을 두리번거려 살펴보고서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원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옆에 끼고 있던 명주실을 슬슬 풀어 주었다.

명주실은 계속하여 풀려 나갔다. 오천발이 다 풀리자 실은 더 당겨지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 날이 밝아지자 원은 그 명주실을 따라 집을 나섰다. 그 실은 검단산 깊은 골짜기로 자꾸만 뻗어나갔다. 한참 따라가지 명주실은 어느 작은 굴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원체 겁이 없고 담력이 큰 원 인지라 컴컴한 굴 속으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얼마를 굴 속으로 들어가니 그 속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원은 몸을 구부리고 살금살금 더 들어가니 촛불이 보였고 불 아래 수십명의 여인들의 수심이 가득한 채 앉아있고 그 중의 자신의 아내도 보였다. 원은 너무나도 반가워서 "여보"부르면서 아내에게 뛰어갔다. 원을 본 아내는 깜짝 놀라면서 "당신이 이곳에 웬일이십니까 만약 금돼지에게 발각되면 큰 일이니 어서 돌아가세요" 하였다. 그러나 굴 속에 들어온 사람이 신관 사또라는 것을 알자 먼저 잡혀왔던 여인들이 구하여 달라고 애원하는지라 원은 궁리를 한참 하다가 "자, 여러분 이렇게 하십시다. 오늘 금돼지가 들어오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 알아보십시오.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는 당신들을 구할 수 없습니다."하고 단단히 다짐을 하고 있을 때 굴 입구쪽에서 금돼지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은 즉시 몸을 피하여 숨고 여인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돌아오는 금돼지를 맞아 들였다.

금돼지는 만족한 듯 코를 벌룸거리면서 원의 아내의 무릎위에 비스듬히 드러누었다. 여인들은 시녀처럼 금돼지의 허리며 팔과 다리 를 주무르고 등도 두드리자 금돼지는 흡족하여 눈을 사르를 감았다. 그 때 한여인이 금돼 지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당신도 무서운 것이 있습니까" 금돼지는 그 소리를 듣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물어본 여인을 노려보면서" "아니 갑자기 내가 무서워 하는 것을 왜 물어 보느냐 "하고 벌컥 성을 내었다. 그러나 여인은 생글생글 웃으며 "이제 우리는 당신을 평생토록 모셔야 할터인데 혹시 모르고 당신이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것이 있다면 멀리하 여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물어본 것이지 별뜻이 없으니 노여워 하지 말아요" 하자 금돼지는 껄껄 웃으며 "아 고맙소. 나야 세상에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소만은 다만 한가지 사슴가죽만 보면 무섭단 말이요"하였다. "아이고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그까짓 사슴가죽이 무엇이 무섭습니가 "여인들이 재미있다는 듯이 까르르 웃자 금돼지는 "그런 소리 하지마라. 나는 사슴가죽만 보면 사지가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며 꼼짝할 수 가 없다" 하면서 불쾌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옳지 저놈이 사슴가죽을 무서워 하는구나" 원은 속으로 중얼거렸으나 사슴가죽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항상 허리끈에 차고 다니는 고을원 직인주머니였다. 정신을 차려 자세히 살펴보니 천만다행으로 그것은 사슴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원은 인장주머니를 들고 뛰어가면서 "이놈아, 네가 무서워 하는 사슴가죽 여기 있다"라고 소리쳤다. 금돼지는 사슴가죽을 보자 정말로 벌벌 떨면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하여 금돼지를 처치하고 자기의 아내와 여인들을 구해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때부터 수개월이 지나자 원의 아내에게 태기가 있었다. 금돼지의 새끼를 밴 아내는 몇 번이나 죽으려 했으나 원의 간곡한 위안과 만류로 그럭저럭 만삭이 돼 옥동자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신라 때 유명한 문장가요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보은군 산외면 대원리 여동골 마을 뒷산인 높이 767m의 검단산에 얽힌 전설이다. 이 산은 백제때 검단(儉丹)이란 승려가 살았으므로 검단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고운암(孤雲庵)이란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최치원이 공부를 하던 것이었다고 한다. 이산 줄기 중에 신선봉(神仙)이 있다. 즉 대원리 높은지미 마을뒷산으로 청원군과 보은군, 그리고 괴산군 삼개군의 경계에 있는 산봉우리다. 이 봉에 검단과 최치원이 죽어 신선으로 변하여 자주 내려와 놀다 갔다고 한다.

검단산성 시설물
검단산성 성벽 및 배수구 검단산성 성벽 및 배수구
성벽의 축조방법

검단산성의 둘레는 430m이다. 이 가운데 경사가 심한 지역을 제외하고 250m 구간의 외벽과 55m 구간의 내벽을 노출시켜 조사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성벽의 축조방법을 알 수 있었다.

첫째, 성벽은 내 외벽을 모두 쌓아 올린 협축식으로, 내 외벽 사이의 너비는 500~510cm로 거의 일정하나 남쪽 급경사 부분의 너비는 550cm 내외로 다른 부분에 비해 약간 넓다.
둘째, 자연 암반이나 석비레층을 ‘ㄴ’자형으로 판 후 별도의 기단을 두지않고 거의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다.
셋째, 벽석은 20~80cm 크기의 할석을 이용하여 고른면을 외측으로 향하게 하여 전체의 면을 맞추어 쌓았다.
넷째, 면이 고르지 않은 면은 잔돌로 쐐기를 박았으며, 성돌 크기는 상 하의 석재에 차이가 없다.
다섯째, 성벽의 내 외벽 사이는 생토면 위에 30~50cm 정도의 흙을 채우고 그 위에 잡석을 채웠다.
여섯째, 외벽의 기단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적갈색 점토와 기와, 잡석을 이용하여 다짐하였는데 그 너비는 200cm 내외이다.
일곱째, 성벽을 완성한 후 내벽쪽은 되채우기를 하였는데 그 높이는 경사가 급한 서쪽부분은 170cm 내외, 경사가 완만한 동쪽부분은 50~100cm 내외이다.
여덟째, 성벽의 외벽과 내벽을 축조한 후 중앙부분을 채웠다.

문지

문지는 남 서 북쪽 3군데서 확인되었다. 남문지와 서문지는 거의 능선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문지는 현재도 대법마을에서 올라오는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북문지는 능선의 정상부에서 계곡 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입지면에서 차이가 있다.
남문지의 평면형태는 외벽에서 타원형을 이루고 내벽에서 각형을 이루고 있다. 문의 너비는 안쪽 440cm, 바깥쪽 380cm이고 길이는 성의 너비와 동일한 500cm이다. 성문에는 계단과 같은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는데 외벽과 나란하게 1~2단의 석열이 남아 있었고, 내벽과 동일한 선상에 1단의 단이 마련되어 있다. 외벽에 가까운 개구부 아래에는 너비 30cm, 깊이 60cm의 문주공(門柱孔) 2개가 노출되었다. 주공 바닥면에는 판석 1매가 깔려 있다. 남아 있는 개구부(開口部)의 높이는 90~120cm이다.
서문지는 산성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가장 낮은 곳이며, 바로 옆에 대형우물이 있다. 서문은 외벽에서 타원형을 이루며 안으로 꺾여 거의 직선에 가깝게 뻗어 내벽과 연결된다. 문의 너비는 안쪽 340cm, 바깥쪽 240cm이고 길이는 성의 너비와 동일한 500cm이다. 남아 있는 개구부(開口部)의 높이는 75cm이다. 3곳의 문지 가운데 이 서문지의 경사도가 가장 심하다.
북문지는 남 서문지와 달리 능선 정상부에서 계곡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역시 외벽에서 타원형을 이루며 안으로 꺾여 거의 직선에 가깝게 뻗어 내벽과 연결되고 있다. 서쪽 내벽은 폐쇄되면서 성돌이 훼손되어 그 형태를 찾기가 힘들다. 문의 너비는 안쪽 390cm, 바깥쪽 360cm이고 길이는 510cm이다. 남아 있는 개구부(開口部)의 높이는 50~150cm이다. 출토유물은 와편과 토기편 다수, 인화문 병, 철못, 따비, 석환 등이 있다.

건물지

지상건물지는 초석이 남아 있는 유구를 말한다. 정상부의 건물지와 대형우물 옆에 있는 건물지가 규모를 알 수 있는 중요 유구이다.
정상부에 있는 건물지는 현재 4각만 남아 있으나 그 형태로 보아 12각 건물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중앙부를 중심으로 하여 모두 3열의 초석이 원형으로 놓여 있는데, 260cm 지점에 1열(주칸거리 150cm 내외), 400cm 지점에 2열(주칸거리 200cm 내외), 540cm 지점에 3열(주칸거리 280cm 내외)의 초석이 놓여 있다. 초석의 크기는 80~ 90×90~ 100×15~ 20cm이다. 3열의 초석 바깥쪽으로는 할석과 석비레층인 생토면을 이용하여 기단을 형성하였다. 이 건물지에서 많은 양의 평기와와 이형기와가 출토되었다.
이와같은 12각 건물지의 예가 하남시 이성산성과 공산성에서 조사되었는데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건물지였다. 이들 건물지는 기능면에서 장대 등으로 파악하여 제사유구로 추정되고 있는 검단산성의 유구와는 다르며, 시기상으로도 검단산성의 유구가 이른 편이다.

검단산성 저수지 검단산성 저수지

대형 우물의 동쪽에서 확인된 건물지는 우물에서 동쪽으로 약 6m 정도 떨어진 지점에 높이 120~150cm, 너비 300cm, 길이 13.2m의 축대가 있고 축대 동쪽으로 건물지가 마련되어 있는데 현재는 9개의 초석만 확인되어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초석의 배열상태로 보아 정면(남-북) 3칸, 측면(동-서) 2칸의 건물로 추정된다. 주칸거리는 정면 280cm 내외, 측면 260cm 내외이고 축대에서 200cm 정도 떨어져 위치한다. 초석의 크기는 62~88×58~78×8~16cm이다. 출토유물은 와편과 토기편 다수, 철촉, 석환, 숫돌 등이 있다. 이 건물지는 위치상 대형 우물 옆에 있으며 가장 낮은 곳에 해당하며, 규모면에서 가장 크고 와가(瓦家)였던 점으로 보아 아주 중요한 기능 즉 지휘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정상부 평탄면에서 초석을 갖추지 않은 수혈 건물지 4동이 확인되었다. 수혈 건물지는 석비레층을 ‘ㄴ’자형으로 파고 축조하여 낮은쪽이 대부분 유실되어 정확한 크기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현재 남아 있는 크기는 길이 390~ 560cm, 너비 190~ 260cm, 깊이 30~ 60cm이며 정상부를 중심으로 약간 경사진 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수혈 내부에는 40~ 60×40~ 45cm 크기의 주공이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있고, 벽면을 따라 얕은 溝가 형성되어 있다. 일부에서는 구들시설이 있어 수혈 건물지는 주거시설로 보인다.

대형 우물

이곳은 산성 가운데 가장 낮은 지역으로 동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우천시 물이 모이는 곳에 해당한다. 규모는 길이 810~890cm, 너비 400~480cm, 깊이 350~500cm이다. 평면형태는 장타원형이고, 단면형태는 역사다리형이며 장축방향은 남-북이다. 벽은 다양한 크기의 석재를 주로 가로방향으로 쌓아 올렸는데, 수평을 이루지 않고 면도 고르지 않아 거친 느낌이다. 동쪽에 비해 서쪽 벽의 높이가 낮으며, 성벽쪽으로 출수구(出水口)가 마련되어 있다. 서쪽면에는 벽석에서 100cm의 거리를 두고 너비 80cm, 깊이 40cm의 석열이 돌아가고 있는데 이는 우천시 물을 모으기 위한 시설로 보인다. 또한 누수를 방지하기 위하여 벽석 외곽으로 너비 130~140cm, 깊이 550~600cm 정도까지 점질이 강한 황색점토와 회흑색점토로 다져 놓았다. 내벽의 바닥면에는 높이 170cm 내외, 너비 25cm 내외, 두께 10cm 내외의 각재(角材) 10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다. 또 각재의 아래쪽에는 구멍을 뚫어 각재와 각재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데 장축방향의 중앙은 각재(角材), 단축방향의 각재 사이는 원형의 목재이다. 바닥석을 들어내고 아래 면을 조사하였는데, 바닥석에서부터 100cm 아래까지 회색의 점토가 깔려 있었다. 이러한 점토는 벽석의 외부에 채워진 점토와 동일한 것으로 물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이 목재구조물의 용도와 우물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다음과 같은 몇가지 점에서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목재구조물 가운데 세워진 목재가 우물의 상부까지 올라오지 않고 벽석의 중간부분에서 끝난다는 점이다. 즉 처음부터 우물의 중간부분까지만 설치되었고, 위로부터의 무게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우물 내부에서 상당량의 기와가 출토되기는 하였지만 우물의 평면에 비해서는 작은 양이며 또 일시에 무너진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의 시간을 두고 퇴적되어 있었다. 따라서 우물 내부를 보호하기 위한 외부 시설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우물 내부에 결구되어 있는 목재구조물을 제외하고는 구조물로 사용되었을만한 목재가 단 1점만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목재구조물 이외에 다른 구조물은 전혀 설치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셋째, 우물 내부에서 숫돌, 바가지형 목기, 목제 물동이 등 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아울러 씨앗, 골각기 등의 유물도 물과 관련이 있다. 또 우물 북 서 S남쪽 주위로 물을 모으기 위한 석열이 돌아가고, 서쪽부분이 동쪽에 비해 낮으면서 성벽에는 수구(水口)가 마련되어 있다. 실제가 장마가 온 후에 이 유구를 살펴 본 결과 우물이 넘치면 바로 서쪽에 마련된 水口로 물이 배수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유구는 물과 관련 있는 우물로 판단되며 고대산성에서 우물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시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유적(遺構)이라 생각된다.

사진으로 보는 검단산성

시 대 : 백제
면 적 : 16,959㎡
위 치 :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 성산리

검단산성은 전남 순천시 해룡면 성산리 산 48번지 일대에 자리 잡고 있는 협축식 산성으로 정유재란 때에 조선명군(朝鮮 明軍)의 연합군이 주둔하여 순천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倭軍)과 격전을 벌였던 전적지이며 그 당시에 축성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왔던 유적이다. 이러한 유적으로 알려져 왔던 검단산성은 1996년 12월에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하였던 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의 유구나 유물은 전혀 없었고 뜻밖에도 백제 후기에 축성하였던 백제시대의 석성(石城)으로 밝혀졌다.
검단산성의 둘레는 430m이며, 내 외벽을 모두 쌓아 올린 협축식으로 내 외벽 사이의 너비는 500~510cm로 거의 일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