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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

삼년산성 이야기
삼년산성 1차 동문지 전경 성밖 삼년산성 1차 동문지 전경 성밖

3사적 제235호인 삼년산성(三年山城)은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漁岩里)의 최북단에 위치한다. 북쪽은 풍취리(風吹里), 서쪽은 성주리(城舟里), 동쪽은 대야리(大也里)로 둘러싸여 성벽이 축조된 능선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삼년산성은 우리나라 고대의 축성사를 규명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성이다. 즉 삼국시대의 다른 성과는 달리 삼국사기 에 축성연대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5세기 후반 당시 신라의 축성술과 공역기간, 그리고 추풍령로를통한 신라의 북진과정을 고찰하는데 큰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 점에서 이 성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보은의 삼년산성이 처음 축조된 것은 신라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3년(470)의 일이다. 이어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8년(486)에는 이찬(伊 ) 실죽(實竹)을 장군으로 삼고 일선군(一善郡,선산) 부근의 장정 3,000명을 동원하여 삼년산성과 굴산성(屈山城,옥천군 청성면 산계리 본동의 산계리토성)을 개축하였던 것이다. 삼년산성을 처음 쌓을 때 축성기간이 3년이 걸렸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486년에 굴산성과 함께 대대적인 개축을 한 점, 그리고 소지마립간이 483년과 488년 두 차례에 걸쳐 일선군을 직접 순행을 하여 축성사업을 독려하고 나선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신라가 삼년산성을 얼마나 중요시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보은은 교통의 요지이다. 사방으로 길이 통한다. 지금도 그렇다. 보은 일대는 지세가 높아 한강과 금강의 상류이지만 분지를 이루어 넓은 평야도 끼고 있다. 삼년산성은 해발 350m 정도로 그리 높지 않은 산에 자리 잡았다. 지금도 읍에서 바라다 보이는 낮은 산에 성이 위치하여 있다.
그러나 막상 성에 올라가 보면 한 눈에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높이이다. 그것은 성벽을 높이 쌓은 결과이기도 하다. 10~15m에 달하는 성의 높이는 우리나라의 어디를 가도 볼 수 없는 삼년산성만이 가지는 위용이다.
삼년산성에는 동 서 남 북쪽의 사방 계곡을 이룬 곳에 문을 내었다. 문과 문 사이에는 높은 봉우리가 있다. 사방에 높은 봉우리를 두고 가운데가 오목한 고로봉( 峯) 형식의 산성이다.
성벽은 지세를 이용하여 쌓아나갔으며, 서쪽의 낮은 부분을 제외하고는 능선을 따라 축성하였는데, 내외벽을 다 돌로 쌓으면서 성벽의 속 채움까지 돌로 정연하게 쌓은 내외겹축(內外夾築)의 성벽이다. 대략적인 평면은 네모꼴을 이루고 있는 이 산성은 성벽의 중간 중간에 모두 12~13개의 곡성이 있다. 특히 네 모서리에 해당되는 곳에는 그 규모가 대단히 크고 뚜렷하였으며, 서북쪽 모서리와 동북쪽 모서리, 그리고 남쪽 모서리와 북쪽 모서리의 곡성은 이 산성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들에 자리 고 있으면서, 그 위에 건물을 세웠을 가능성이 많다.
이 밖에 동쪽 성벽에 수구가 있으며, 산성의 대부분의 우수가 모여드는 서쪽 성벽의 안쪽으로 “아미지”라 연못이 있었다. 또한 지표상으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아미지에서 성밖으로 통하는 또 다른 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년산성의 구조

이 산성은 포곡형으로 구들장처럼 납작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정자(井字) 모양으로 쌓았다. 한켜는 가로쌓기, 한켜는 세로쌓기로 축조하였으므로 성벽이 견고하기 이를 데 없다. 동쪽과 서쪽의 성벽은 안으로 흙을 다져서 쌓았으며, 바깥쪽은 돌로 쌓는 대신 내탁외축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남족과 북쪽은 모두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는 내외협축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문이 있던 자리는 동서남북의 네 곳에 있으나 지형상 동문과 서문을 많이 이용한 듯 하며, 그 너비는 대개 4.5m에 달한다. 또한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축조하였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아 현존한 것만도 최고 13m에 달하며, 거의 수직으로 쌓여 있다. 이처럼 성벽이 높고 크기 때문에 그 하중(荷重)도 막대하여 성벽을 쌓은 석재와 사이를 메운 쐐기돌들이 으깨어진 것도 있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한 내외협축(內外夾築)의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문지(門址)는 동서남북의 네 곳에 있으나 각기 형식을 달리 하고 있다. 남문은 훗날에 메워서 사용치 않았다. 한편 7개소의 곡성은 대개 둘레가 25m, 높이 8.3m로 지형상 적의 접근이 쉬운 능선과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하였다. 또한 우물터로는 아미지(蛾眉池)라는 연못을 비롯하여 5개소의 우물터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이 주위의 암벽에는 옥필(玉筆)·유사암(有似巖)·아미지(蛾眉池) 등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김생(金生)의 필체로 전해 오지만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1980년 7월 22일 호우로 인하여 서문지에서 발견된 성문에 사용했던 신방석(信枋石)은 우리나라 고대 축성술의 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동문지 모습 (남쪽에서) 동문지 모습 (남쪽에서)

보은 일대는 5세기 후반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경을 맞댄 곳으로, 백제에게 있어 보은은 한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으며, 신라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유홍준 교수(명지대)는 ‘역사적으로 보면 여기는 북쪽으로 진출하려던 신라의 최전방으로 신라가 백제 성왕을 공격한 관산성전투의 부대가 삼년산성에 있었다는 사실, 훗날 헌덕왕 때 김헌창 반란군을 여기서 물리쳤던 일, 견훤이 먼저 삼년산성을 차지해 왕건을 물리쳤던 일 등이 이 성의 굳셈을 실감케 한다.’고 설명한다.지금의 지경(地境) 상황에서는 다소 현실감이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당시 삼년산성의 규모나 여러 사례로 볼 때 보은 일대, 곧 삼년산성이 축조된 지역은 상당히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3년에 걸쳐 축조된 것은 물론 486년 개축 당시 3천 명의 군사가 동원된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고구려 최전성기의 군사력이 30만 명, 백제나 신라의 경우 10만 명이 채 안 되었다고 하니, 삼년산성 개축공사가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비중 있게 진행되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보은문화원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삼년산성은 전략적으로 전투와 보급을 맡는 치중
(輜重)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투는 일반적으로 치르는 일이지만, 치중의 경우 다른 의미가 있다.



최전방에 있는 산성에 무기나 식량을 다량 보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년산성의 경우 성이 견고하기 때문에 두 기능이 모두 가능하였던 모양이다.그렇다면 많은 물자의 이동이 있었을 것이고, 산성의 문이 낮은 곳으로 내려오게 한 주된 원인이 될 수도 있다.맨 먼저 만들어진 서문은 상대(上代) 문터라 하며, 문지방돌에 수레바퀴가 지나다니던 자국이 남아 있다.그것도 수레바퀴의 양쪽 바퀴 사이 너비가 1.66m나 되어 폭이 넓은 큰 수레가 지나다녔음을 증명하고 있는데, 삼년산성에 치중의 임무가 없었다면 그렇게 큰 수레가 통행하였을 까닭이 없다.’따라서 서문 양쪽의 곡성은 서문을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남쪽 곡성과 북쪽 곡성을 연결한 선으로부터 성문까지의 거리는 약 50m가 된다. 성문의 위치가 안으로 쑥 들어가 있어서 양쪽 곡성의 보호를 받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이처럼 성은 곳곳에 방어를 충분히 염두에 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삼년산성에 얽힌 역사

김춘추와 김유신이 나당연합군의 합세로 백제를 무너뜨린 뒤 의자왕의 항복을 받은 후에 백제 유민들의 반발이 계속되자 당의 고종이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파견하였을 때 김춘추(태종무열왕)가 왕문도를 맞이하였던 곳이 이곳 삼년산성이었다.

그 뒤 또 하나 삼년산성에 크나 큰 족적을 남긴 사건이 김헌창의 난이었다. 통일신라 헌덕왕 14년(822년)에 웅천주(공주) 도독이었던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김헌창의 반란세력은 신라 조정에 항거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면서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 이라 하였다. 지금의 충청, 전라, 경상도 일부 지역이 반란세력에게 장악된 전국적인 규모의 내란이었지만 중앙에서 파견된 토벌군에 의하여 반란의 중요거점인 웅진성이 함락되고 김헌창이 자결함으로써 한 달이 못되어 진압된 이 난은 작게는 원성왕계 귀족들과 태종무열왕계 귀족들간의 제2차 왕위 계승전이었고, 크게는 신라 말기에 계속된 크고 작은 왕위 계승 전들 중의 하나였다. <삼국사기>에는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 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김주원은 785년에 선덕여왕이 죽자 무열왕계 왕족 중 가장 유력한 세력으로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한 김주원은 명주(지금의 강릉)지방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 뒤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계속적으로 헌덕왕의 측근들로부터 견제를 받아 813년(헌덕왕5년)에는 무진주(지금의 광주)의 도독, 다시 816년에는 청주(지금의 진주)의 도독이 되어 지방으로 가게 되었고, 821년에는 옹천주도독으로 전보되자 그 이듬해에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김헌창이 그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고 함은 당시 김헌창이 반란의 명분으로 삼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귀족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왕위에 추대된 김주원이 김경신의 정변으로 즉위하지 못했음을 공격하는 것은 원성왕의 즉위에 대한 합법성 및 당시의 원성왕계 왕실의 합법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거사에 대한 합리화인 동시에 과거 김주원을 지지하였던 귀족세력들에게 자지를 호소하는 명분 때문이다. 이 난은 무열왕계인 김주원 일파와 다른 방게인 김씨 왕족의 충돌이었던 만큼, 전국을 휩쓴 난으로 전개되었다. 반란세력은 순식간에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지금의 상주) 등 4개 주를 장악하고, 국원경(지금의 충주), 서원경(지금의 청주), 금관경(지금의 김해)이 사신(소경의 장관) 및 여러 군, 현 수령들을 복속시켰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들을 순식간에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각 지역에서 반란에 참여한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주에서는 도독 향영이 추화군으로 비상탈출을 하였는데, 이같이 반란세력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은 피신하거나 탈출하여 중앙정부에 김헌창의 반란을 밀고하였다. 김헌창의 세력이 장악했던 지역은 신라 9개 주 가운데 4개주에 이르고 반란의 중심거점이 웅천주라는 지방에 위치하였지만, 반란에 동조하는 새력과 중앙왕살에 동조하는 양대세력으로 신라 전체가 양분되어 충돌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큼 대규모의 내란이었다. 중앙정부는 우선 원장 8명을 보내 왕도의 8방을 수비하게 하였다. 그 다음 반란군의 진압을 위하여 계속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결국 원성왕 직계후손들의 결속으로 김헌창의 난은 진압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시 토벌군이 출동하자 김헌창은 전략상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하고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삼년산성 방면의 반란군이 도동현에서 장웅의 부대에게 격파되고, 이어 장웅의 부대와 합류한 위공, 제릉의 연합군에게 삼년산성이 함락당한 뒤 속리산에 배치된 병력까지도 섬멸당하였다. 그리고 왕경에 가깝게 깊숙이 위치하였던 성산(지금의 성주)의 반라군도 김균정 등이 이끄는 주력부대에게 패하고, 웅진에 진을 쳤던 반란군도 공격을 당해 10일 정도 버티다가 함락되었다. 김헌창의 난이 진압되자 반란세력에 대한 무장해제와 대규모의 처형이 잇따랐다.
반란세력의 병사로 동원되었던 귀족의 사민들이나 일반 양민들은 풀려났지만 김헌창은 참시되고, 이에 동조한 종족과 당여 239명은 사형에 처하였다. 그때 사형에 처해진 김헌창의 종족들은 반란에 직접 가담한 친척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경우, 김헌창의 형제와 자손과 근친도 그 뒤 그대로 살아남아 중앙에서 활약을 하였다.
김헌창의 반란이 신라 정게에 미쳤던 영향은 수많은 태종무열왕계 귀족들이 몰락한 것을 들 수 있다. 즉, 반란에 가담하였던 많은 귀족들이 죽음을 당하였고, 그밖에도 사형은 면제되었지만 골품제에 있어 신분이 강등되거나 장원 등의 경제적 기반을 몰수당한 세력들도 상당히 있었다. 김헌창의 아들 범문은 이때 피신하여, 그로부터 3년 뒤인 825년에 고달산의 산적 수신과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얼마가지 못하고 진압되면서 태종무열왕계 후손들은 왕위계승 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그뒤 삼년산성은 후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918년 후백제왕 견훤이 고려의 경계를 넘어 쳐들어오자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가 점거하고 있던 삼년산성을 치려다가 끝내 실패하고 청주로 물러난 적도 있다.

삼년산성의 애닮은 사연

보은읍 어암리 산 1번지에 있는 삼년산성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 산속에는 장사로 이름난 남매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장사남매는 모두 몸이 건강 하고 억세기로 말하면 태산을 들고 천근 바위를 움직이는 힘을 자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있는 것은 두 남매 중에 누가 더 힘이 센지 그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오빠가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리면 누이는 바위를 손으로 쳐서 산산조각을 내고 말아 과연 누가 힘이 더 세고 누가 덜 센지 알 수가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두 남매는 서로 힘자랑을 하였지만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어느날 두 남매의 힘자랑을 보다 못해 어머니는 과연 누가 더 힘이 세고 지혜가 나은지 시험을 해보고 싶어 두 남매를 불러 앉히고 "너희 남매는 천하장사다. 매일같이 힘자랑을 하다간 끝이 없고 한이 없겠다. 그러니 단번에 끝장이 나는 것을 해 보아라. 오빠인 너는 굽높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몰고 서울을 다녀오너라. 그리고 너는 오빠가 서울을 다녀올 동안 돌을 날라 이 산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아보아라.

삼년산성 서문지 전경 삼년산성 서문지 전경

시합은 아침 해뜰 때 시작해서 서산에 낙양이 지는 사이에 끝나야 한다.시합에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목을 잘라 버리도록 하여라. 둘 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느니라~" 남매의 어머니는 시합의 결과가 너무 잔인하지만 이런 시합을 시키면 두 남매가 앞으로는 힘자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내기를 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두 남매는 환성을 지르며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했다.
"오빠 목은 내가 맡았구려"
"웃기지마. 내일 해뜰 때 겨루어 보자구"
이리하여 다음날 아침 동쪽에 해가 솟자 두 사람은 마지막 결판을 짓는 시합에 들어갔다. 오빠는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몰면서 길을 떠났고 누이는 돌을 날라다가 성을 쌓기 시작했다. 홀어머니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하지 목숨을 걸고 시합을 하지는 않을것이라 믿었다. 시합 결과에 따라서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는 죽어야만 한다.
왜 이런 시 합을 시켰는가 하고 후회도 했지만 이젠 별 수 없이 결과를 볼 수밖에 없었다.
뜨겁던 햇볕이 시들고 서산마루에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다. 딸은 성을 다 쌓아 올렸다. 이제 나무로 문짝만 달면 그만이다그런데 아들은 어디쯤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초조해졌다.
"아들이.....아들이 와야 할텐데"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진 어머니는 무서운 계략을 생각했다. 그것은 어머니들의 공통된 심정이다. 시합이 끝나면 그 결과에 따라서 어느 한 쪽의 목숨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딸 보다 아들을 살려야 한다. 이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딸이 문짝을 만들지 못하도록 지연시킬 계략을 꾸며냈다.
"얘야, 성을 다 쌓았구나"
"그럼요, 문짝만 달면 내가 이기는 거야요"
"그럼, 네 오래비가 졌구나"
"그럼요, 내가 오빠를 이기는 것이지요"
어머니는 이 말에 그만 소름이 끼쳤다.
"얘야, 시장하겠구나. 내가 팥죽을 맛나게 끓여 놓았으니 먹고 하거라"
"아녜요, 문짝을 달고 먹겠습니다"
"먹고 해도 네가 이긴거나 다름없다. 네 오라범은 필시 어디서 쉬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을거야. 그 동안에 팥죽을 먹고 문짝을 달거라" 어머니의 간곡한 청을 그만 거절을 못하고 딸은 어머니를 따라 집에 들어가 팥죽을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먹이는 음식이 될지도 모르는 팥죽을 정성껏 만들었다. 참으로 맛있는 팥죽이라 딸은 식혀가면서 맛있게 먹었다. 이제 팥죽은 불과 몇 술만 남았다. 그때 오빠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동생이 쌓은 성을 둘러 보았다.
"야! 내가 이겼다. 봐라 이 성은 문이 없다. 문을 만들지 못했구나"
이 사태에 난처해진 것은 어머니였다. 딸이 능이 아들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었는데 아들 을 살리기 위해서 뜨거운 팥죽을 먹였기 때문에 조만간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얘야, 아무리 언약이 중하기로서니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을 죽일수야 있단 말이야
이 에미를 봐서 참아라. 동생을 죽이려면 차라리 에민의 목을 끊어다오"
울며 애원했으나 아들은 냉담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장사인데 항상 누이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누이동생을 죽이고 세상에서 제일가는 장사가 되려는 것이다. 헛간에서 커다란 도끼를 들고 나오는 오빠를 보고 누이는 "오빠 동정을 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 약속대로 내 목을 짜르세요.
그리고 부디 홀로남은 어머니를 잘 봉양하셔요"
하면서 늙은 어머니의 뒤를 보살펴 드리지 못하고 죽으니 억울하다고 울며 오빠가 내려치는 도끼날 아래 죽어갔다는 것이다.
축성에 얽힌 이와 같은 전설은 군내 회북면 부수리에 있는 아미산성(娥嵋山城)에도 있다 . 다만 오빠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몰고 갔다온 것이 아니라 천근이나 되는 바위를 짊어지고 오백리를 갔다 왔다는 것이 다르고 어머니가 팥죽아닌 찰밥을 해 주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문헌속의 삼년산성
史書의 기록

① 三國史記 권3 新羅本紀」3 慈悲麻立干

原文】築三年山城<三年者, 自興役, 始終三年訖功, 故名之.>

譯】삼년산성을 쌓았다. <삼년이라 한 것은 공사를 착수한 때부터 시종 3년에 공사를 마쳤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② 三國史記 권3 新羅本紀」3 炤知麻立干

原文】拜伊 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千, 改築三年屈山山城.

譯】이찬(伊 )인 실죽(實竹)을 제수하여 장군으로 삼아 일선군(一善郡)지역의 장정 3천명을 징발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과 굴산성(屈山城)을 고쳐 쌓았다.

③ 三國史記 권4 新羅本紀」 眞興王

原文】百濟王 明 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 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 三年山郡 高干 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譯】백제왕 명농(明 : 聖王)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왔다. 군주(軍主) 각간(角干)인 우덕(于德)과 이찬(伊 )인 탐지(耽知)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했다. 신주(新州)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 삼년산성의 고간(高干)인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을 목베었으며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④ 三國史記 권3 新羅本紀」 5 太宗武烈王

原文】唐皇帝, 遣左衛中郞將 王文度, 爲熊津都督. 二十八日, 至三年山城, 傳詔, 文道面東立, 大王面西立. 錫命後, 文道欲以宣物授王, 忽疾作便死, 從者攝位, 畢事.

譯】당나라 황제가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보내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다. 28일 (왕문도)가 삼년산성에 이르러 조서를 전달하는데, 문도는 동쪽을 향하여 서고 대왕은 서쪽을 향하여 섰다. 칙명을 전한 후 문도가 당 황제의 예물을 주려다가 갑작스레 병이 발생하여 곧 바로 죽어서, 그를 따라온 사람이 대신하여 일을 마쳤다.

⑤ 三國史記 권10 新羅本紀」 10 憲德王

原文】張雄遇賊兵於道冬縣, 擊敗之, 衛恭·悌凌合張雄攻三年山城, 克之, 進兵俗離山, 擊賊兵滅之, 均貞等與賊戰星山, 滅之. 諸軍共到熊津, 與賊大戰, 斬獲不可勝計.

譯】장웅(張雄)은 도동현(道冬縣)에서 적병을 만나 이를 쳐부수고, 위공(衛恭)과 제릉(悌凌)은 장웅(張雄)의 군사와 합하여 삼년산성을 쳐서 이기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공격하여 섬멸시켰으며, 균정(均貞)등은 성산(星山)에서 적군과 싸워 섬멸하였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熊津)에 이르러 적과 크게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⑥ 高麗史 太祖 11년

原文】秋 七月 … 丙辰, 自將擊三年山城, 不克, 遂幸靑州.
譯】 가을 7월 … 병진일에 스스로 (장군이 되어 군사를)거느리고 삼년산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자, 드디어 청주로 행차하였다.

⑦ 朝鮮王朝實錄 成宗 23년

原文】右承旨 曹偉 啓曰諸邑山城在平時, 雖若無所用, 脫有事變, 可以避亂. 忠淸道 報恩縣 有山城, 名曰三年城, 新羅百濟, 以此爲域, 諺傳三年築城, 故以爲名. 城去縣五里, 中寬外險, 且完固.

譯】우승지(右承旨) 조위(曹偉)가 아뢰기를 "여러 고을의 산성은 평시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으나, 만약 사변이 있으면 피란할 수 있습니다. 충청도 보은현(報恩縣)에 산성이 있어 이름을 삼년성(三年城)이라 하는데, 신라와 백제가 이로써 경계를 삼았고, 전설에 삼년동안 성을 쌓았기 대문에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합니다. 성은 현에서 5리 떨어져 있는데 가운데는 넓고 밖은 험하며 또 완전하고 튼튼합니다.

⑧ 朝鮮王朝實錄 宣祖 30년
原文】成龍曰 "臨時括軍, 軍不充數 則行路之人, 亦皆捉之, 貫索而送之. 且體察號令, 猶或從之, 監司以下號令, 則 人不聽從. 軍機一刻爲急, 而 如此, 其緩乎 兩南之事, 則然矣. 至如忠淸道, 則 稍有頭緖似乎可矣. 兵使 李恃言, 欲守三年城, 已於此處, 聚軍輸粮云. 三年城, 路接黃澗永同, 可以把截賊路.

譯】유성룡(柳成龍)이 이뢰기를 "임시로 군대를 모집하여 수가 차지 않으면 길가는 사람까지도 모두 붙잡아 새끼로 묶어보냅니다. 또 체찰사(體察使)의 호령은 그런대로 따르지만, 감사(監司)이하의 호령은 따르지 않습니다. 군기(軍機)는 일각이 위급한데 더군다나 이처럼 완만해서야 되겠습니까 양남(兩南)의 일은 그렇지만, 충청도 같은 경우는 조금은 두서가 있으니 괜찮을 듯합니다. 병사(兵使)인 이시언(李恃言)이 삼년성(三年城)을 지키고자하여 이미 그곳에다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옮겼다고 합니다. 삼년성의 길은 황간(黃澗)·영동(永同)과 접해있어 적의 길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지리지(地理誌) 및 읍지(邑誌)의 기록

① 世宗實錄 地理志 忠淸道 報恩縣
【原文】烏項山石城, 在縣東五里, 周回一千二十步, 險阻. 內有泉六, 冬夏不竭, 有軍倉.
【譯】오항산 석성(烏項山 石城)은 현 동쪽 5리(약 2km) 지점에 있는데, 둘레는 1,020보이며, 험하다. 성내에 샘이 6개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 마르지 않으며, 군창이 있다.

② 新增東國輿地勝覽 報恩縣 古跡
【原文】烏頂山城, 在縣東五里, 卽三年山城也. 築之三年訖功, 故名. 石築周三千六百九十尺, 高十八尺, 內有五井, 今半頹 . 高麗太祖十一年, 自將擊此城, 不克, 遂幸淸州. 山下有軍藏洞, 世傳太祖屯兵之地.
【譯】오정산성(烏頂山城)은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으니 즉 삼년산성(三年山城)이다. 그것을 쌓는데 삼년에 공사를 마쳐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석축이 3,699척이며 높이는 18척이다. 성안에 5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 반은 메워지고 무너졌다. 고려 태조 11년 스스로(군대를) 거느리고 이 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자, 드디어 청주로 행차하였다. 산아래 군장동(軍藏洞)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를 태조가 병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라 한다.

③ 湖西勝覽 報恩縣 山城
【原文】三年城, 周回三千六百九十尺, 頹落處二十一, 庫井二.
【譯】삼년성(三年城)은 둘레가 3399척이며 퇴락한 곳이 21곳이며 우물이 2개이다.

④ 輿地圖書 報恩縣 古跡
【原文】烏頂山城, 在縣東五里, 卽三年山城也. 築之三年訖功, 故名. 石築周三千六百九十尺, 高十八尺, 內有五井, 今半頹 . 高麗太祖十一年, 自將擊三年山城, 不克, 遂幸淸州. 山下有軍藏洞, 世傳太祖屯兵之地.
【譯】오정산성(烏頂山城)은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으니 즉 삼년산성(三年山城)이다. 그것을 쌓는데 삼년에 공사를 마쳐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석축 둘레가 3,699척이며 높이는 18척이다. 성안에 5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 반은 메워지고 무너졌다. 고려 태조 11년 스스로 거느리고 이 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자, 드디어 청주로 행차하였다. 산아래 군장동(軍藏洞)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를 태조가 병사를 주둔시켰던 땅이라 한다.

⑤ 忠淸道邑誌 報恩郡 城池 憲宗代
【原文】烏頂山城, 在縣東五里, 卽三年山城也. 築之三年訖功, 故名. 石築周三千六百九十尺, 高十八尺, 內五井, 今半頹 . 高麗太祖十一年, 自將擊三年山城, 不克, 遂幸淸州. 山下有軍藏洞, 世傳太祖屯兵之所.
【譯】오정산성(烏頂山城)은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으니 즉 삼년산성(三年山城)이다. 그것을 쌓는데 삼년에 공사를 마쳐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석축 둘레가 3,699척이며 높이는 18척이다. 성안에 5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 반은 메워지고 무너졌다. 고려 태조 11년 스스로 거느리고 이 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자, 드디어 청주로 행차하였다. 산아래 군장동(軍藏洞)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를 태조가 병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라 한다.

⑥ 大東地志 권6 報恩縣 城池
【原文】烏頂山古城, 新羅慈悲王十三年築. 周三千六百九十九尺, 井五池一. 山下有軍藏洞, 高麗太祖屯兵之地.
【譯】오정산성(烏頂山城)은 신라 자비왕(慈悲王) 13년에 축조했다. 둘레가 3,699척이며 우물이 5개 있으며 연못이 하나이다. 산아래 군장동(軍藏洞)이 있는데, 고려 태조가 병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다.

⑦ 湖西邑誌 報恩郡 城池
【原文】烏頂山城, 在郡東五里, 卽三年城也. 築之三年訖功, 故名. 築周三千六百九十尺, 高十八尺, 內五井, 今半頹 . 高麗太祖十一年, 自將擊三年山城, 不克, 遂幸淸州. 山下有軍藏洞, 世傳太祖屯兵之所.
【譯】오정산성(烏頂山城)은 군의 동쪽 5리 지점에 있으니 즉 삼년성(三年城)이다. 그것을 쌓는데 삼년에 공사를 마쳐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쌓은 둘레가 3,699척이며 높이는 18척이다. 성안에 5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 반은 메워지고 무너졌다. 고려 태조 11년 스스로 거느리고 이 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자, 드디어 청주로 행차하였다. 산아래 군장동(軍藏洞)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를 태조가 병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라 한다.

⑧ 忠淸北道各郡邑誌 報恩郡 城池
【原文】烏頂山城, 在郡東五里, 卽三年城也. 築之三年訖功, 故名焉. 石周三千六百九十尺, 高十八尺, 內五井, 今反頹 . 高麗太祖十一年, 自將擊三年山城, 不克, 遂幸淸州. 山下有軍藏洞, 世傳太祖屯兵之所.
【譯】오정산성(烏頂山城)은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으니 즉 삼년산성(三年山城)이다. 그것을 쌓는데 삼년에 공사를 마쳐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석축의 둘레는 3,699척이며 높이는 18척이다. 성안에 5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 반은 메워지고 무너졌다. 고려 태조 11년 스스로 거느리고 이 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자, 드디어 청주로 행차하였다. 산아래 군장동(軍藏洞)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를 태조가 병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라 한다.

⑨ 增補 文獻備考 26 輿地考14 關防2 城郭2
【原文】烏頂山城, 在東五里, 卽三年山城也. 築之三年訖功, 故名. 石築(周三千六百九十尺, 高十八尺, 今廢) 內有井五池一. 高麗太祖十一年, 自將擊三年山城, 不克, 遂幸淸州. 山下有軍藏洞, 世傳太祖屯兵處.
【譯】오정산성(烏頂山城)은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으니 즉 삼년산성(三年山城)이다. 그것을 쌓는데 삼년에 공사를 마쳐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석축(둘레가 3,699척이며 높이는 18척인데 지금은 폐해졌다.) 성안에 우물이 5개 있으며 연못이 하나이다. 고려 태조 11년 스스로 거느리고 이 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자, 드디어 청주로 행차하였다. 산아래 군장동(軍藏洞)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를 태조가 병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라 한다.

⑩ 朝鮮 輿勝覽 報恩郡 古跡
【原文】馬頂山城, 在報恩面, 石築, 新羅慈悲王十三年庚戌築. 築之三年訖功, 故一名三年山城. 麗太祖, 自將擊三年山城, 不克, 遂幸淸州. 山下有軍藏洞, 世傳太祖屯兵之所.
【譯】 마정산성(馬頂山城)은 보은면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신라 자비왕(慈悲王) 13년 경술년(庚戌年)에 축조했다. 그것을 쌓는데 삼년에 공사를 마쳐서 일명 삼년산성이라 하는 것이다. 고려 태조 11년 스스로 거느리고 이 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자, 드디어 청주로 행차하였다. 산아래 군장동(軍藏洞)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기를 태조가 병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라 한다.

삼년산성 시설물

삼년산성의 문터는 동서남북 모두 4곳의 문터가 확인된다. 우선 산성의 정문인 서문이 1980년 홍수로 드러난 유구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남문지, 동문지 북문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2004년 이루어졌다.

삼년산성 동문지 모습 남쪽 삼년산성 동문지 모습 남쪽
서문지

상대(上代) 성문의 구성


삼년산성의 정문(正門)은 현재 문터를 남기고 있는 서문(西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문의 기초를 이루는 초석을 일부 묻어 놓아 잘 볼 수 없으나, 가장 훌륭한 문틀이 남아 있다.
서문은 유구(遺構)에서 볼 수 있듯이 전후(前後) 2차에 걸친 구축(構築)이 있었다. 맨 처음 만든 상대(上代)에 그랬듯이, 수축하면서 다시 만든 하대(下代)에도 서문은 정문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현재도 서문은 전체 성벽 가운데에서 가장 낮은 골짜기를 횡단하여 성벽이 통과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외부로의 출입이 가장 편한 곳이다. 성문 밖에서 바라보면 문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려다 보이지 않는다. 계곡의 중앙에서 왼쪽(北側)으로 약간 비켜있기 때문이지만, 문터 바로 앞까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능선이 급하게 내려와 있기 때문에 살짝 가려져 있고, 성문이 지세에 따라 약간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기 때문이다.

맨 먼저 만들어진 서문은 상대(上代) 문터라 하며 문지방 돌에 수레바퀴가 지나다니던 자국이 남아 있다.그것도 수레바퀴의 양쪽 바퀴 사이 너비가 1.66m나 되어 폭이 넓은 큰 수레가 지나다녔음을 증명하고 있는데, 삼년산성에 치중의 임무가 없었다면 그렇게 큰 수레가 통행하였을 까닭이 없다. 산성에 이처럼 큰 수레까지 다니던 문을 만든 것은 이곳 삼년산성의 서문이 유일한 것이다.이 서문으로 드나들던 수레 가운데는 왕(王)이 행차할 때 타던 수레가 넘나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이곳에 행차하여 백제를 통합하는 전쟁을 진두지휘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왕들은 수레를 타고 주위에 무장한 군인을 비롯하여 많은 시종들이 호위하였다. 그러한 그림이 고구려의 무덤 속에 그려진 벽화에 여럿 남아 있다. 고구려의 평양 장안성(長安城)의 터전에서 발견된 고구려시대의 성문에서도 수레바퀴의 홈인 궤도(軌道)가 발견된 적이 있었는데, 수레바퀴 사이의 너비가 1.5m였다. 신라의 수레가 보다 넓었던 모양이다. 신라가 수도인 금성(金城, 지금 경주)에서 수레를 이용하고 있었던 것은 흙으로 만들어 구워낸 수레의 실물 미니어쳐가 남아 있어 알 수 있고, 대구의 시지 지구의 조사에서도 수레의 바퀴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유구가 있었다. 신라의 호화로운 수레가 삼년산성 서문을 드나들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서문의 좌우에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각각 곡성(曲城)이 있다. 문의 북쪽은 약 71m 남쪽은 약 100m정도 떨어져 있다. 두 개의 곡성은 문을 향하여 접근하는 적을 망보아 계곡으로 몰려든 적을 옆에서 공격하기 알맞은 위치에 만들어졌다. 이것은 성문의 적대(敵臺)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곡성이 자리잡고 있는 곳의 높이는 성문보다 약 30m 정도 높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양쪽의 곡성은 서문을 수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남쪽 곡성과 북쪽 곡성을 연결한 선으로부터 성문까지의 거리는 약 50m가 된다. 성문의 위치가 안으로 쑥 들어가 있어서 양쪽 곡성의 보호를 받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외부의 적이 침범하는데 일차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것이 이곳의 곡성이라 하겠다.
물론 이차적으로 성문 자체의 튼튼함이 있어야 하겠는데, 위치적인 측면에서 한 번 더 살펴보면, 바깥에서 설령 문을 통과하여도 서벽 안쪽이고 문의 바로 안쪽에 연못(아미지)이 있어서 성안으로 곧바로 들어갈 수 없다.
성문을 통과한 적병은 일단 연못과 부딪치게 된다. 성문을 부순 여세를 몰아 일거에 성내로 진입하려는 적병은 여기에서 일단 저지되며, 주위에 매복한 군사에 의하여 공격하게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평지에 쌓는 성에는 성벽 바깥에 도랑을 파 돌린 해자(垓子)가 있다. 해자는 성문 밖에 설치하는 것이 통례이다. 더욱이 산성의 경우는 해자를 마련하기 어렵다. 따라서 산성의 문 안쪽에 해자를 설치하려면 많은 물이 필요하며, 물을 모으기 위해서는 제일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한다.
서문은 삼중(三重)의 방비가 될 수 있으며, 출입이 편한 가장 낮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멀리 밖에서는 문의 위치가 잘 보이지 않게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안목과 지견을 갖춘 솜씨라 하겠다.

삼년산성 1차 동문지 전경(성밖) 삼년산성 1차 동문지 전경(성밖)

성벽의 두께가 매우 넓다. 실측에 따르면 약 12m 정도이다. 이렇게 넓은 성벽에 연접되는 문은 어떻게 구성해야 되었을 것인가. 성문이 오목하게 들어와 있고 양쪽에 곡성이 있는 모양 자체가 호구(虎口, 문의 문구부에 공간을 둔 것이며, 군사용어이다. 지금은 바둑에서 흔히 사용하지만 본디 성곽에서 나온 말이다)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1차적인 방어 계획이다.
상대 문의 초석과 문지방 돌의 구성으로 보면 문짝이 밖으로 열리게 되어있다. 세상에 성문이 밖으로 열리게 만든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성문은 보통 안쪽으로 열었다가 바깥을 향하여 닫고 빗장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그런데 삼년산성의 서문은 처음 문이 밖으로 열리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문을 구성하자면 어떻게 하여야 구조상 합리적이 될 것인가.
문 초석의 존재로 육축(陸築, 성문으로 통행하는 부분 나머지를 축조한 벽)하고 홍예(虹霓,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를 여는 그런 성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목재를 위주로 하는 구조의 성문이었다. 이런 성문의 성벽이 어떻게 구성되었을지 아직도 의문이다. 앞으로 이 서문의 구조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아내어야 한다.
현재도 그렇지만 성문 바로 바깥은 낭떠러지이다. 옛날도 마찬가지였었다고 밝혀졌다. 성문 앞에도 여유 있는 광장이 없다. 발굴과 조사에 따르면 문의 밖으로 박석(薄石, 얇은 돌, 널 판 모양의 돌을 까는 것)을 깐 통로가 있었는데, 지금 성벽이 있는 외측 벽면에 이르면 이 통로도 낭떠러지가 된다. 길은 여기에서 꺾이어 성벽의 바깥 밑으로 해서 계곡을 건너 산기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지금의 길과는 반대 방향의 기슭으로 길이 있었다.
서문의 안쪽은 바로 연못이다. 이 연못은 연못으로서의 기능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해자의 구실도 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해자가 성문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까지 접근되어 있었다. 문지방 턱을 넘어서면 약간의 경사를 이루며 안쪽으로는 높아지고, 그 끝에 석축이 있어 연못 벽이 된다. 이런 구성 때문에 문짝이 안쪽으로 열릴 수 없었다. 밖으로 여는 쪽이 오히려 구조상 합리적이었다.

하대의 성문

상대의 성문은 어떤 불행 때문이었는지 더 이상 사용되지 못하였다. 불에 탔었나 보다.
병란(兵亂)이 없었던 통일신라 시기의 일이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한동안 재건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문터는 매몰되고 성벽은 일부이지만 무너졌다.
급격히 문을 재건하여 산성을 다시 활용해야 될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전의 문 초석을 들어올리려면 연속된 다른 시설들도 뜯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것을 그냥 매몰하여 두고, 새로 다듬은 석재를 써서 원위치보다 성의 안쪽으로 약 3m 정도 이동하여 문을 세웠다. 하대(下代)의 문 초석이 남아 있는 과정을 이렇게 생각하여 보았다.

문의 초석을 새로 만들 때에 큼직한 돌을 구하여 네모기둥을 세울 홈을 파고, 문설주를 세울 홈도 파고 확쇠를 박을 홈을 만들다가 실패하였다. 다듬기도 어려운 돌을 사용한 외에 돌에 결이 생겨서 무거운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문 초석을 만들다 그만둔 것이 서문 밖의 민가 자리에 남아 있는 이유가 그렇다. 문의 초석은 성밖의 어딘가에서 결이 없는 화강암을 구하여 만들고 운반한 것이다. 삼년성 안에서는 이런 화강암은 나오지 않는다.
상대 문 초석을 매몰하는 과정에서 기왕의 성토된 층에다 부족한 흙을 더 보태어 보완하고 단단히 다짐을 하였다. 많은 기와 조각들이 이때에 섞여 들어갔다. 그리고 초석을 만듦에 있어서는 앞선 시기의 문짝이 밖으로 열리는 구조와 달리 이제는 안쪽으로 열었다가 밖으로 닫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 시기의 대부분의 성문에서 문짝이 안으로 열리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이어서 그것에 따르기로 하였던 모양이다.
상대 성문 자리보다 높게 신방석이 놓이게 되었으므로, 이제 연못 두둑의 높이와 대등하게 되어서 문짝을 안으로 열어도 크게 거추장스럽지 않게 되었다.
문은 성벽 밖에서 더 안쪽으로 들여서 만들었다. 호구가 그만큼 크게 만들었다. 적군이 호구 안에 많이 들어오면 문 위의 좌우에서 독 안에 든 쥐를 잡듯이 공격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동문지 및 수구지 내측 발굴지역 전체모습 동문지 및 수구지 내측 발굴지역 전체모습
마지막 동문지 북쪽 측벽 모습 마지막 동문지 북쪽 측벽 모습

역시 삼간(三間)을 구성하였다. 문의 초석은 거의 같은 크기와 모양을 하였으나, 이제 문 지도리 홈을 안쪽에 만들었다.문이 다 되었을 때 성벽도 문이 이동한 만큼 옮겨져야 하나 그것을 뜯어 옮겨 다시 축조하기에는 많은 노동력이 소요될 것이므로, 당초의 문 터 좌우 성벽에서 안쪽으로 덧대어 성문이 안쪽으로 들어온 만큼을 보축(補築)하였다. 3m 두께의 보축이 체성 안쪽으로 덧대어 쌓여지게 된 것이다.무너졌던 성벽이 이때 다시 제 모습을 찾게 되었으나 급하게 보수하였기 때문인지 처음의 그 치밀한 축조기법 보다는 엉성하게 되었다.엉성한 것은 문도 마찬가지이었고 보축된 좌우 측벽 부분도 그렇다. 이는 매우 서둘러 이들 시설을 완성하려 하였던 데서 야기된 결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삼국시대의 신라사람들이라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혹 문을 옮긴다 하더라도 이렇게 완전하지 못하게 처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와 조각들로 보아 매몰된 지반이 통일신라 시기 이후에 조성되었다고 판단된다. 또 기와 조각 가운데는 고려시대의 것은 없다. 지표에 무수히 고려시대 기와편이 있으나, 이 지층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통일신라 시기와 고려 초기의 사이에 해당하는 기간에 이 지반이 형성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후삼국시대가 그런 시기에 알맞다. 고려(高麗)가 먼저 점령한 것인지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이 먼저 점령하여 산성을 이용한 것인지를 밝힐 자료는 아직 없다.
그러나 유물로 보아 이 시기에 성문이 고쳐지고 성내의 여러 건물들이 중건되었다. 그들 건축물들이 고려의 어느 시기까지 존속되다가 폐지되고, 그 일부는 조선왕조 때까지 잔존하였던 모양이다. 조선왕조의 초기까지 군창(軍倉)만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대 문 초석에 이어 4개의 커다란 화강암으로 만든 네모진 주초(柱礎)가 있다. 기둥자리(柱座)가 조각되는 그런 주초가 아니라, 고려시대 특유의 네모진 판상할석(板狀割石) 모양 자연석 주초이다.
이 4개의 초석은 주간의 간격이 좁다. 주춧돌 크기에 비하면 기둥 간격이 너무 좁다. 그리고 앞선 시대의 문 초석들과 축선(軸線)이 맞지 않는다. 이것이 의문이다. 이럴 때 성문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의문인데 상상해 내기가 쉽지 않다.
성문이 밖으로 열리는 구조는 또 다른 효과가 있었으리라고 보인다. 문보다 좌우의 성벽은 바깥쪽으로 내밀어 있으므로, 문은 골목 안에 위치하는 듯이 호구(虎口)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밖으로 열린 문짝은 이 벽체에 의지하게 되어서 문으로 수레들이 드나들어도 거추장스러울 까닭이 없다.
밖으로 열리는 성문은 성안의 군사들이 갑자기 출동할 때 편리하다. 안쪽으로 열릴 때는 문이 열리도록 물러섰다가 전진하는 만큼의 시간이 단축된다.
성문에 접근한 적을 기습한다면 그런 효과를 볼 수 있다. 성문을 파괴하는 충차(衝車, 수레에 뿔처럼 앞에 댄 것으로 성벽을 무너트리는 도구) 등이 동원되었다고 가정하면, 밖으로 열리는 문짝은 상하와 좌우가 문틀에 지탱되어서 안쪽으로 여는 형태의 문짝이 빗장에만 의지하는 것 보다 월등히 견고할 수 있다.
문짝이 밖으로 열린다는 것은 그러나 차츰 문제가 있게 되었다. 적군이 만약 문에 바싹 다가와 문짝을 지탱하는 문설주를 찍어 문을 부수기가 쉽다.
문을 닫고 가로지른 빗장 대목(帶木)도 안쪽에 시설되었을 것이므로 문짝 자체의 견고함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문짝이 안으로 열도록 바꾼 것을 보면 무언가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문의 밖을 비워서 남겨두지 않고, 거기를 낭떠러지로 만든 것은 공성구(攻城具)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더구나 산기슭으로 나있던 도로가 성벽에 이어지면서 성벽 아래를 지나야만 문에 이를 수 있게 되었으므로, 공격군이 이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방어군이 성벽 위에서 지키고 있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설혹 약간의 결함이나 약점이 있었다 해도 문의 방어에는 지장이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원거리에서의 화공(火攻)도 큰 효과가 없다. 계곡 아래서는 성문이 올려다 보이지 않는다. 앞을 산세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성문을 공격할 수 있을 자리까지 접근하면 방어군의 사정(射程) 거리 안에 들어서게 되어서 매우 불리하다.
성문이 두꺼운 성벽 안쪽에 위치하게 하려는 배려는 공격을 차단하는 가장 좋은 방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상대 성문초석의 구조로 보아 문의 양쪽으로는 커다란 네모기둥이 세워졌었다고 보여진다. 네모난 기둥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을 지어 서 있었다. 이들 네모기둥들은 성벽과 직접 닿아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둥 사이를 무엇으로든지 막아야 한다. 역시 목재가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네모꼴 기둥 홈은 좌우측의 문 초석에 각각 네 개씩 있다. 네모기둥 4개가 열을 지어 서있는 구조이다. 문의 규모가 3칸을 이룬다. 그 네모기둥들이 문짝이 달리는 문틀의 좌우에서 앞쪽과 뒤쪽으로 열 지어 서 있는 구조로 되었다. 사주문(四柱門, 문의 옆 기둥이 한쪽에 4개가 있는 문)을 구성하면 문짝을 중간에 두는 방식이 통례일텐데 그 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네모기둥 위의 머리에는 건너지르는 나무가 있어 결구(結構)되어야 구성된다. 열을 이룬 4개의 기둥이 좌우에 있으므로 이 좌우 기둥머리를 가로지르는 재목이 있어야 하였을 것이므로, 자연스레 가로지른 천정목(天井木) 사이에도 딴 부재(部材)를 두어 천정목과 천정목 사이 틈을 막았어야 한다. 문을 덮는 천장이 형성된 셈이다.
목재로 만든 평평한 천정만으로 문틀이 완성되지는 못한다. 비를 막을 지붕이 설치되어야 한다. 평천정만으로는 지붕의 물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시 기둥 세우고 가구(架構)하여야 기와지붕을 이룩할 수 있다. 그러려니 자연히 성문의 외관은 다락집(樓閣)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치 지금의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같은 성문 유형을 방불케 하였을 것인데, 이런 누문(樓門)의 고형(古形)을 우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성곽도(城郭圖)에서 볼 수 있다.
삼칸(三間) 다락형(樓閣形)의 성문이 그것이다. 아래층 기둥은 상당히 높고, 위층 기둥은 짧아 급격히 체감한 듯한 형상의 것이다.
이 서문의 경우는 아래층 어간(御間)만이 목조의 문이 되고, 좌우의 쪽 칸은 성벽이 되는 방식에 따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층(重層)은 삼간(三間)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야 성벽 위로 문의 좌우에서 거침없이 다닐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문지
마지막 동문지 남쪽 측벽 모습 마지막 동문지 남쪽 측벽 모습

삼년산성 남문지는 삼년산성 남쪽 성벽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성벽은 남문지 서쪽으로 남서 모서리에 곡성(曲城)이 시설되어 있으며, 방향을 북쪽으로 회절하여 서쪽 성벽을 이루고 있다. 서남곡성이 시설되어 있는 곳에서는 남쪽으로 보청천 주변의 평야지대와 보은읍 일대, 그리고 북쪽으로 노고산성(老姑山城)과 문암산성(門岩山城)이 마주 보이는 위치이다.
문의 밖으로는 작은 계곡부가 있으며, 이 계곡부를 중심으로 양쪽의 능선부로 이어지는 성벽에는 곡성이 설치되어 있어 남문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발굴조사 전 남문지는 단면 U자형으로 성벽이 함몰되어 있었으며, 남쪽 측벽으로 추정되는 석렬이 성벽과 직교하여 윗부분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었다. 그리고 성벽 외측면에 남쪽 측벽선과 성문의 바닥으로 추정되는 석축열이 일부 확인되고 있었다. 이러한 지표상의 양상으로 삼년산성 남문은 현문식(懸門式)의 문으로 추정되어 왔다.
발굴조사 결과 남문지는 지표상에 나타난 대로 현문식의 문으로서, 1~2차례 개축과정을 거쳐 계속하여 사용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개구부를 폐쇄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남문지 부근의 성벽 또한 1~2차례 개축 과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차 문지

남문지의 1차 문지는 현 지표가 된 성벽 상부면에서 약 4.9m 아래에서 개구부의 바닥면이 확인되었다. 문구부는 단면 ‘凹’자형의 현문식의 문으로 확인되었다.
문의 개구부 너비는 바닥면을 기준으로 3.8m, 길이는 10.8m의 규모이다. 바닥은 문의 개구부 동쪽 측벽의 외측으로 후대의 측벽이 남아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바닥석은 대형 판상의 할석을 이용하여 평탄하게 성벽 진행 방향과 수직을 이루며 깔아 조성하였으며, 판상의 할석 사이는 깨어진 작은 돌 부스러기로 메운 후 흙으로 다짐하였다. 바닥면의 내측과 외측의 높이 차이는 없다. 바닥면의 내측으로부터 6.2~6.4m, 동쪽 측벽에서 1~1.1m 지점에서 철로 만든 확쇠 암수가 수습되었으며, 주변에서는 성문에 사용되었던 철제 못이 다량 출토되었다.
문구부 내측의 양쪽 측벽에 잇대어 있는 석축과 확쇠가 출토된 지점으로 보아 문구부의 폭은 1.9~2.0m로 추정된다.

삼년산성 남문 좌측벽 삼년산성 남문 좌측벽

바닥면에는 별도의 배수구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다만 개구부의 남쪽 측벽에 치우쳐 10~15cm 너비의 측구가 마련되어 있어 성문 바닥으로 떨어지는 빗물이 배수될 수 있도록 하였다.
개구부의 측벽은 문구부 외측 동쪽 측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다만 동쪽 측벽은 성벽에서 내려 미는 하중으로 인하여 측벽의 중간부가 심하게 밀려나 있는 상황이며, 양쪽 측벽의 상단부는 모두 파괴된 상태이다. 측벽의 당초 높이는 개구부의 남쪽 성벽을 기준하면, 5m에 이르고, 동쪽 성벽을 기준으로 하면 약 8m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양쪽 측벽에 사용된 석재는 대부분 성벽의 하중으로 인하여 심하게 깨어진 상태이다.
서쪽 측벽은 현재 35층 3.95m의 높이가 수직으로 잔존하고 있다. 측벽의 벽면 상황으로 보아 측벽은 적어도 1~2차례의 수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개구부 내측의 하단부 석축상태는 성벽의 외측 벽면과 내측 벽면과 같이 정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중간부의 석축 상태는 이것에 비해 조잡한 편으로, 면석의 모서리가 서로 어긋나 있는 것들을 관찰할 수 있다. 또한 개구부 외측은 후대에 문구부의 너비를 좁히는 과정에서 수축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동쪽 측벽은 36층 3.6m의 높이까지 잔존하고 있다. 측벽의 길이는 현재 문구부의 내측으로부터 바깥으로 8.5m 길이까지 남아 있으며, 그 밖으로는 후대 개구부의 너비를 좁혀 쌓은 측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구부의 외측 성벽은 문구부의 바닥 면으로부터 성벽 외측의 기초 보축의 상면까지 18층 2m의 높이로 남아 있다.
개구부 외측의 기초 보축성벽은 2중의 기초 보축 성벽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문의 개구부를 중심으로 서쪽은 서남 곡성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보축 성벽이 문구부의 서쪽 측벽 아래에 맞닿아 있으며, 그 외측으로 다시 상면이 115cm 너비의 보축 성벽이 덧대어져 있다.
이 외측의 보축성벽은 일단 서남곡성 방향의 능선에서 남문으로 통행하는 통행로로 추정된다. 다만 서쪽 성벽의 곡성에서 확인되었듯이 곡성의 하단 기초보축이 2중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외측의 보축성벽이 서남곡성의 2번째 기초보축 성벽과 연결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추후 서남곡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 밝혀질 것이다.
외측의 보축 성벽은 문구부 외측에서 115cm의 너비로 문구부 동쪽 측벽선 아래까지 이어지며 이곳에서 다시 계곡부를 향하여 2중의 보축 성벽으로 갈라지고 있다. 내측의 보축 성벽은 체성 성벽과 110cm의 너비로 성벽을 따라 이어지고 있으며, 외측의 보축 성벽은 내측의 보축성벽에 잇대어 계곡부를 향하여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삼년산성 초축 당시부터 계곡부에 대하여 2중의 기초 보축성벽을 쌓은 것인지, 아니면 문구부를 개축하는 과정에서 후대 보축 성벽의 외측으로 덧대어 다시 시설한 것인지는 계곡에서 서남 곡성으로 이어지는 성벽의 외측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만 밝혀질 것이다.


삼년산성 남문지의 2차 문지는 1차 문지의 측벽 상단부와 외측의 성벽이 붕괴된 이후 문구부를 좁혀 사용하였다. 현재도 문구부의 동쪽 성벽의 외측 벽면은 심하게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며, 내측 벽면에서도 일정한 보수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문구부의 너비는 바닥 면을 기준으로 2.4m이며, 좁혀진 동쪽 측벽의 길이는 2.5m로 문구부의 외측으로부터 곡선상으로 1차 문지의 동쪽 측벽에 이어지고 있다.
최종적으로 삼년산성 남문지는 후대 문구부의 외측을 석축하여 문지를 폐쇄함으로써 문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동문지(東門址)

삼년산성 동문지는 삼년산성에서 가장 긴 동쪽 성벽의 중앙부에 위치한다. 문지의 북쪽은 305.0m의 작은 봉우리와 남쪽으로 이어지는 능선부 사이의 작은 안부를 이룬 곳으로 문지의 남쪽으로 수구지가 위치하고 있으며, 성벽 내측으로는 반원상의 평탄대지이다.
동문지의 조사 전 모습은 성벽의 내측 약 절반이 보다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어 이곳의 통행은 직선이 아닌 ‘ㄹ’형으로 돌아야만 가능한 형태였다. 이러한 출입통로로 인하여 동문지는 적의 공격 시 방어력을 겸비한 특이한 성문구조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금번 발굴조사 결과 삼년산성 동문지는 2~3차에 걸친 수 개축 과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현재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는 문구부의 구조는 가장 후대의 문구부이며, 당초 삼년산성의 축성당시에 동문지는 내옹벽(內擁壁)을 갖춘 현문식(懸門式)의 문지였던 것이 밝혀졌다.

삼년삼성 남문지 좌측벽 외측 삼년삼성 남문지 좌측벽 외측

1차 문지

동문지의 1차 문지는 내옹벽 시설을 갖춘 현문의 형식으로 된 개구부(開口部)가 바깥쪽에서 확인되었다. 마지막 문지의 남쪽 석축열 외측의 무너진 석재와 토사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성벽과 직교하는 석축열이 노출됨으로써 확인되었다. 그 안쪽으로는 후대의 수축된 유구로 인하여 더 이상의 조사가 불가능한 상태이다.
1차 문지의 개구부 너비는 5.1m이며, 내측 성벽선이 확인 되지 않았으나 문지 좌우의 당초 성벽 통과선으로 추정하면, 측벽의 길이는 10.5~10.6m이다. 개구부의 바깥쪽 선단은 곧 성벽의 외측 벽면과 동일하다.
문구부의 바닥면은 성벽을 축조한 양상과 동일하여 판상 할석을 평탄하게 깔아 바닥면을 조성하였으며, 내측과 외측의 경사도는 현재로는 알 수 없다.
문구부의 좌우 측벽은 양쪽 성벽 자체의 하중으로 인하여 개구부의 중심부를 향하여 심하게 내측으로 밀려 기울어져 있는 상태이다. 남쪽 측벽은 현재 6층 석축 높이 1m, 북쪽 측벽은 8층 석축 높이 1.2m가 잔존하고 있다.
내옹벽은 문구부 북쪽 내측 성벽을 확인 하는 과정에서 노출되었다. 내옹벽은 1차 문구부의 추정 북쪽 측벽선에서 북쪽으로 4.5~4.7m의 거리에서 내측 성벽에 잇대어 호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내측 성벽과 맞닿아 있을 뿐 맞물려 있지는 않다. 현재 11층~13층, 석축의 높이는 1.9m, 길이 2.6m가 잔존된 상태이며, 너비는 약 2.7~3.0m이다.
따라서 초축 당시의 삼년산성 동문지는 현문식의 문구부와 성 내측에 내옹벽을 갖춘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이번 발굴조사를 통하여 밝혀졌으나, 내측 성벽의 벽면과 내측 남북 측벽, 바닥의 상태 및 세부 구조는 추후 조사를 요한다.

마지막 문지

동문지의 최종 문지는 초축 당시의 현문이 양쪽 성벽의 하중과 북쪽 경사면의 토압으로 인하여 개구부와 내옹벽부가 붕괴된 이후 1~2차례의 수축을 거쳐 마지막으로 사용된 문구부이다. 발굴조사 전 지표상으로 노출되어 있던 문구부이다.
마지막 문지는 당초 개구부의 내측으로 길이 7.5~8m, 너비 4.5~5m 규모의 석축부를 초축 성벽의 보다 안쪽으로 돌출시켜 마련함으로써 성내로의 통행은 직선이 아닌 한번 꺾여서 통행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개구부의 외측은 넓고 안쪽으로 돌출된 석축부를 마련하여 안쪽 개구부가 좁혀진 형태이다.
돌출된 남쪽 측벽은 붕괴된 문지를 정지한 후 2~3층을 석축하여 측벽을 마련하였으며, 개구부 내측으로 기둥의 초석으로 쓰인 듯한 비교적 큰 돌이 놓여져 있다. 개구부의 북쪽 측벽은 현재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으나 기존 성벽 붕괴 경사면의 제일 남쪽 석축과 성내측의 북쪽 경사면으로 석축이 남아 있어 이것이 북쪽 측벽으로 추정된다.
이 석축열을 북쪽 측벽으로 가정한다면 개구부의 너비는 내측에서 3.5~3.9m, 돌출된 석축의 외측은 8.5~10.0m의 너비가 되며, 개구부 측벽의 길이는 돌출된 석축 부분만을 개구부로 가정한다면 4.7m에 불과하나 성외측 성벽부까지를 기준으로 한다면 13.5~14m에 이른다. 이 마지막 개구부의 내측으로 북쪽 측벽처럼 이어진 내옹벽이 존재한다.
초축 당시의 1차 문지와 마지막 문지 사이에는 1~2차례 수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구가 남아 있다. 먼저 2차 문지로 추정되는 것은 1차 현문식 문지가 양쪽 성벽의 자체 하중으로 붕괴된 이후 문지의 범위를 보다 넓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돌출된 성벽부의 외측 석축상황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내측의 돌출된 석축이 성벽과 직교하게 꺾이는 부분의 석축상황이다. 석축의 가장 아랫단은 성벽과 직교하도록 놓여져 있으나, 그 윗부분은 석재를 약간 비스듬히 놓아 석축의 모서리가 둥글게 돌아가도록 쌓고 있다.
이 석축열과 대응하여 북쪽으로도 나란한 석축열이 보이고 있어 이것이 2차 문지가 아닐까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내측의 돌출된 석축으로 인하여 내측을 확인 할 수 없으므로 2차 문지가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차 문지는 돌출된 석축부의 동쪽 벽면과 마지막 문지의 내측으로 남아 있는 석축열과 ‘ㄱ’자 모양의 석축열로 추정할 수 있다. 돌출된 석축부의 동쪽 벽면 중앙에는 약 2m의 너비로 개구부의 측벽으로 추정할 수 있는 수직선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수직선과 대응되는 서쪽의 벽면에는 개구부의 측벽으로 추정할 수 있는 수직선이 확실하지 않아 이것이 문지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북문지

삼년산성 북문지는 보은사(報恩寺)의 북쪽으로 북쪽 성벽의 중간부에 단면 U자형으로 함몰된 부분이 있으며, 보다 서쪽으로 같은 양상으로 함몰된 부분이 있어 동쪽의 것이 북문지로, 서쪽의 것은 암문으로 추정되었다. 금번 발굴조사에서는 동쪽 북문지로 추정된 곳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북문지 외측으로는 비교적 큰 계곡으로 이어진다.

삼년산성 서남성두에서 서문지쪽 전경 삼년산성 서남성두에서 서문지쪽 전경

북문지는 지금까지 성문 밖으로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어 북문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방어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의 성문양식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이번 발굴조사를 통하여 초축 당시의 북문이 아닌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성문임이 밝혀졌으며, 또한 차단벽으로 알려졌던 성문 밖의 석축은 문지 앞에 후대에 만든 일종의 치성임이 아울러 밝혀졌다.
북문지의 문구부는 초축 성벽이 무너진 후 체성의 채움석을 정리한 후 문구부를 마련하였다. 문구부는 폭 3.5~3.6m, 길이 7.0~7.5m의 규모이다. 문구부의 바닥면은 초축 성벽의 채움돌을 정리한 후 그 위로 잔자갈과 흙을 섞어 다진 후 바닥면으로 사용하였다. 바닥면의 안쪽과 바깥쪽의 높이 차이는 1.4m로 바깥에서 안으로 경사지도록 하였으며, 또한 바닥면의 동쪽이 서쪽은 약 40cm의 높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바닥면에서 별다른 배수구의 흔적은 없다. 바닥면에서는 많은 양의 기와편과 철제 못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 내지 조선 전기에는 성문의 문루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구부의 측벽은 동쪽 측벽이 9층 1.1m, 서쪽 측벽이 7층 1m의 높이로 남아 있으며, 서쪽 측벽은 초축 성벽의 내측으로 약 1m 지점까지 이어지고 있다. 측벽에 사용된 성돌은 비교적 큰 석재를 이용하고 있으며, 특히 문구부 가장 외측의 측벽석은 대형의 것을 사용하고 있어 문루의 초석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측벽의 축조 상태는 매우 조잡하다. 서쪽 측벽의 가장 외측 측벽석 아래에 깨어진 문 확석이 놓여져 있으며, 문구부의 외측 벽면은 초축 성벽에서 약 4.5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 벽면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서쪽 벽면은 대부분 붕괴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서쪽 벽면의 외측으로 다시 2m의 간격을 두고 약 9m의 길이로 계단식의 석축이 시설되어 있다. 그러나 석축의 위쪽으로 초축 성벽의 붕괴사면이 이어지고 있어 이 석축의 성격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문지 외측의 치성 밖에서 성문으로 통행하던 통행로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곳이 통행로일 가능성이 추정된 뿐이나 붕괴의 위험으로 인하여 더 이상 조사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북문지의 내측으로는 성안에서 성문으로 통행할 수 있는 계단 시설이 있다. 계단 시설의 너비는 동쪽 측벽에서 동쪽으로 1.4m 지점에서 시작하여 내측 성벽에서 약 6m의 너비로 곡선상으로 서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계단은 3열로 이루어져 있으며, 간격은 0.8~1m이다.

성벽

삼년산성 동문지 부근의 성벽은 크게 체성벽과 외측 기초를 이룬 보축성벽, 그리고 여장부로 구성되어 있다.

성벽 외측 하단의 기초 보축성벽

먼저 보축 성벽은 체성벽의 외측벽면의 하부에 5.8~6m의 높이까지 단면 부채꼴 모양으로 남아 있다. 보축 성벽의 기초부는 소토가 섞인 진흙을 다져 정지한 후 보축성벽을 쌓아 올렸다.
경사도는 아래에서 1.5m 높이까지는 64도의 경사면을 이루며, 다시 3.2m까지는 60도의 경사면을 이루며 축조 되었다. 외측 선단 첫 층의 석축 기초로부터 위쪽으로 3.2m 지점에서 보축성벽은 약 20cm가 앞으로 내밀어 다시 70도의 경사면을 이루며 축조되었다. 보축의 상면은 0.8~1m로 평탄면에 가까운 외환도(外環道) 모양을 이루고 있으나, 이는 보축성벽의 위쪽이 붕괴된 때문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당초 보축성벽은 경사도를 달리하여 체성벽의 외측 벽면까지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보축성벽은 약 38~40층으로 석축되었다.

체성벽

동문지 부근의 체성은 성벽 상면에 여장시설을 갖춘 단면 사다리꼴의 모양이다. 성벽의 너비는 여장 아랫부분 체성벽 상면을 기준으로 8.6~9.0m에 이른다.
외측 벽면은 기단보축으로부터 평균 82도의 경사면을 이루며 90~100층 14m의 높이로 남아 있다. 그러나 체성벽 밖으로 보축 성벽이 5.8~6m의 높이로 남아 있으며, 온달산성의 외측성벽에서 확인된 것처럼, 당초 체성벽은 보축성벽의 내측으로 보축성벽의 바닥부분까지 이어질 것으로 추정되며, 이럴 경우 외측 체성벽의 전체 높이는 19.8~20m에 이르게 된다. 체성벽의 아래 너비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바닥부터 겹축성벽일 경우 최소 15.5m가 된다.
내측 벽면은 평균 81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고, 지표 아래로부터 약 50층 8m의 부분까지 확인되었다. 당초 내벽은 현재 성벽의 내측 붕괴경사면을 고려하면, 최소 13m에 이르렀을 것을 추정된다.

여장

동문지 부근의 성벽 윗면에는 지표상에 여장으로 추정되는 석축열이 체성벽의 외측벽과 나란하게 확인되고 있었다. 삼년산성의 여장 구조를 확인하기 위하여 성벽 윗면 남쪽과 북쪽에 2곳의 발굴구덩을 설치하여 여장시설을 확인하였다.
조사결과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던 석축열은 후대의 여장시설 기초부이며, 성벽축조 당시의 여장시설은 보다 외측에 시설되어 있었다.
성벽의 외측 체성벽에서 미석이 없이 곧장 여장을 쌓았으며, 여장의 너비는 105~110cm, 높이 70~80cm의 규모로 남아 있다. 여장을 쌓은 석재는 성벽을 쌓은 석재와 동일한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여장의 내측 벽면 축조 상태는 체성 벽면 보다는 정연하지 못하다. 타( )의 유무는 확인되지 않았다.
여장의 내측으로 성벽 윗면은 성벽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지게 대형의 판상 할석을 깔아 성벽의 윗면을 마무리 한 후, 성벽 윗면을 20~25cm 높이까지 사질이 섞인 다짐층위가 있고, 그 위로 약 7cm의 두께로 갈색 점토 다짐 토층이 있다. 이 층위 위로 표토까지 황갈색과 적갈색의 점토와 굵은 자갈이 섞인 토층이 약 10~15cm의 두께로 교대로 여장 상면까지 보이고 있다. 이러한 토층상은 성벽 내측으로 계단상을 이루며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토층상으로 보아 초축 당시의 성벽 윗면은 사질토를 다짐한 후 다시 갈색 점토를 이용하여 다짐한 층위의 윗면이 성벽 윗면이었다고 추정된다.

삼년산성 서문 우측수구 삼년산성 서문 우측수구

치성(雉城)이란 성벽의 기둥처럼 성벽을 튼튼히 유지시킬 뿐만 아니라, 적의 접근을 조기에 관측하고, 전투 때에 성벽에 밀착 접근한 적을 정면 또는 측면에서 격퇴시킬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돌출(突出)시켜 내쌓은 구조물을 말한다.
치성 가운데 성문 좌우에 설치되어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치성을 두고 그 위에 건물을 지어 적대(敵臺)라 하며, 체성(體城)에서 직각으로 나가는 네모꼴을 이루는 것이 많다. 삼년산성의 것처럼 반원형(半圓形)의 치성은 특히 이를 곡성(曲城)이라 부른다.
삼년산성의 북서쪽 곡성은 서문을 중심으로 서남 곡성과 대응되는 위치에 구축되어 있는데, 이들 두 곡성은 주위 지형과 설치된 위치로 보아 성의 정문인 서문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북 곡성과 성벽이 접하는 부분의 폭은 10.2m이며 성벽과 접하는 양쪽 지점을 연결한 선에서 최대 7.6m가 밖으로 돌출되어 있다.서북 곡성의 평면은 전체가 반원형(半圓形)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는 않고, 곡성과 성벽이 접하는 부분은 성벽 벽면에서 거의 수직으로 2m 가량 돌출 된 다음 굽어지기 시작하여 직경 10m정도의 반원형(半圓形)을 이룬다. 보수 정비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평면상태는 지대가 낮은 쪽 즉, 서문 쪽으로 전체가 쏠린 형태였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의 침하(沈下) 현상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며 축조 당시에는 좌우 대칭(對稱)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곡성의 외측 벽면의 잔존 높이는 반원형의 최대 돌출부에서 90㎝, 북쪽의 치와 성벽이 접하는 부분이 2.2m였다.
외측 벽면의 면석은 판상석(板狀石)들로서, 재질은 체성(體城)의 면석들과 같다. 그러나 체성의 면석들은 두께가 8~20㎝정도로 여러 가지가 섞여있으나, 곡성에서는 두께가 너무 얇은 돌은 별로 쓰지 않는 등, 대체로 두께가 비슷한 정도의 돌들을 주로 사용하였는데 그 두께는 평균 18㎝ 정도이다.
반원을 형성하는 면석들은 사다리꼴(梯形) 형태의 석재들인데 마구리 면이 직선인 석재들을 맞추어 반원형으로 축조한 기술은 아주 뛰어나다. 성 돌들의 형태와 쌓은 수법은 성벽 부분과 거의 같다. 즉 品자 모양 쌓기로 되어 있다. 다만 곡성의 반원형을 구성하기 위해 곡성의 중앙부에서 방사형(放射形)을 이루도록 중앙의 원을 이룬 중심을 향하여 방향을 달리하면서 돌아가듯 길게 석재를 놓아가며 축조하였다.
곡성의 축조는 체성 성벽을 먼저 쌓고 덧붙여 축조하는 것이 통례이나, 삼년산성에서는 체성 조성과 동시에 축조한 경우이다.

삼년산성 서문우측벽내측 삼년산성 서문우측벽내측

이처럼 삼년산성에서는 외부지형이 경사면이므로 체성과 별도로 곡성을 축조하는 것보다는 곡성과 체성을 일체로 구성하는 편이 보다 견고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그런데 서북 곡성에서는 곡성과 체성이 서로 물린 일체의 구조이기는 하나, 곡성의 외측벽면 양쪽 끝이 체성과 접속되는 방법이 서로 다르다. 곡성의 남쪽 끝 부분은 성벽과 한 켜 한 켜가 서로 엇물려 들어가는 방식이지만, 북쪽 끝은 곡성과 외측 벽면이 계속하여 체성 속으로 연장된다. 이러한 방식은 구조적인 면에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지대가 높은 쪽은 서로 분리시켜 높은 쪽으로부터의 측면 압력이 곡성에 작용하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고, 낮은 쪽은 서로 물리게 하여 아래쪽으로 쏠리는 것을 막아보려는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또한 기초 지반의 부동침하(不同沈下, 동일한 비율로 꺼져 내리지 않음)에 있어서도 서로 분리된 구조일 경우 붕괴의 위험성이 더 적다.
그리고 흥미로운 비교 자료로서 북서쪽 곡성에 대응되는 위치에 있는 서남쪽 곡성을 살펴보면 서남쪽 곡성은 북쪽, 즉 서문 쪽 부분은 체성과 서로 한 층 한 층씩 물려있고, 반대편인 남쪽 끝 부분은 체성 속으로 연장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성은 서남 서북 곡성 둘 다 지대가 낮은 서문 쪽은 체성과 곡성의 외벽이 서로 물리게 쌓았으며, 그 반대편 높은 쪽은 곡성의 외측 벽면이 그대로 체성 속으로 연장되어 들어가는 방식이다.
서북 곡성의 보축은 2단으로 구성되었다. 위쪽의 제1보축은 최대 높이 1.7m, 경사도는 1 : 0.38로서 성벽보다는 완만하나 체성의 보축보다는 급경사이다. 면석들은 곡성에 사용된 면석과 그 크기나 형태가 비슷하다. 상부 폭은 중앙부에서는 85㎝이나 양쪽 끝 부분에서는 점차 줄어들어 30㎝ 정도이다.
그리고 상단 보축이 체성의 보축과 만나는 부분을 북쪽 끝에서 살펴보면, 체성의 보축을 먼저 쌓고 난 후, 곡성의 보축을 쌓았는데, 곡성의 보축이 체성의 보축보다 2단 가량 높게 되어, 체성의 보축을 덮고 있다.
평면 형태와 축석의 방식이 특이한데, 평면은 상단 보축이 곡성의 외벽에 대해 동심원 형태로 돌아갔으나, 하단 보축은 상단 보축의 양쪽 끝에서는 상단에 붙어서 시작되나 중앙부에서는 3.7m 정도나 내밀어져 있다. 최대 돌출부의 현재 높이는 80㎝이며 경사도는 1:0.3이다.
하단 보축이 상단 보축과 접하는 부분은 상단 보축의 위쪽이나 중앙부 쪽으로 오면서 지형이 낮아지는 것과 맞추어 하단 보축도 점차 낮아진다. 중앙부의 하단 보축 상부와 상단 보축 하부와의 높이 차이는 2m에 달하는데 상 하단 보축 사이의 경사면은 상단 보축의 아래 어느 정도의 부분까지는 돌로 덮여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양쪽 끝 부분 주위에 이 경사면을 덮었던 석재들의 자취가 일부 남아있다. 하단 보축의 면석은 곡성과 상단 보축의 면석들에 비하여 비교적 넓적한 것들이다. 상 하단 보축 사이 경사면을 덮은 석재들은 외면이 경사진 석재들로서 체성의 보축 면석들과 형태가 비슷하다.
삼년산성에는 이러한 곡성이 성벽 중간에도 있지만 방향이 바뀌는 산꼭대기마다 있다. 현재 서북 모서리와 남서 모서리의 것은 잘 눈에 띄지 않으나, 남동쪽과 북동쪽 높은 위치의 곡성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다.
꼭대기에 있는 곡성은 특히 능선을 따라 올라오는 적을 막고 멀리까지 관측이 용이한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년산성의 위용을 대표하는 곡성이 바로 동북쪽 꼭대기의 곡성이다.

삼년산성 서북성두 삼년산성 서북성두

삼년산성의 수구는 동문지 남쪽의 계곡부 잔존 성벽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출수구는 이미 체성 외측벽면의 하단에 그 형태가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입수구는 지표아래에 묻혀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중간부를 관통하는 수구는 삼년산성 외에 충북지역에서 청원 양성산성을 비롯하여 충주산성, 단양 온달산성에서 이미 입수구와 출수구가 조사된 바 있으며, 이들 중 삼년산성 수구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수구는 현재 남아 있는 보축성벽의 윗면에서 약 1m의 높이에서 수구 바닥돌(舌石)이 시작된다. 이 바닥돌은 밖으로 약 15cm가 돌출되어 있으며, 다른 석재보다 비교적 큰 것을 사용하였다. 출수구 바닥의 너비는 43cm이며, 좌우로 측벽을 쌓았다. 가장 위쪽의 석재는 면을 사면(斜面)으로 가공하여 수구의 형태가 오각형이 되도록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현재 좌측의 맨 위쪽 석재는 당초 오각형의 모양이 깨어진 것인지 붕괴되어 다시 쌓은 것인지 수직선을 이루고 있다. 출수구의 높이는 63~64cm이다. 좌측이 5층, 우측이 4층으로 쌓여져 있다. 덮개돌은 길이가 긴 석재를 이용하여 2단으로 쌓았으며, 그 위로 체성벽의 외측 벽면이 이어진다.
수구의 바닥면은 두께 10cm 내외의 판상석을 이용하여 계단상으로 입수구로 이어지고 있으며, 입수구까지는 직선이 아닌 중간부분이 남쪽으로휘어진 곡선상을 이루고 있다. 입수구의 형태는 출수구와 같은 오각형이며, 입수구 바닥면의 너비 37cm, 높이가 64cm의 규모이다. 입수구 덮개돌은 길이 입수구는 체성의 내측벽면에 잇대어 별도로 석축하지 않고 그대로 벽면에 덮개돌을 약 10cm 내밀게 하여 만들었다.110cm, 두께 15cm의 비교적 큰 석재를 이용하였으며, 좌우 측벽은 각각 4층으로 축조하였다.
입수구를 처음 노출 시켰을 때 입수구는 판상할석을 이용하여 입수구가 폐쇄되어 있었다. 이것이 후대 매몰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인위적으로 폐쇄시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단양 온달산성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판상할석을 이용하여 입수구를 폐쇄시킨 예가 있다.
입수에서 출수구까지의 길이는 13m이며, 바닥면을 기준한 높이 차이는 4.2m이다.
입수구 내측으로는 입수구에서 약 40cm 내측으로 대형의 판상 할석이 놓여져 있으며, 대형의 판상할석을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강돌과 판상할석을 깔아 도수로(導水路)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입수구 내측에서는 별다른 연못지나 집수시설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얇게 회색 점토가 깔려 있는 부분이 있을 뿐이었다.
이 밖에 삼년산성에는 서쪽 계곡부에 수구가 위치하여야 하는 곳이다. 서쪽 성벽은 삼년산성에서 가장 낮은 계곡부를 가로막은 성벽으로 내측의 아미지로부터 성밖으로 우수를 배수하여야만 하는 지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지표상으로는 수구의 유무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연못지

삼년산성의 서문을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것이 아미지(蛾眉池)라 바위에 새긴 글씨이다. 이 글씨는 신라의 서성(書聖) 김생(金生)이 쓴 것이라 전해왔다.
이 바위에서 보다 높은 곳에 잘 보이지 않지만 유사암(有似巖)이라 새긴 것이 있고, 다시 그 위에 옥필(玉筆)이라 쓴 것도 있으나, 글씨의 모양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아미지라 쓴 것이 제일 예뻐 보인다.


아미지라는 것은 이 바위 앞에 있는 연못의 이름인 듯하다. 연못은 그 둘레가 얼마나 되는지 아직 완전히 조사된 것이 아니지만 성안에 있는 연못으로서는 매우 큰 편에 속한다. 20여년 쯤 전에 이 연못을 시굴조사 할 때에는 연못이 메워지고 논으로 경작되고 있었다. 물이 빠지는 곳이 깊이 패여 있었을 뿐이었다. 조사에 의하여 연못은 약 50m의 지름을 가진 둥근 모양의 것이 차츰 메워져 나중에는 서쪽 성벽 가까이에 반달 모양으로 작게 남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모습이 아마도 시인묵객(詩人墨客)의 눈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눈썹처럼 매력적으로 보인 것이 아닐까.
아미(蛾眉)는 개미의 눈썹이란 뜻이지만 개미처럼 허리가 잘록한 여인의 눈썹을 말하기도 한다. 본디 있었을 연못이 절반쯤 메워지고 남은 반달 모양의 연못이 있었을 때 이곳에 찾아온 멋진 사람이 이 연못의 이름을 아름다운 여인의 윙크하는 눈맵시에 비유하여 돌에 새긴 것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리라.

사진으로 보는 삼년산성

시 대 : 신라
면 적 : 226,000㎡
위 치 :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삼년산성(三年山城)은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漁岩里)의 최북단에 위치한다. 북쪽은 풍취리(風吹里), 서쪽은 성주리(城舟里), 동쪽은 대야리(大也里)로 둘러싸여 성벽이 축조된 능선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처음 축조된 것은 신라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3년(470)이며, 이어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8년(486)에는 장정 3,000명을 동원하여 개축하였다.
삼년산성은 해발 350m 정도로 그리 높지 않은 산에 자리 잡았으나 막상 성에 올라가 보면 한 눈에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높이이다. 그것은 성벽을 높이 쌓은 결과이다. 10~15m에 달하는 성의 높이는 우리나라의 어디를 가도 볼 수 없는 삼년산성만이 가지는 위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