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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남한산성 개요

위 치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성남시ㆍ하남시 일부 포함)
지정번호 : 국가지정 사적 제57호 (1963년 01월 21일 지정)
시 대 : 조선시대
성 격 : 석축산성 (포곡식)

남한산성은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 등 3개 시에 걸쳐 있으나 성의 대부분은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산성은 청량산(479.9m)을 주봉으로 하여 북쪽으로 연주봉(466m), 동쪽으로 벌봉(514m)과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고 있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 위에 자리잡고 있다.

남한산성 항공사진 남한산성 항공사진

남한산성은 사방으로의 넓은 조망권과 풍부한 수량과 경작지, 그리고 백제의 왕도 한성의 중심지였던 풍납동과 방이동 일대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는 6세기 중엽 이후부터 고려 조선시대까지 신주와 한산주 및 광주군의 읍치가 있었던 하남시 춘궁동 일대로서 모두 5km 범위내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한양도성으로 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주요 길목으로서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삼국시대부터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남한산성은 1963년에 사적 제57호로 지정된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에 대비하여 1986년에 처음으로 학술조사(경기도 백제문화유적 지표조사, 남한산성지표조사)가 한양대박물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후 별다른 조사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1990년대 중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남한산성에 대한 학계의 역사적 인식이 재고되면서 경기도 광주군의 남한산성 문화관광벨트화계획에 따라 중심지역인 행궁지(경기도기념물 제164호)에 대한 발굴조사가 1999년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동시에 이전 지표조사의 오류와 조사내용의 보완을 위한 정밀지표조사와 긴급성벽조사 등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남한산성의 역사와 현황 및 행궁지의 구조가 밝혀지고 있고, 더불어 조선시대 이전의 고고학적 기록물, 즉 고려시대 주거지와 통일신라시대 및 삼국시대의 유물들이 조사되면서 남한산성의 고고ㆍ역사ㆍ문화적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현재 남한산성에는 행궁지를 비롯해 지정문화재와 비지정문화재가 다수 소재하고 있다. 지정문화재는 남한산성이 1963년 1월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된 이래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6개소, 경기도 문화재자료 2개소, 경기도 기념물 3개소 등이며, 비지정문화재는 산성관리청인 수어청을 비롯하여 장대 3개소, 사지 6개소, 옹성 5개소, 봉화대 2개소, 문 4개소, 암문 15개소, 수구문, 우물터 6개소, 비석 43여개, 봉암외성, 한봉외성, 신남성, 포루, 돈대 등이 있다.

역사적 배경

남한산성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지리적ㆍ공간적인 위치에 있다. 산성이 위치한 지역은 삼국시대에 패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삼국이 사력을 다해서 챙취하고자 했던 지역이다.

백제왕도로서의 가능성
1970년대 광주부(해농지도) 1970년대 광주부(해농지도)

삼국시대의 남한산성 지역은 백제초기에 한산(漢山)으로 불리워지던 곳으로 남한산성이 백제의 왕도였다는 견해는 이미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지자료는 남한산성이 백제의 고성임을 밝히고 있다.그러나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저자인 홍경모는 유형원의 반계수록 내용을 인용하면서 “남한산성은 온조가 쌓은 것이라 하는데 한산 위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없고 백제사는 기록이 소략하여 문헌에 근거할 것이 없다” 면서 백제도읍은 지금의 검단산 아래인 광주의 고읍이며, ‘온조의 고성’은 이성산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하남시의 이성산성과 백제의 왕궁터로 추정되어 온 교산동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백제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백제고도로서의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남한산성에서도 약간의 백제토기들이 출토되기는 하였지만 온조의 고도일 가능성은 희박할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통일신라의 주장성(晝長城) 설과 그 규모

신라때의 남한산성 지역은 한산주(漢山州) 남한산주(南漢山州) 한주(漢州)라는 지명으로 불리웠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의 문무왕(文武王) 12년(672)조에는 “… 한산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이다 … (… 築漢山晝長城 周四千三百六十步 …)”라는 기록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도움을 준 당나라와 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한강유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672년에 주장성을 축조하였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이 신라 주장성이라는 견해는 이미 조선 초기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지자료에서 언급해 왔지만 구체적인 물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논의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수행된 남한산성 행궁지 기단 퇴적토 및 주변지역 발굴조사에서 관련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남한산성은 신라 주장성일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성내의 지표에서 발견되는 삼국시대의 유물의 분포 빈도수가 낮다는 사실과, 조선시대 이전까지는 기록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18세기 후반 남한산성 고지도첩 18세기 후반 남한산성 고지도첩
1872년 광주전도 1872년 광주전도
19세기 남한지도 19세기 남한지도
19세기 전반 남한산성도(동국여도) 19세기 전반 남한산성도(동국여도)
고려시대의 남한산성

고려 때의 한산(漢山)은 고려 태조23년 광주로 개칭되었고, 현종9년에 광주목으로 정할 때에는 별호로 회안(淮安)이라 하였는데, 남한산성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 묘지명(李世華 墓地銘)에 1231년 몽고병의 1차 침입시 광주군민들은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몽고군의 공력을 방어하였으며, 1232년 2차 침입시에도 살례탑(撒禮塔)이 이끄는 몽고군의 주력부대가 광주성을 공격해왔으나 이세화가 물리쳤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광주성은 읍치에서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로서 방어에 유리한 산성이었으며, 전략적인 필요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개수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 내 전경 1909년경 촬영 남한산성 내 전경 1909년경 촬영
남한산성 내 전경 남한산성 내 전경
조선시대의 남한산성

조선시대에 들어 전략적 거점으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부각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410년(태종 10)년부터 남한산성에 대한 수축 논의가 시작되며, 1418년(세종 1)에도 남한산성을 수축할 것을 청하는 내용이 있다. 이후 임진왜란 당시에도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서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조선초기에는 남한산성을 일장산성이라 불렀으며, 「남한산성」이란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선조 때부터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과 용인의 석성산성(石城山城)과 함께 산성으로서의 천연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고, 남도를 왕래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경도의 보장지라 하여 전략적 거점으로서의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강조되었다. 그러나 남한산성 수축론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은 인조대이다. 인조반정(1623) 이후 광해군대의 중립외교를 포기하고 친명배금으로 외교정책을 바꾸면서 후금(後金)을 자극함으로써 국방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남한산성의 규모

남한산성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지리적ㆍ공간적인 위치에 있다. 산성이 위치한 지역은 삼국시대에 패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삼국이 사력을 다해서 챙취하고자 했던 지역이다.

남한산성 규모
명칭 길이(m) 면적(㎡) 비고
원성 7,545 2,126,637 인조 2년수축, 인조 16년,
정조 3년(1779) 증개축
제1남옹성 426 2,381 인조 16년 추정
제2남옹성 318
3,583  
제3남옹성
125
839  
장경사신지옹성 159 1,447  
연주봉옹성 315
865 인조 2년(1624) 원성 수축시 축성
소계 8,888 2,135,752  
봉암성 2120 7,137 숙종 12년(1686) 신축, 숙종 31년(1705) 두개의 포루 증축
한봉성 1093
숙종 19년(1693) 신축
소계 3,213 7,137  
신남성 1돈대 134 1,381 숙종 45년(1719) 신남성 신축,
영조 29년(1753) 신남성에 두 개의
돈대 구축
신남성 2돈대 121 998
소계 255 2,379  
합계 12,356 2,145,268  
남한산성 내 전경 남한산성 내 전경
동장대 구간성곽 1909년(북문) 동장대 구간성곽 1909년(북문)

남한산성의 규모에 대해 『남한지』에는 원성의 경우 성벽 안둘레는 6290보로 17리반, 바깥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 여장은 1940타이며, 5옹성과, 16개의 암문, 125개소의 군포(軍鋪), 4개소의 장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벽의 둘레를 주척으로 환산하면 안둘레는 8,114m 이고, 바깥둘레는 9,411m 정도이다.
최근에 측정된 바에 의하면, 『성남시지』에는 8km, GIS 측정 결과는 옹성을 포함하여 10841.5747m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오차는 남한산성에 대한 정확한 측량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2000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지표조사시에 수행된 정밀측량 결과에 의하면, 여장의 옥개전 중심선을 기준으로 측량하여 계측한 수평거리의 경우 남한산성 성벽의 전체 규모는 둘레가 12,356m 이고, 폐곡선을 이루지 않는 한봉성을 제외한 성내부의 면적은 2,145,268㎡(약 648,944평)로 확인되었다. 그중 남쪽의 두 돈대를 제외할 경우 전체 둘레는 12,101m이며, 성내부의 면적은 2,206,901㎡(667,575평)이며, 외성과 옹성을 제외한 원성의 규모는 둘레가 7,545m이고 성내부의 면적은 2,126,637㎡(643,307평)이다.

남한산성의 시설물
서문부 성벽 서문부 성벽
신지 옹성부 성벽 신지 옹성부 성벽
연주봉 옹성 성벽 연주봉 옹성 성벽
남옹성부 성벽 남옹성부 성벽
성벽(城壁)

남한산성 성벽의 높이는 낮은 곳이 3m 정도이고 높은 곳은 7m 내외인데 다른 성곽에 비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성벽의 축성방법은 축성 및 개축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인조때에 축성한 원성의 경우 지반위에 잘 다듬은 장대석을 쌓고 막힌줄눈 바른층쌓기를 하였다. 성돌은 지대석의 크기가 50×30cm 정도이며, 그 위로 33×22cm, 40×20cm 43×18cm, 33×18cm, 32×20cm 50×19cm 정도의 네모서리를 정다듬질한 면석을 사용하여 쌓았으며 뒤에는 잡석으로 뒷채움을 깊게 하였다.
각 성돌의 높이는 대체로 20cm 내외임을 알 수 있으며 폭은 30~50cm 로 높이대 폭의 비율은 1 : 1.5~2.3 정도이다. 이러한 성돌의 비율은 삼국시대에서 통일기의 석축산성에 사용된 성돌의 경우 높이가 대체로 15cm 내외이고, 높이대 폭의 비율이 1 : 3.2~4.8 정도임을 감안하면, 삼국시대의 성돌에 비해 높이는 높아지고 폭은 좁아졌음이 확인된다.
이처럼 인조 4년 축성 당시 원성의 일반적인 축성기법에 비해서 숙종대에 축성된 봉암성이나 한봉성 및 신남성의 그것은 전혀 다르다.

이곳에서 보이는 축성기법을 보면 원성과 같이 수평줄눈을 맞추지 않고 쌓아 올라가는 점이 특징이다. 크기가 일정치 않은 방형 석재를 쌓고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넣는 방식이 많이 보인다. 봉암성 서벽의 경우를 보면 성돌의 크기가 65×55cm, 50×30cm, 53×29cm, 53×33cm,35×55cm, 100×65cm 등으로 성돌의 크기가 커지고 높이대 폭의 비는 1 : 0.6~1.2로 정방형에 가까워지거나 폭에 비해 오히려 높이가 높은 것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인조 때에 축성된 이후 숙종대에 이르면 축성기법에 있어서 변화가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무거운 돌을 운반할 수 있는 기구가 사용되면서 성돌이 커지고, 이에 따라 각 성돌 사이에는 틈이 없이 서로 결합하는 면이 넓어지도록 함으로써 성벽의 안정성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축성기법은 화성축성 시점에 이르러 가장 세련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여장(女墻)

여장은 체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한다. 이 여장은 다른 용어로 여담, 여첩, 치첩, 타, 여원 등이라고도 하고 고어로는 성각휘, 성가퀴, 살받이터 등으로 불려졌다. 또한 설치하는 목적에 따라 치폐, 첩담, 비예, 희장 등의 용어로도 불렸다. 여장의 종류에는 평여장과 凸형여장, 반원형여장 등으로 구분된다. 남한산성의 여장은 모두 평여장이며, 이 평여장은 타와 타 사이에 타구를 설치하고 크기가 일정한 장방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여장의 경우 체성벽에 비하여 안정성이 떨어지고 붕괴되기 쉽다. 현재 남한산성의 경우 5.3km에 달하는 범위에 대하여 보수가 이루어졌으나, 북문동쪽의 경우 여장의 중간부분정도가 유실되었으며, 남문동쪽 제3옹성에서 동문에 이르는 구간도 상당부분 여장이 붕괴된 상태이다. 봉암성과 한봉성의 경우에는 거의 전체 성벽의 여장을 찾아보기 힘들다.

연주봉 옹성 여장 연주봉 옹성 여장
신지 옹성 여장 신지 옹성 여장

남한산성의 경우 위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어, 1타의 길이는 대략 3~4.5m 정도이며 여장의 높이는 낮은 곳은 70cm, 높은 곳은 135cm 정도이다. 타와 타 사이의 타구의 폭은 30cm이고, 타구의 높이는 56cm로 대략 여장높이의 1/2 정도이다. 여장의 폭은 76cm 이고, 타와 타 사이의 간격은 15cm 정도이나 중앙부를 ∧형태로 뾰족하게 처리하여 좁지만 상대적으로 넓은 면적의 조망이 가능하므로, 방어의 효율성을 높였다. 남한산성 여장의 경우, 급경사지역의 일부지역에서는 경사면의 중간에 단을 두어 계단과 같이 축조하였으나, 대부분의 경우 단을 두지 않고 바닥의 경사면과 평행하게 여장을 설치하였다. 이 경우 여장의 높이가 전체적으로 일정하게 되어 방어의 효율성은 있지만, 여장을 쌓을 때 양력이 아래로 쏠리게 되어 상당한 어려움이 있고, 축성 이후의 안정성에도 문제가 있다. 일반적으로 여장의 경우 체성벽의 상단에 미석을 설치하고 여장을 쌓는다. 미석은 체성벽에서 3치 정도 밖으로 돌출하도록 하였는데, 체성벽 맨 윗단의 높이를 일정하게 맞추는 역할과 의장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남한산성의 경우 이러한 미석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축성시 미석을 설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여장의 경우 당초 벽돌로 축조하였으나 영조 20년(1744)에 벽돌을 제거하고 기와로 덮었으며, 정조3년에는 다시 원성을 수축하면서 기와로 덮었던 것을 치우고 별돌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여장은 대부분 전돌로 쌓은 것이며, 부분적으로 타와 타 사이의 타구에는 수키와를 한 장씩 사용하였다. 현존하는 여장을 보면 성벽의 정상부에 지대석을 놓고 그위에 20~30cm 정도의 할석으로 약 30cm 정도 허튼층 막쌓기 형태로 쌓고 그 윗부분에는 방전을 사용하여 쌓고, 내부에는 생석회 잡석다짐을 하였으며, 정상부에는 옥개전을 덮었다.
여장의 1타에는 3개의 총안이 설치되었다. 가운데에 근총안을 설치하고, 양쪽에는 원총안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총안의 간격은 대략 96cm 정도이며, 총안의 크기는 폭22cm, 높이 24cm이며, 성벽외곽의 경사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근총안의 경우 경사도가 38°, 원총안의 경우 22°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외곽의 경사도가 높은 능선지점에는 여장의 총안 외에도 체성벽의 상단부에 별도의 총안을 설치하기도 하여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포루(砲壘)

대포를 쏠 수 있는 시설을 포루라고 하며, 남한산성에서는 문헌기록과 현장조사를 통하여 포루는 모두 7개소에 설치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포루가 설치된 곳은 남옹성 1에 8개, 남옹성 2에 9개, 남옹성 3에 5개, 장경사 부근의 원성에 2개, 장경사 신지옹성에 2개, 연주봉옹성, 그리고 봉암성에 2개가 설치되었다. 이중 모두 파괴되어 현재 전혀 흔적을 확인할 수 없는 연주봉옹성의 포루를 제외하면 각 포루의 수는 28개에 달한다. 이 포루들은 대부분 신남성 방향이나 한봉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방의 산이 험준하여 적의 화포공격이 가능한 곳은 이 두 군데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 포루는 체성벽의 안쪽에 폭 130cm, 높이 150cm 정도의 공간을 구축하고 성벽쪽에는 폭 50×50cm 정도의 구멍을 내어 포신을 걸칠수 있도록 포루를 만들었으며, 좌측이나 우측벽에는 화약이나 무기들을 비치할 수 있는 작은 이방(耳房)을 구축하였다.

신지 옹성 포루(복원후) 신지 옹성 포루(복원후)
신지 옹성 포루 신지 옹성 포루
연주봉 옹성 수구 연주봉 옹성 수구
신지 옹성 여장 신지 옹성 여장
옹성(甕城)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겹의 성벽을 둘러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만 하고,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지만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옹성이라기보다는 치(雉)나 용도(甬道)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록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지지자료에 이것들을 옹성이라고 명명하고 있음을 볼 때, 옹성의 개념은 단순히 성문을 보호하는 시설이라기 보다는 체성벽의 보호를 위하여 이중으로 성벽을 구축한 시설을 의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남쪽에 3개, 동쪽과 북쪽에 각각 1개씩 설치되었다.


남쪽에 가장 많은 옹성이 설치된 것은 북쪽이나 동쪽, 서쪽에 비해 남쪽의 경사가 가장 완만하여 방어에 취약하여 검복리 방면에서 계곡의 완경사면을 따라 올라와 해발 534.7m 인 검단산 정상을 확보하거나 계곡에서 화포를 쏠 경우 산성의 방어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옹성은 모두 능선으로 연결되어 방어에 취약한 지점에 축조하였다. 치성과는 달리 모두 체성과 직접적인 연결됨이 없이 체성벽의 기저부를 옹성의 상단으로 하여 축조하였고, 암문을 통하여 연결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말단부에는 포루를 설치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이 옹성들은 연주봉옹성을 제외하고 원성축조 시에 쌓은 것이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에 적의 화포공격에 대응할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1남옹성(南甕城)은 둘레가 426m이며 옹성 끝에는 7개의 포루가 설치되어 있다. 원성(元城)과 연결되는 시축지점(始築地點)은 약간 넓게 벌어졌다가 가운데는 잘록하고 끝부분은 다시 넓어져 뭉툭하며 옹성 중간 부분에는 장대가 구축되어 있다. 2남옹성은 둘레가 318m이며 옹성 끝에 87개의 여장이 있었다. 이성은 다른 옹성과는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옹성 끝에는 포루(砲壘)가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있다. 포루는 동서남 3방향으로 3개씩 9개가 설치되어 있다.
3남옹성은 시축 부분에서 축조가 끝나는 부분의 양쪽 벽이 거의 평행이다. 둘레는 125m이고, 31개의 여담이 있었다. 끝부분에는 5개의 포루가 남쪽에 3개 동쪽과 서쪽에 각각 1개씩 설치되어 있다. 이 옹성의 포혈은 방형(方形)이 아니라, 凸자 모양으로 구축된 것이 특이하다.
다음으로 장경사신지옹성(長慶寺信地甕城)은 159m 여장이 40개였다. 옹성 끝에는 2개소의 포루가 구축되었다. 포루의 좌측 벽에는 이방(耳房)이라 불리는 무기나 화약을 저장하는 시설이 있었다.
연주봉옹성(連珠峰甕城)은 둘레는 315m에 73개의 여담이 있었다. 이 옹성에도 포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확인되지는 않는다. 암문을 통하여 성내로 출입할 수 있었으며, 옹성의 끝부분에는 원형의 석축구조물이 있다.

연주봉 옹성 포루 연주봉 옹성 포루
남옹성 포루 남옹성 포루
신지 옹성 신지 옹성
연주봉 옹성 연주봉 옹성
남옹성 남옹성
신지 옹성(복원후) 신지 옹성(복원후)
치(雉)

치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성곽 시설물중의 하나이다. 치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지는데 일반적으로 산성의 경우에는 지형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굴곡을 이루게 되어 별도의 치가 필요없는 경우가 많다.
남한산성의 경우에도 치가 거의 필요없을 정도로 성벽의 굴곡이 심하고, 특히 암문은 성벽이 능선을 따라 회절하는 곳에 인접하여 설치하였다.
원성의 경우 1남옹성과 3남옹성, 연주봉옹성 부분에는 폭 12m 길이 3m 하단부의 폭이 3m 정도 되도록 돌출시켜 치를 구축하였다. 축성기법을 보면 체성벽을 쌓으면서 동시에 축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치의 바깥쪽에는 옹성이 돌아가고 있어 이 치의 존재는 보통 간과되고 있으나 비교적 다른 옹성보다 늦게 축성되는 것으로 판단되는 장경사 옹성의 경우를 보면 체성벽에 이러한 치가 없는 것을 볼 때 원성축조 시에는 연주봉옹성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치만 설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원성에 설치된 4개의 치 외에 봉암성에서 한봉성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평탄지역에도 치가 설치되어 동쪽의 완경사면과, 한봉성의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은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봉암성 치는 곡성을 이루듯이 자연스런 굴곡을 이루는 성벽에서 장방형으로 돌출시켜 쌓았다. 길이는 11.5m 이고 폭은 10m 이며, 체성벽의 높이는 320cm 정도이다. 모서리부분의 결구상태로 보아 이 치성은 봉암성의 축조시에 함께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연주봉 옹성부 치 연주봉 옹성부 치
연주봉 치 여장 연주봉 치 여장
성문(城門)

남한산성의 성문은 각 방향으로 하나씩 모두 4개가 있으며, 각각 고유의 이름이 있어 남문은 지화문(至和門)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북문은 전승문(全勝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이라 하였다. 문루의 이름은 정조 3년(1779년)에 원성을 개축할 때 지은 것으로 모두 홍예문이며, 문루가 구축되어 있다.
남문은 성곽의 서남쪽에 위치한 출입문으로 4대문 중 유일하게 문루에 현판이 걸려 있으며, 정조 2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이라 칭하였다. 수축 당시 이회가 세웠다는 이 문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성안으로 들어온 문이며, 강화도로 가기 위하여 문을 나섰다가 추위로 인해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다시 들어온 곳이기도 하다. 현재 홍예문을 비롯하여 문루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판목으로 만들어 철린을 입힌 성문에는 총구멍도 남아 있다. 대남문의 폭은 335cm이며 높이는 475cm인데 홍예기석위에 17개의 홍예석을 올려 반원형의 홍예문을 구축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에 용머리 망와로 마감하였으나 내림마루에는 망새 대신 용두를 장식하였다. 천저양식은 연등천정이고, 높이 110cm 의 장초석에 올려놓은 기둥은 주심포식에 초익공의 포를 갖추었으며, 굴도리 가구이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관광객을 비롯한 일반인들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남한산성 동문 남한산성 동문
연주봉 옹성 암문 연주봉 옹성 암문

동문은 성곽의 동쪽에 위치한 출입문으로 광지원으로 향한다. 이 성문은 본성 축조 당시 축조된 성문으로 정조 2년(1778) 성곽을 개보수 할 때 성문을 보수하고 좌익문(左翼門)이라 칭하였다. 성문은 홍예식이며 폭은 310cm, 높이는 400cm이다. 홍예는 9개의 홍예돌을 쌓아서 구축하였으며, 홍예 안쪽에는 두께 12cm의 목제 판문(板門)을 달고 겉에는 가로 31cm, 세로 16cm 의 철린(鐵鱗)을 붙여 보강하였다. 문 뒷면에는 빗장을 지를 수 있도록 가로 40cm, 세로 22cm의 장방형 홈을 파서 장군목을 걸칠 수 있도록 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 양식으로 용머리는 망와로 마감하고 문루의 천장은 연등(삿갓)천정을 하였다. 기둥양식은 주심포양식의 민흘림 기둥이며 그 위에는 굴도리 가구(架構)를 둘렀다. 다른 문에 비해 가장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성문은 지면에서 높여 계단을 구축하였는데 동문의 서쪽 성곽은 1973년 남한산성-광지원간 8m도로 확장공사로 성벽이 잘리어져 있다.

한편 동문 남서쪽 60m 지점에는 성내의 주 배수구였던 수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편으로 물길을 우회시켜 배수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북문은 성곽의 북쪽의 해발 367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하상사창리로 이어진다. 조선시대에 수운을 통하여 걷어들인 세곡을 등짐으로 운반하여 이 문을 통해 산성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조2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전승문(全勝門)이라 칭하였다. 북문은 홍예식으로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예돌로 구축하였다. 문의 폭은 325cm이며, 높이는 365cm이다. 홍예 안쪽에는 판문을 설치하였으며 철린을 박아 보강하였다.문루는 정면 4칸 측면2칸의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용머리는 치미를 장식하였고 내림마루에도 용두로 장식하였다. 천장양식은 연등천정이며 기둥양식은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 기둥이다. 다른 3문은 모두 개방하였으나 현재 북문은 개방하지 않고 있다. 서문은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에서 서쪽 사면의 경사가 급해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을 처음 축성할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1799)에 개축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개구부는 내외면이 반원형의 홍예식이다. 외면은 높이 210cm이고 폭은 146cm이다. 바닥에는 지대석을 깔고 양쪽에 50×40×130cm 의 장방형 홍예기석(虹霓基石) 한매를 놓고 그 위에 5매의 홍예석을 올려놓았다. 외면 홍예 안쪽에는 2짝의 목재 판문(板門)을 설치하였다. 판문의 문짝의 크기는 85×210cm이며, 표면에는 20×33cm 크기의 방형 철엽을 4cm 정도 겹치도록 부착하였다. 대문을 지탱하는 문지두리는 석재로 위, 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 있고, 양측벽에는 장군목을 끼워 빚장을 지를 수 있는 홈은 40×20×35cm의 장방형 홈을 파놓았다. 대문안쪽의 천장부는 회반죽으로 마감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 표면이 박락되어 전돌이 일부 노출되어 있다. 안쪽의 홍예는 높이 227cm, 폭 210cm 이며, 측벽부는 114×103cm 정도의 장대석으로 두단을 쌓았으며 높이 170cm 이상부터는 전으로 쌓았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이다. 문루의 처마는 겹처마를 두르고 누대의 용마루는 치미를 올려 장식하였으며, 루의 천장양식은 연등천정에 일부에 우물천정을 병용시키고, 있다. 기둥양식은 주심포(柱心包)에 2출목익공식 포를 장식하였다.

봉암산 암문 내부 봉암산 암문 내부
봉암산 암문 외부 봉암산 암문 외부
신지 옹성 암문 신지 옹성 암문
암문(暗門)

남한산성은 현재 남아 있는 암문이 모두 16개로서 우리나라의 성 중에서 암문이 가장 많은 성에 속한다. 그중 원성에 11개가 있고,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남아있다.
조성 형식으로 보면 6개는 평거식(平据式)이고, 나머지 10개는 홍예식(虹霓式)이다. 평거식 중 3개는 봉암성에 설치되고 1개는 한봉성에 설치되었으며, 원성에 설치된 암문은 장경사 옹성으로 나가는 곳에 설치된 2암문과 수어장 대 서남쪽에 있는 제6암문의 2개만 평거식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예식이다. 암문의 규모는 기능과 위치에 따라 매우 다르게 한 점도 특징적이다.

수구문(水口門)

남한산성은 해발 370m 이상, 400m 정도의 산능선을 따라 축성되어 있고, 분지형태의 성내부는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에 가깝다. 산성내에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였다. 성내에는 크게 네 개의 개울이 있었는데 국청사, 천주사, 개원사, 옥정사 부근의 계곡에서 각각 흘러내린 물이 지수당 부근에서 합류되어 동벽에 구축된 수구문을 통하여 성밖으로 흐른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이 개울물로 물레방아 8개를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였다고 한다.
수구문은 동문에서 서남쪽 70m 지점의 해발 300m 지점에 위치한다. 수구문은 110×50×157cm 정도의 대형 암괴를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양측 벽에 2단, 또는 3단으로 쌓았으며, 강회몰탈을 빈공간에 채워넣었다. 천장은 180×80×115cm 정도의 대형 암괴 4매를 덮어서 구축하였다. 수구의 폭은 188cm 이고 높이는 205cm 로서 산성내의 일반적인 암문의 크기보다 더 크다. 수구문의 바닥에 깔린 돌에는 폭 23cm 정도 간격으로 직경9-12cm, 길치 6-9cm 정도의 구멍이 파여 있고, 천장석에도 직경 7cm, 깊이 9cm 정도의 홈이 파여 있는데, 철심이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수구문을 통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쇠창살을 가로질러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군포

군포는 군인들의 초소로서 『중정남한지』에 의하면, 산성내에는 125개소가 건립되어 있었는데 매 군포는 2-3칸 정도의 규모였으며, 군포 좌우측에는 소금이나 숯 등을 묻어두었다. 이처럼 숯과 소금을 묻어둔 것은 유사시에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전쟁에 대비하여 비축해 놓은 것인데, 『중정남한지』에는 산성내에 숯가마니를 묻은 곳이 94개소에 24,192 가마니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성내에서 군포가 남아있는 것은 한군데도 없지만, 서벽 안쪽의 평탄하고 와편이 많이 발견되는 대부분의 지역에 군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군포지 군포지
수어장대 수어장대
장대(將臺)

장대는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처소를 말한다. 장대는 성내의 지형중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 성이 넓어 한곳의 장대에서 지휘를 할 수 없는 경우 각 방면에다 장대를 마련하였다. 장대는 전투시에는 지휘소인 반면 평상시에는 성의 관리와 행정기능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성의 장대는 규모가 크지 않은 단층형식이 대부분이나 남한산성이나 수원 화성의 경우처럼 중층누각형태의 장대도 있다.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 각 방면에 각각 하나씩 4개의 장대와 봉암성에 외동장대를 설치하여 5개의 장대가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말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는 영남대박물관소장의 「남한산성도」를 보면 당시에 동장대와 북장대, 서장대, 남장대에 각각 단층누각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외동장대는 누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각 장대의 위치만 표기되어 있을뿐 누각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5장대의 누각이 모두 붕괴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1751년(영조 27) 부윤 이기진이 서장대에 무망루(無忘樓)를 건립하고, 1788년(정조 12) 부윤 이태영이 남장대에 타운루(唾雲樓)를 건립하였다는 『남한지』의 기록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세기 초중기에 제작된 지도라고 생각되는 정신문화연구원 소장의 「남한산성도」에 보면 서장대와 남장대만이 이층 누각형태의 건물이 있었을뿐, 북장대와 동장대, 그리고 외동장대는 터만 남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1872년에 제작된 규장각 소장의 「광주부도」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남한산성에 구축된 5장대중 동장대를 제외한 4장대는 17세기 말엽까지는 단층 누각건물의 형태로 남아있었으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5장대 모두 붕괴되어 터만 남아있게 되었다. 18세기 중후반에는 서장대와 남장대가 2층 누각형태로 건립되어 19세기 후반까지 남아 있었으며, 그중 서장대인 수어장대만이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당으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현존한다. 원래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라 부르던 것을 1751년(영조 27)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고 안쪽에는 무망루(無忘樓), 바깥쪽에는 '수어장대(守禦將臺)'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며, 서대라고도 불렀다. 이곳은 이천부사가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우부별장이 되어 지킨 곳이다. 주말이면 수만의 인파가 몰리고 남한산성을 대표하는 문화 유산이다.
남장대는 남한산성 남쪽 제2옹성의 바로 안쪽에 있었던 장대로 주변 지형을 보더라도 장대가 위치할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후영장(後營將)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곳이다.장대 위에는 1788년 부윤 이태영이 세운 타운루(唾雲樓)가 있었으나, 지금은 둥글게 잘 다듬어진 21개의 주춧돌만 남아있다. 주춧돌은 높이 31cm 내외의 원형 고주초석으로 직경은 50cm 정도이고, 남-북향으로 놓여져 있으며, 한 변의 길이가 880cm인 정방형 건물이다. 성 내부로 향하는 건물 터 뒤쪽에는 장대를 지을 때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 석축이 남아 있다.
장대가 있는 이 지역은 성곽을 크게 돌출시켜 장대 앞의 면적을 넓히는 한편 수성의 효과를 크게 하였다. 특히 돌출된 성곽의 끝으로는 옹성을 설치하여 그 끝에는 포혈을 설치하여 수비하도록 하였다. 동쪽 내성의 가장 높은 곳, 즉 한봉외성으로 나가는 암문의 우측 언덕에 있는 건물 터로 해발 498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동서 21m, 남북 17m 정도 규모의 평탄지가 있으며 중앙에는 4개의 초석이 남아 있다. 장대의 외곽에는 높이 350cm 정도의 석축이 쌓여 있다.
수어청의 5영 중 전영장(前營將)과 좌영장(左營將)이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건물 지에는 와편과 잡석이 흩어져 있으며 주변에 비교적 높이 쌓은 석축이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곳은 숙종 때 외성이 확장되면서 외동장대와 함께 성곽의 동쪽에서 가장 높아 성곽 북쪽과 동쪽을 한눈에 감지 할 수 있는 곳이다.


성곽의 북쪽에 위치하며 연주봉과 성내를 연결하는 암문의 우측에 있었다. 수어청에 소속된 5영 중 중영장(中營將)에 배치되어 진을 치고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산성에 있었던 4장대 중 그 규모를 확실히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훼손이 심한 편이다. 규모를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주변의 잡석들 속에는 기단석과 파편 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외동장대는 봉암성의 벌봉 가기 전의 해발 498m 지점에 있다. 지상에 초석은 노출되지 않은 상태이고, 약2m 정도의 축대만 무너진 채 남아있다. 외동장대는 후영장인 죽산부사가 군사 2,608명을 편성하여 지킨 곳이다.

남한행궁
상궐 재덕당(복원후) 상궐 재덕당(복원후)
행궁(行宮)

행궁이란 정궁(正宮)에 대비되는 용어로서 임금이 궁궐을 벗어나 거둥(行幸))할 때 머무는 별궁(別宮) 또는 이궁(‘離宮), 임시궁궐(臨時 宮闕)을 말한다.
그 조성 목적은 왕이 능행(陵幸)을 목적(화성행궁)으로 혹은 전란(戰亂)에 대비(남한행궁, 북한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월미행궁, 격포행궁 등)하여 조성하거나 휴양(休養) 공간(온양행궁, 초수행궁, 이천행궁 등) 혹은 왕이 궁궐을 벗어나 거둥하면서 중간 휴식지(休息地)로 이용(肆覲坪行宮) 하는 것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행궁은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 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되어 왔다. 행궁을 만들어 이용한 기록은 백제 때부터 나타나는데, 삼국사기 백제 본기 진사왕(辰斯王) 8년에 왕이 구원행궁(狗原行宮))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행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高麗史) 에서 40건의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행궁은 전 시기에 걸쳐서 조성되었는데 행궁의 이용 시기는 전기보다는 이괄의 난 등 국내 반란과 정묘호란ㆍ병자호란ㆍ임진왜란 이후의 군사적인 목적의 증대로 인하여 중 후기에 더 많이 조성되고 이용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조성된 행궁은 풍양궁(豊壤宮)과 온양행궁, 초수행궁, 이천행궁 등이 해당한다. 임진왜란 이후 인조에서 숙종대까지는 남한행궁, 북한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격포행궁, 월미행궁이며, 경종대 이후는 정조대(1776~1800)가 화성행궁과 노량행궁(용양봉저정), 시흥행궁, 과천행궁, 사근참행궁, 안양행궁, 안산행궁 등을 조성하는 등 행궁을 활발히 조성한 시기였다.



남한산성의 경영은 1624년(인조 2)에 산성을 개축하고 광주읍치를 광주군 서부면에서 성내로 옮기면서 한층 중요도를 더해 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남한산성은 성곽 그 자체의 부대시설은 물론 관읍으로서의 시설도 함께 갖추게 되었고, 성내에 행궁(行宮)이 설치되면서 많은 수의 새로운 건조물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남한행궁의 조성과 이용

남한산성은 1624년(인조 2) 7월에 쌓기 시작하여 1626년(인조 4) 11월에 완성되었다. 「광주행궁(廣州行宮)」 또는 「남한산성행궁(南漢山城行宮)」이라고 불리는 「남한행궁(南漢行宮)」의 건립 연대는 『중정 남한지』와 『광주부읍지』에는 1624년(인조 2)에 건립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산성의 수축 시점을 말한 것이며, 행궁은 수축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건립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궐 좌승당(복원후) 상궐 좌승당(복원후)

성역 수축이 시작된 후인 1625년 6월 이후에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에 완성하였다는 『인조실록』3년 6월 23일 기사가 보다 정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행궁은 산성이 축성중인 1625년(인조 3) 6월 이서의 계책에 따라 조성하였다는 것으로 축성을 시작한 후 축성의 책임자인 이서가 행궁의 조성을 건의함으로써 행궁 공사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궁의 건립이 이서의 건의에 의해서 갑자기 시작된 것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왜냐하면 산성 수축공사 중에 행궁건립이 착수되었고, 산성의 수축이 완료된 시점에 완공된 점, 그리고 중요한 국가의 중요 보장처로서 산성을 수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행궁의 설치는 이미 계획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또한 산성과 행궁이 완성된 후인 1626년 11월 광주부(廣州府)의 읍치(邑治)를 산성 안으로 옮김으로써 행궁은 광주부의 치소(治所)를 겸하게 되는 사실로서도 행궁의 조성이 전반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에 의하였음을 추측하게 한다.
남한행궁의 주요한 조성 목적은 국내의 환란이나 대외적인 침략에 대비하여 비상시에 군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행궁 조성 직후 광주부 읍치를 겸하도록 한것 또한 남한행궁의 정치ㆍ군사적 중요성의 발로였다.
따라서 왕이 남한행궁을 이용하고자 한 경우는 군사적 목적을 띨 때이다. 이러한 본래의 조성목적에 의한 남한행궁의 이용은 조성 후 10년이 지난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의 발발에 따른 것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루어졌다.
인조 때의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부 읍치로서의 기능이 점차 강화되며, 왕이 행궁을 이용한 경우는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여주의 영릉(英陵)이나 영릉(寧陵), 광주의 헌릉(獻陵)이나 인릉(仁陵) 등의 능행길을 오가는데 머물러 이용했을 뿐이다. 즉 왕이 이용한 것은 6회뿐이었지만, 이것은 여타 행궁에 비하여 많은 사용 횟수에 속한다.
머무르는 중에는 서장대(西將臺; 수어장대)에서 성조(城操)를 행하고 성을 순시하였으며, 군사지휘소인 연병관(鍊兵館)을 찾아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호궤하는 등 남한산성과 행궁의 군사적인 기능이 중차대함을 지속적으로 표현하지만 전반적으로 행정적 기능이 강화되어 나간다.

인화관

치제내용
① 온조왕, 崇恩殿(元宗의 영정을 모셔 놓은 전각)
② 명선ㆍ명혜ㆍ명안ㆍ숙정공주, 영창대군, 김만기, 민유중, 이서, 雙嶺, 險川 / 신성립, 지여해, 서흔남, 민영, 허완의 자손 수용, 병자호란 당시 官隷 생존자에게 음식물
하사
③ 쌍령 / 오달제 復戶
④ 온조왕묘, 현절사, 영창대군, 명혜ㆍ명선ㆍ숙정ㆍ숙경ㆍ명안공주, 김창집, 이서,
민진원, 험천, 북문, 쌍령, 왕십리
⑤ 병자년 전사자, 온왕묘, 현절사, 민진원, 김만기 / 현절사 사손 調用
⑥ 양녕ㆍ효령ㆍ평원ㆍ제안ㆍ광평ㆍ능창대군, 의원ㆍ희녕ㆍ밀성군, 명혜ㆍ명선공주,
청연군주, 온조왕묘, 현절사, 상진, 민진원, 정유길, 정태화, 병자ㆍ정묘년 군사

상궐 상궐
역대왕의 남한행궁 이용
활동내용 시기 군사
훈련
성 순시
치제 군사
호궤
과거 세금감면 노인
특혜
비고
인조 14년-15년
(1636-37)
5회
6회

병자호란시 피난처

숙종 14년
(1688)
서장대

경감

음식물

현절사 조성 지시

영조 6년
(1730)
서장대

연병관
정조 3년
((1799)
서장대
(성조)
서성→남성→
남문루→북성
→북문루
연병관

배종록, 誌 편찬지시

철종 13년
(1862)
인화관

쌀, 결전면제

고종 4년
(1867)
연무관
(야조)
인화관

상궐지 상궐지
하궐 및 문지 하궐 및 문지
남한행궁 관련 건축물의 조성과 기능 및 규모

궁궐(宮闕) 건축은 삼문삼조(三門三朝)를 갖추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남향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행궁은 정궁(正宮)에 비해 격이 낮기 때문에 구성 배치에서 궁궐의 기본적인 요소는 갖추되 다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즉 행궁의 구성 및 배치는 정궁의 기본적인 요소는 갖추되 목적이나 지형 또는 용도에 따라 다소 자유로울 수 있다. 따라서 행궁은 크게 왕이 머무르는 침전 구역과 정무를 보는 편전 구역의 두 구역으로 구성되지만 각 행궁별로 목적에 맞는 독특한 특성(온양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월미행궁 등)을 갖기도 한다. 일반적인 행궁은 궁궐이 갖는 삼조(三朝)와 전조후침(前朝後寢)의 배치원리를 적용한 형태로서 외조(外朝)에 해당하는 진입부, 치조(治朝)에 해당하는 정전(正殿)부분, 연조(燕朝)에 해당하는 침전(寢殿) 부분의 세 영역으로 구성된다.

남한산성 행궁의 기본적인 구조는 상궐(上闕) 하궐(下闕), 그리고 한남루(漢南樓)라는 외삼문의 누문을 갖춘 구조로서 이들을 둘러싸고 연결된 행각을 갖추고 있다. 전체적인 배치는 상부로부터 내전(內殿)과 외전(外殿), 그리고 문지를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완만한 경사면을 이용하여 3단의 층단식(層段式)으로 둠으로써 안으로 들어갈수록 단을 높이는 방식이며, 좌향을 동남향을 취함으로써 기본적으로는 궁실건축의 형태를 따르고자 하였다. 여기에 숙종때 左殿과 右室을 조성하면서 행궁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도성 배치원리인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을 적용하였다. 즉 행궁을 도성의 정궁으로 보고 종묘봉안처(宗廟奉安處)인 좌전(左殿)을 행궁의 왼쪽에, 시직봉안처(社稷奉安處)인 우실(右室)은 행궁의 오른쪽에 두었던 것이다.
이외에 광주부 읍치로서의 성격을 보여주는 공해(公 )로서 좌승당(坐勝堂) 일장각(日長閣)이 있고, 기타 재덕당(在德堂)ㆍ유차산루(有此山樓) 이위정(以威亭) 이명정(以明亭) 완대정(緩帶亭) 우희정(又喜亭) 옥천정(玉泉亭) 등이 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행궁이 조성된 인조대부터 순조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되었는데, 후대로 갈수록 행궁 본래의 기능보다는 광주부 치소로서의 행정적인 기능이 강화된다. 이러한 특징은 순조대의 공해 건물로서 좌승당과 일장각이 조성되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남한행궁 주요 건축물의 조성연대 및 용도
건립연도 명칭 용도 남한지에 의한 분류 건립자 지역 비고
1624년(인조 2) 상궐 침전 행궁 총융사 이 서 상궐 발굴
하궐 정당 행궁 총융사 이 서 하궐 시굴
1688년(숙종 14) 재덕당 제사공간 행궁
부 윤 이세백 상궐 발굴
1711년(숙종 37) 좌전 종묘 봉안처 종묘 부 윤 김치룡 기타 발굴

우실 사직봉안처 사직 부 윤 김치룡 기타 지표
1798년(정조 22) 한남루 문지 행궁 유 수 홍 억 하궐 시굴
1805년(순조 5) 완대정 누정 누정 유 수 이만수
기타
1813년(순조13) 우희정
누정
누정
유 수 이계원
기타
1817년(순조 17) 좌승당
공해
공해
유 수 심상규
상궐
발굴
행궁
유차산루
누정
누정
유 수 심상규
상궐 발굴
총융사 이 서
이위정
누정
누정
유 수 심상규
기타 발굴
상궐 이명정 누정 누정 유 수 심상규 기타 발굴
발굴 옥천정
누정
누정
유 수 심상규
기타
1829년(순조 29) 일장각 공해 공해 유 수 이지연 하궐 경감
하궐 하궐
행궁 복원현황 행궁 복원현황

남한행궁의 규모는 행궁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남한지(南漢志)』ㆍ『여지도서(輿地圖書)』ㆍ시기별 『광주부읍지(廣州府邑誌)』 등 문헌마다 명칭이 다른 경우가 많고 규모 또한 일정치 않다. 따라서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상궐이 70여칸 내외임은 명백한 듯 하며, 이 상궐의 개념은 남한지에서 말하는 상궐이 곧 내행전이 아니라 상궐지역에 조성된 내행전 28칸, 남행각 15칸(퇴칸은 반칸으로 계산), 북행각 8칸, 재덕당 7칸 반, 좌승당 14칸을 합하여 광주부읍지에서 기록한 72.5칸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하궐 154칸과 기타 좌전 26칸, 우실 4.5칸, 인화관 68칸 등을 합하여 모두 325칸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1794~1796년(정조20)에 조성된 화성행궁(576칸)과 더불어 이 시기에 조성된 것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이렇듯 규모가 확대된 것은 행궁이 광주부의 치소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관련 건물이 조성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남한산성 이야기
벌바위 벌바위
남한산성과 병자호란

1627년에 발생한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後金)과 조선이 형제의 나라로서 상호 평화를 유지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이후 후금은 조선이 응하기 어려울 정도의 세폐(歲弊) 요구와 명나라 공격을 위한 군량 납부, 군신지의'(君臣之義)로의 관계 변경 등을 꾀하면서 조선의 반발과 대항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에 후금은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사죄할 것을 요구하였다. 병자호란은 조선이 이러한 청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일어난 전쟁으로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1637년(인조15) 1월 29일까지의 전란이었다.
청태종은 조선을 침공하기 직전에 국호를 개칭하고, 태종은 1636년 12월에 직접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고,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넌 후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굳게 방비하고 있던 백마산성(白馬山城)을 피하여 쾌속으로 한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청군선발대는 14일 이미 개성을 통과하였다.

정세가 이렇게 급박하게 전개되자, 조정에서는 파천(播遷)하기로 하여 종묘사직과 원손(元孫), 봉림대군(뒤의 효종), 인평대군 등을 강도(江都:강화도)로 향하게 하였다. 인조도 이 날 밤 강화도로 피신하려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청군 선발대가 이미 지금의 서울시 불광동 일대인 양철평(良鐵坪)을 통과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강화도로의 피신을 포기하고 수구문(水口門)으로 나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신하들 간에 강도로 옮겨갈 것을 권하는 청이 있었는데, 특히 김류는 “고립된 성에 계시면 외부의 구원도 없게 되고 마초와 양식도 부족할 것입니다. 강도는 우리에게 유리하고 저들에게 침범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또 적은 뜻이 상국(上國)에 있으나, 반드시 우리를 상대로 지구전(持久戰)을 벌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강도로 가시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라 청하였다. 결국 경기(輕騎)로 금천과 과천의 들을 가로질러 가기로 결정하고, 12월 15일(乙酉) 새벽에 산성을 출발하여 강도로 향하였으나 이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 길이 얼어붙고 미끄러워 성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결국 인조는 당시 성안에 있던 1만 3천여 명의 병사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고, 조정에서는 팔도에 교서를 내려 관찰사와 도원수ㆍ부원수 및 각도의 감사ㆍ병사들로 하여금 근왕병을 모으도록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게 되었다. 당시 성안에는 양곡 1만 4천 3백석과 소금 90여 석이 있어 겨우 50일 분의 식량만이 비축되어 있었을 뿐이다. 산성으로의 피난이 워낙 급박하게 이루어져 미쳐 식량을 운반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이에 청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12월 16일에 선봉이 남한산성에 당도하였고, 산성 밑 탄천에 포진하였다. 조선군은 포위된 상태에서 몇차례에 걸쳐 별동대를 성밖을 보내어 적병과 교전, 수십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출병한 구원병들이 모두 남한산성에 도착하기 전에 궤멸되거나 흩어졌고 의병들 마져 별 도움이 되지 않아 거의 무기력하게 되었고, 명나라의 원병도 중간에 풍랑으로 인하여 되돌아가게 되었다. 이로써 남한산성은 고립무원의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다.이렇게 되자 성안의 조선 조정에서는 점차 강화론이 제기되었고, 주화파(主和派)와 주전파(主戰派) 간에는 여러 차례의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대세는 강화쪽으로 기울게 되었고, 강화교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 당하면서 피신해 있던 왕자와 군신들의 처자 200여 명이 청군에 포로로 잡혀 남한산성으로 호송되고 있었다.
1월 23일 청군은 남한산성에 대한 총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여 사상자는 늘어났고, 25일에는 청군의 화포 공격으로 성벽 일부가 무너졌다. 1월 26일 저녁 조선의 사신이 청 진영에 도착하자 청의 장수는 포로가 된 왕자를 불러와 대면을 시켰고 강화도 함락 사실을 확인 한 조정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상실하게 되었다.


당시 성내의 분위기를 『중정남한지』를 통하여 보면, 사방을 청나라 군사가 철통같이 에워 싼 고성(孤城) 안에서 추위에 떨고 굶주리며 근왕병이나 구원병을 기다렸을 성안 정황이 얼마나 처절하고 비통하며 참담했는지를 보여준다.
「1636년 12월 24일 새벽에 망궐례가 있었다. 왕은 도성을 바라보고 望拜하였다. 때마침 눈비가 많이 내려서 성첩 지키는 군졸들이 푹 젖었다.

침과정 침과정

왕이 말하기를 “凍雪이 이 같으니 軍民이 다 죽겠구나” 하자 이경증이 중신을 시켜 날이 개기를 빌게 하자고 여쭈니 왕이 “내가 친히 露天에서 빌리라”하고 세자를 데리고 행궁뜰에서 露禱하였다. 먼저 분향 4배하고 죄인처럼 거적을 깔고 축원하되 “이 외로운 성에 들어와 믿는 것이란 하늘 뿐이온데 눈비가 이 같으니 형세가 얼어죽을 것만 같소이다. 제 한 몸은 아까울 것이 없사오나 百官萬姓이 무슨 죄이오리까. 바라건대 잠깐 개이게 하사 우리 군민을 살리소서” 인하여(왕이) 땅에 엎디어 우시기를 한동안 어의(임금의 옷)가 젖어서 근시가 일어나기를 청하나 듣지 않고, 대신들이 옷을 당기며 울고 여쭈니 얼마 만에야 일어나 4배하고 물러나는데, 얼굴에는 눈물이 턱에까지 엉기어 흐르고 있었다....」
「청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왔다. 이날 바람이 크게 불고 날씨가 몹시 추웠다. 광진(광나루)과 삼전도, 헌능 세 길에 적병이 꽉 차서 마침 큰 눈이 왔건만 들판에 한 조각 흰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 군사들은 산 위에서 바라보고 다시 싸울 뜻이 없었는데, 행궁 남쪽 나무 위에 까치가 날아와 둥지를 틀어서 사람들은 이것이 길조라 이르고, 성중에 믿는 것이라고는 이것 하나뿐이었다.」
「왕의 이부자리는 가져오다가 노상에서 모두 빼앗기고, 의창군이 산양의 가죽으로 만든 이불 한 채를 드렸더니 지난번 눈비 내리고 춥던 날 쪼개어 성 지키는 장사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왕은 이날 밤부터 옷을 끄르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다. 또 수라에도 닭다리 하나씩을 올리게 되어 있는데, 왕이 말하기를 “성에 들어왔을 적에는 그래도 새벽에 닭 우는 소리를 듣겠더니, 지금은 닭소리를 들을래야 들을 수 없다. 이는 나에게 올리느라고 그런 모양인데 이제부터는 그러지 말라”하였다.」
「1637년(인조15) 1월 24일 적이 또 대포 10여대를 남격대 밖에다 설치하였는데, 포호존(砲虎尊)라고도 하고 홍이포(紅夷砲)라고도 한다. 탄환이 큰 것은 사발 만하고, 작은 것도 거위알 만하다. 능히 수십 리를 날 수 있으며, 매양 행궁을 향해 쏘기를 그치지 않았다. 사창에 떨어진 것은 기와집을 세 겹이나 꿰뚫어 땅속으로 한 자 남짓이나 들어 박혔고....」

조정은 거의 10배에 달하는 청군의 공격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식량의 고갈, 그리고 왕자가 포로가 되는 등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항복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1월 30일 인조가 성을 나아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굴욕적 의식을 행했다.
병자호란의 패배는 조선왕조로서는 일찍이 당해보지 못한 치욕이며, 패전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먼저 조선과 청의 병력 차이를 들 수 있다. 당시 성안의 조선군은 1만 2천명 정도였으나, 청군은 이의 10배에 달하였다. 아울러 군사의 숙련도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었다. 청군이 전투에 익숙해 있었던 반면 조선군대는 그렇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정에서 청의 공세에 대응하여, 전국의 병력을 미리 집결시키고 적절한 작전을 펼쳤다면 전세는 다른 양상을 띠었을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을 빠져나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을 한 것은 남한산성이 함락 당해서가 아니라 구원병이 궤멸되고, 식량이 떨어진 상태에서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자가 포로가 된 상태에서 더 이상 저항하기가 어려운 상태에 몰렸기에 때문이다. 그리고 청의 군대에 비해 전반적인 열세 속에서도 남한산성과 같은 보장지(保障地)가 있었기에, 왕실이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출성(出城)하여 항복했다는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 남한산성을 굴욕과 치욕의 장으로 인식하는 것은 편협한 역사인식의 결과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더욱이 병자호란 당시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청에 끌려가 죽음을 당한 오달제, 윤집, 홍익한 등 삼학사의 영혼을 모신 현절사가 1688년 이곳 남한산성에 세워지면서 남한산성은 도리어 항청(抗淸) 의식의 정신적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남한산성 관련 일화

청량당(淸凉堂) : 이회의 억울함을 달래라

청량당은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715-1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단묘(壇廟)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안의 청량산 꼭대기에 위치한 서장대(수어장대)의 서편 담 밖에 있는 사당이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의 동남쪽 축성책임자였던 이회(李晦)가 모함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수어장대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는데, 뒤에 그를 처형한 이서가 그의 억울함을 알고 그 혼백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곳에 건립한 것이다.
인조2년(1624) 남한산성 수축 당시 서북성은 8도 도총섭으로 승군을 지휘한 벽암대사 김각성이 맡았고, 동남성은 총책임자인 이서의 부장 이회가 맡아서 쌓았다. 그러나 서북성은 기일내에 축성이 완료되었으나 이회가 맡은 구역은 성이 완성되지 못하였고 “이회는 축성경비를 주색잡기에 탕진하였다”는 등의 모함이 있었다. 이에 따라 이회는 군령에 의하여 서장대에서 즉결처분으로 참수되었다. 이때 이회의 처 송씨는 남편을 돕기위해 삼남지방으로 축성금을 구하러 갔다가 쌀을 싣고 한강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숭열전 숭열전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은 통곡하다가 한강 물에 투신 자살하였다고 한다.
이회를 처형한 후 그가 쌓은 성벽을 조사해 보니 성이 견고하고 충실하게 축조되었으며, 다만 산세가 워낙 험하므로 성벽 기초공사 등으로 기일이 지연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기에 당우(堂宇)를 세우고 그의 영혼을 위로한 것이라고 한다.
전설에는 형장에 선 이회가 말하기를 “내가 죽는 순간 한 마리의 매가 날아 올 것이니, 매가 오지 않으면 내 죄는 죽어 마땅하되 매가 날아오면 내가 무죄인줄 알라”하였다. 과연 그가 처형되는 순간 유언대로 매 한 마리가 날아와서 바위에 앉아 이회의 죽음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당시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 또는 응암이라 하는데 높이 3.7, 폭 5.8m 크기로 ‘수어서대(守禦西臺)’라고 새겨진 글과 함께 수어장대 모퉁이에 서 있다.
이 매바위에 대하여는 또다른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것은 이회의 목을 베었을 때 목에서 매가 나왔다는 이야기와 매가 앉았던 발자국이 일제시대까지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바위에는 여러 홈이 파여져 있는데, 일본인들이 패망 후 물러가면서 매 발자국을 파간 흔적이라는 것이다.
청량당에는 이회의 영정과 더불어 부인 송씨와 후실 유씨, 그리고 남한산성 수축당시 8도 도총섭으로서 서북성을 쌓았던 벽암대사 각성의 영정도 모셔져 있다. 현재의 영정은 6.25 때 없어진 것을 다시 봉안한 것이다. 청량당에 벽암대사를 함께 모시는 까닭은, 그가 이회와 함께 남한산성을 나누어 축조하였고, 또 병자호란이 발발하였을 때는 승군을 이끌고 용전분투 하였으며, 결국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성하의 맹세’를 맺은 것을 보고 표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므로 이를 애석하게 여기고 청량당에 그 영정을 봉안한 것이라 한다.
이곳은 예전에는 매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이면 인근의 만신들이 며칠 전부터 목욕재계한 후 이곳에서 정성껏 치성을 올렸다고 한다. 그것은 충성스럽고 정직한 이회와 그 부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것으로서 정월 초이튿날은 부인 송씨가 한강의 쌀섬여울에서 투신한 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청량당이라는 명칭은 청량이라는 산명을 당집이름으로 부른 것이며 ‘청량’은 ‘맑고 서늘한 기운’을 뜻한다. 또다른 명칭으로는 청계당과 매당 또는 응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청계당이라 부르는 것은 벽암대사 김각성 스님도 함께 모시고 있기 때문이며, 매당 또는 응당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수어장대에 있는 매바위 전설로 인하여 청량당에 모신 이회의 혼령을 매당왕신 혹은 응당왕신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현재 사당은 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당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건물의 가구는 굴도리식이며 주심포양식의 기둥을 하고 있다. 본당의 중앙에는 4쪽 여닫이 격자문을 달고 좌우측칸에는 높이 175cm에 정면과 측면에 창문을 각각 내었다.
청량당 대문은 정면3칸, 측면1칸의 홑처마를 두른 맛배지붕 건물인데 좌우측의 칸은 각각 격자문을 달아 방으로 꾸몄고, 출입문 중앙은 2쪽 여닫이 대문을 달고 문 위에는 홍살을 장식하였다.

장경사 대웅전 장경사 대웅전

숭열전(崇烈殿)

백제 시조 온조왕께서 현몽으로 조선 임금 인조를 위험에서 구하고, 홀로 숭열전에 모셔진 온조왕께서 이서를 데려가 적적함을 달래다
숭렬전은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717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의 사묘(祠廟)이다. 본전은 정면 3칸, 측면2칸의 맛배지붕 형식이며, 2동의 부속건물과 솟을삼문이 세워져 있다. 인조16년(1638)에 새로 지었고, 매년 춘추로 예조에서 향촉을 보내와 제사를 모셨던 곳이다. 이 사당은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을 주향(主享)으로 모시고, 조선조 인조 때의 장군인 이서(李曙)의 신주를 배향(配享)하고 있다. 이곳에 숭열전을 세워 온조왕을 모시고, 이후에 이서가 배향된 데는 각각 특별한 현몽 일화가 전해진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와 『정조실록(正祖實錄)』에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꿈에 나타나 왕의 위험을 구해준 온조왕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 예조판서 김상헌이 의견을 드렸다. “온조왕이 여기 도읍을 정하여 역년이 가장 오래되었으니 반드시 그 신령이 있을 것입니다. 고인은 군대를 동원해 주둔하면 그곳 지신에 제를 지낸다 하였습니다. 이제 대가가 여기 머무신 뒤로 성황의 제사는 이미 행하였으니 온조왕에게 제사지내는 예도 아울러 행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여 그 뜻을 쫓아 상헌에게 명해 온조왕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 인조왕이 야심토록 독전하느라 심히 곤하여 앉은 채 잠깐 조시는데 꿈에 사람이 나타나 “적이 운제를 타고 북성을 오르는데 어째서 막지 않는가”고 하여 왕은 뉘시냐고 물었더니 “나는 성주 온조왕이라”고 하여 놀라 깨어 즉시 정탐하게 하였더니 과연 그 말과 같은지라, 쳐서 물리차고 잡아 죽인것도 많았다. 뒤에 환도하자 온조왕묘를 짓고 춘추로 제사지내게 하였으며, 축문에도 어휘를 쓰고 향폐도 예조에서 보내왔다.

- 임금이 남한에 있었다.... 영의정 김상철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때 인조대왕께서 꿈에 온조왕이 와서 적병이 성에 오른다고 알리는 것을 보셨습니다. 성조께서 놀라 깨어 곧 명하여 정탐하게 하셨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아서 장사를 시켜 격퇴하게 하셨는데 참획이 매우 많았으므로, 환도한 날에 특별히 명하여 온조묘를 세워 봄, 가을로 제사하게 하셨으니, 일이 매우 영이합니다.

그리고 원래 온조왕을 모시던 숭열전에 이서가 배향된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인조가 어느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꿈에 온조왕이 찾아와서 자기의 묘(廟)를 세워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면서 인조를 치하하였다. 그리고 “나 혼자서는 지내기가 너무 적적하니 당신의 신하 이서를 나에게 보내 줄 수 없겠소 ”하므로 인조가 쾌히 승낙하고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런데 왕이 아침에 일어나자 광주유수 이서가 간밤에 죽었다는 기별이 왔다. 이에 인조는 이서를 온조왕이 데려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지난 밤에 꾼 꿈이야기를 하고, 이서를 숭열전에 배향케 한 것이라고 전한다.



침과정(枕戈亭)

백제 시조 온조왕의 궁(宮)이라는 전설을 담고, 창을 베개삼아 병자호란의 치욕을 되새기는 이름을 달다

침과정은 침괘정이라고도 하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591-1에 위치하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건물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양식으로 정면7칸, 측면4칸 규모이다. 네모지게 대충다담은 자연석 주춧돌 위에 4각의 모기둥이 특징이다. 그 위에 주심포양식의 기둥을 올렸으며 포는 이출목익공식이다. 건물의 남쪽 2칸을 제외한 나머지 방에는 툇마루를 둘렀으며 각 칸에는 2쪽 여닫이 격자문을 닫았다. 천장양식은 우물천장을 하였고 동쪽 툇마루 아래에 2개의 아궁이를 내었다.
평범해 보이는 이 건물에는 백제 시조 온조왕의 궁궐이었다는 전설과 비구름을 일으키는 그림에 대한 전설이 전해온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의하면 이곳의 원래 건물은 1624년(인조2) 남한산성 축성 총책임자인 완풍군 이서가 울창한 나무숲 속에서 찾아낸 옛 건물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이 집은 몇 백년이나 됐는지 알 수 없었으나 기둥과 초석이 모두 탄탄하였고 방을 덥히는 구들(온돌)도 말짱하였다고 한다. 특히 방 한복판의 온돌은 몇 척이 더 높았는데 시험삼아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보니 이 방이 먼저 덥고 차차로 낮은 다른 방으로 번져 가는데, 당시 이곳 촌로들은, 이곳이 온조왕의 궁(宮)이라고 말하고 믿어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설은 병자호란 2년전인 1634년(인조12)에 침과정 오른쪽 군기고 벽에 명나라 사신(부총병 程龍)이 난초와 용을 그렸는데, 그후 비가 오려고 하면 구름기운이 그 그림에서 피어나고, 또 멀리서 보면 용이 날아가는 기운이 일어나므로, 이곳에 와서 비 내리기를 기원하면 효과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때의 난초나 용의 그림은 자취도 없어졌고, 1751년(영조27) 광주유수 이기진이 이곳을 중수하고 ‘침과정’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枕戈‘란 戈, 즉 ’창을 베개삼는다‘는 뜻이다. 한시도 마음을 풀지 않고 국방에 전념한다는 뜻이 담긴 말로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스며있다. 오늘날에는 ’침괘정‘으로 통용되고 있으나 그 정확한 표기는 ’침과정‘이 옳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침과정 중수기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성중에 언덕이 있고 언덕 위에 정자가 있으니 정자를 ‘침과’라고 이름을 명명한 사람은 상서 이기진이다. 슬프다. 지난날 병자와 정축에 우리 인조 임금께서 오랑캐의 침범을 당하여 이 성으로 피난하셨으나 군사가 한번 죽음을 걸어보지도 못하고 적으로 하여금 뜻을 이루고 돌아가게 하였으니 나라의 수치이다. 장차 병인(兵刃)을 갈고 병마를 모아 대의를 천하에 밝히어야 하겠다. 뜻을 비록 이루지 못한다 해도 그 의(義)많은 일찍이 하루도 잊어서는 아니되는데,지금 것 폐백은 밖에서 힘을 다해야하고 무기는 안에서 칼집에 감추어진채 사람들은 모두 무사안일에 젖어 전쟁의 준비는 잊어버리니 고인의 와신상담하는 의를 자못 다시는 말도 못하겠도다. 이공이 정자를 침과라고 명함도 어찌 경계함이 아니리오.”

장경사 일주문 장경사 일주문

서흔남(徐欣南) 이야기

전쟁의 그늘과 빛 - 노비에서 당상관에 오르다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24-1, 남한산성 동문안 지수당(地水堂) 연못가 서북쪽에는 ‘가의대부동지중추부사서공지묘(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徐公之墓)’라고 새겨진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이것은 서흔남이라는 사람의 묘비로 본래 성남시 창곡동 병풍산에 있었던 묘와 함께 이곳으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서흔남은 병자호란 당시 공을 세워 노비에서 당상관에 이른 입지전적인 인물인데, 그의 공적에 관한 내용이 『중정남한지』에 수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서흔남은 사노출신으로 지붕에 기와를 얹거나 대장장이 일도 하며 또 무당질도 하는 등 행동이 자유분방하고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병자난 때 산성이 포위되어 안팎의 소식이 끊겼는데, 성밖으로 소식을 전할 사람을 구하여도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다.
이때 서흔남이 자원하여 유서(諭書)를 가지고 성밖으로 나갔는데,

그 유지를 차례대로 표를 하고 종이로 끈을 꼬아서 옷과 바지를 얽어매고, 봉두에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깨어진 쪽박을 들고 성을 넘어갔다. 적진에 이르러서는 병든 사람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다니며 비럭질을 했는데, 한 곳에 이르니 어떤 사람이 일산(日傘)을 받치고 철판위에 앉아 있는데 밑에는 숯불을 피워서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청태종(汗)이었을 것이다. 그가 비럭질하는 거지인 줄 알고 먹을 것을 던져주니 서흔남은 일부러 손을 쓰지 않고 입으로 먹었으며, 그 자리에서 똥을 누니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릎으로 기어서 적진을 벗어나자 살같이 달려가 임금의 유지를 삼남지방과 강원도에 전하도록 하였으며 성으로 돌아올 때에도 그와 같이 하였다. 그는 적군이 성 밖에서 삼전도로 옮길 때까지 여러 차례 성밖을 왕래하며 명령을 전하였고, 적진에 들어가 적정을 탐지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조정에서는 그 공을 높이 여기고 훈련주부를 제수하였으며 통정대부(정2품 당상관)의 품계를 주었다고 한다.
『광주군지』에는 서흔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해오는 또다른 이야기도 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전신이 피곤하여 산길을 잘 걷지 못하였다. 이때 마침 근처의 나무꾼이 이 광경을 보고는 곧장 인조를 업고 성안으로 들어왔다. 인조가 그의 공을 가상히 여기고 “너의 소원이 무었이냐 ”하고 물으니, 그는 임금이 입고 있는 찬란한 곤룡포를 달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곤룡포 한벌을 나무꾼에게 내렸는데, 그가 바로 서흔남이었다고 한다. 그 뒤 서흔남이 죽을 때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든 곤룡포를 관속에 넣어 함께 묻어달라”하였으므로 그 무덤을 “곤룡포무덤”이라 하였고, 그 무덤 앞에는 하마비(下馬碑)를 세워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에서 내렸다고 한다.


기타 이야기

① 구송정지(九松亭址)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92, 성안의 제3 남옹성 안쪽 한흥사터 뒤에 있는 조선시대의 옛 정자터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성안의 나무란 나무는 모두 베어져서 민둥산이 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이곳에는 소나무 아홉 그루가 남아 있었다 한다. 인조께서 보시고 이 나무에 왕명으로 직첩을 내리고 그 아래 대(臺)를 설치하여 구송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나무에 내린 직접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전란으로 성내가 얼마나 피폐해지고 어려웠으면, 이름없는 소나무에 까지 왕명으로 직첩을 내려 베지 못하게 하였을까 하는 점을 생각게 한다.

② 완대정지(緩帶亭址)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24임, 행궁 하궐 담장 북편 산기슭에 있었던 정자이다. 1805년(순조 5) 유수로 부임한 이만수가 세운 정자인데, ‘완대(緩帶)’란 허리띠를 느슨하게 푼다는 뜻이며 마음을 편하게 하여 쉰다는 의미로 『한서(漢書)』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하여 정자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성안의 옛 건물 이름을 보면 항시 전쟁에 대비하는 마음가짐이라는 뜻의 ‘침과정 (枕戈亭)’, 싸우지 않고도 앉아서 이긴다는 ‘좌승당(坐勝堂)’ 등과 같이 모두 전쟁과 관련한 것들이 많다. 더욱이 병자호란 때 인조임금이 삼전도에 나아가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한 번 절 할 때마다 이마를 세 번씩 조아려야 했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과 청나라의 심양에 끌려가 8년 동안이나 볼모로 잡혀 있다가 돌아와 북벌을 꾀하였으나 끝내 그 한을 풀지 모하고 승하한 효종 임금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영조께서 이름한 ‘무망’은 ‘잊지말라’는 뜻의 ‘물망’이나 ‘잊지 않는다’는 뜻의 ‘불망’이 아니라 ‘무망’ 즉 ‘잊음이 없다’,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니 그 말에 담긴 절치부심의 한이 담긴 ‘무망루(無忘樓)’ 등과 같이 병자호란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긴장의 끈을 조이고 복수의 칼날을 가는 이름들이 많은데, ‘완대’ 이라는 정자이름의 모처럼 선비의 여유로운 마음 가짐이 드러나 보여 이채롭다. 그러나 『중정남한지』에 실린 광주유수 이만수(李晩秀)의 「완대정기」에 의한다면 이 정자는 그 당시 물고기가 놀고 연꽃이 피었던 정자로서 활쏘기를 즐기던 곳으로 보이지만, 놀이나 여유도 활이라는 무기를 통해서 즐겼던 여전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③ 한흥사지(漢興寺址)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38, 남단사지에서 동쪽으로 315m 지점의 해발 4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사찰터이다.
‘한흥사’라는 이름에 대하여는 벽암대사가 처음 이름을 지을 때 우리나라가 크게 흥할 것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라고도 하고, 반대로 ‘한(漢)’은 ‘한(汗:청황제)과 같으므로, 당시 금나라였던 누루하치 (아이싱교로 : 愛新覺羅)의 여진족이 뒤에 청(淸)나라로 크게 발흥할 것을 예견한 것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한(漢)’은 곧 대외적으로 중국을 지칭하고 청나라와 화의를 맺기 전에는 사대교린에 의하여 명(明)나라를 지원하였으므로, ‘한흥’은 명나라가 다시 융성해지기를 기원하는 이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국청사지(國淸寺址)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2, 서문에서 남동쪽으로 228m지점의 해발 44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사찰터이다. 현재도 국청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이 사찰은 원래의 사지에서 북쪽으로 140m 지점에 위치하며, 한국전쟁 이후 새로 지은 것이다. 당초의 국청사는 누각 앞에 못이 있었고,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겹처마 지붕의 천정을 만들었는데 그 천정 안에서 화약을 졔조하고 법당에서는 예불을 하였다고 한다. 을사보호조약 이후까지 의병의 군기고로 쓰이다가 일제가 무기 및 화약수거 때인 1907년 8월 1일 폭파되었다.
국청사와 한흥사의 명칭에 대하여 『중정남한지』에서는 두 사찰의 이름의 의미를 몰랐는데 병자호란을 치른 후에야 청태종을 뜻하는 칸(‘汗)’이 ‘한(漢)’과 음이 같아서 ‘한흥사(漢興寺)’라는 이름과 통하고, 또 국청사 역시 금나라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것이므로 절 이름을 미리 ‘국청사’라 한 것이구나 하고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은 국청사 앞의 우물인데, 효심으로 만들어진 이 우물은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마르지 않고 옥수(玉水)가 흐른다고 한다. 현재는 보존을 위하여 직접 물을 받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넘치는 물은 다시 받아 절 입구에 약수터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옛날 광주군 구천면 둔촌이라는 곳에 이집(李集)이라는 분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악성 독종을 앓고 있었다 한다. 이에 이집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남한산성에서 백일기도를 하게되었고, 그러던 어느날 꿈에 산신이 현몽하여 지금의 우물터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집은 꿈에서 본 이곳에 와 쌓인 나뭇잎을 긁으니 의외의 맑은 샘물이 솟았고, 그 물을 떠다가 아버지에게 마시게 하니 독종이 나았다고 한다. 그후 이 샘물은 전국에 알려져 피부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성시를 이루었고 실제로 효험도 있어 간혹 지금도 피부병 환자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장경사(長慶寺)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22-1, 예부터 남한산성 내에 있어왔던 9개의 사찰중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의 사찰이며,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 으로 약 350m거리의 해발 36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사찰은 1624년(인조 2) 남한산성 수축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군막사찰이었다.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한 군대 해산령과 함께, 성안의 무기고와 화약고를 파괴할 때 다른 사찰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그중 장경사가 비교적 피해가 적어 비교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장경사는 1975년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창(重創)한 것이다.
『광주군지』에는 장경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옛날 검단선사라는 도인이 한 소년의 모친 병을 치료해주기 위하여 도술을 써서 묘향산에 들어가 약재를 구해 가지고 소년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 와서 기다렸으나 끝내 그 소년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소년은 모친이 죽자 크게 상심한 나머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인데, 뒷날 검단선사가 그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그것이 장경사라는 것이다.

청량당 청량당

벌바위(峰岩)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2-1, 남한산성 산줄기에 속한 봉우리의 하나로 외성의 하나인 봉암성(벌봉)이 축조되어 있다. ‘벌바위’는 이곳 산 봉우리에 높이 10m 정도의 벌어져 있고, 모양 또한 벌처럼 생겨서 부르는 이름이다.
벌봉을 둘러싸고 있는 봉암성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이 벌봉에서 성내부의 동태를 살펴 우리 군사들을 공격하자 1686년(숙종 12)에 부윤 윤지선(府尹 尹趾善)이 본성의 보강차원에서 처음으로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이 봉암성이 본성과 마주치는 곳에 암문이 만들어져 있으며 또한 벌바위의 아랫쪽에는 봉암으로 통하는 암문이 있다.
이 바위에는 여러 전설이 전해지는데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이 바위에 정기가 서려 있으므로 화약으로 바위를 깨트렸다고 하며, 그로 인하여 산성에 있던 인조가 마침내 청나라에 항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청나라 군사가 산성을 공격하는데 이곳에서 수많은 벌이 날아와 쏘아대어 청군이 물러갔는데 그 벌들이 참새만큼 큰 벌들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사진으로 보는 남한산성

시 대 : 조선
- 면 적 : 528,459㎡
- 위 치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은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 등 3개 시에 걸쳐 있으나 성의 대부분은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산성은 청량산(479.9m)을 주봉으로 하여 북쪽으로 연주봉(466m), 동쪽으로 벌봉(514m)과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고 있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 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남한산성은 사방으로의 넓은 조망권과 풍부한 수량과 경작지, 그리고 백제의 왕도 한성의 중심지였던 풍납동과 방이동 일대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는 6세기 중엽 이후부터 고려 조선시대까지 신주와 한산주 및 광주군의 읍치가 있었던 하남시 춘궁동 일대로서 모두 5km 범위 내에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