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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역사적 배경

산성이 위치한 북한산은 지세가 매우 험준하여 방어처로서 매우 적절한 환경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중요성이 매우 높았던 지역으로 당시에도 성을 축조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132년(백제 개루왕 6)에 백제가 북한산에 성을 쌓았고, 475년에는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공격을 받아 함락되어 개로왕이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되었다고 기록되었다. 551년(신라 진흥왕 12)에는 나ㆍ제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백제는 한강하류를 점령하고, 신라는 이 지역을 포함한 죽령 이북 10군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553년에 신라가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백제의 한강 하류까지 점령하고, 555년에는 북한산의 비봉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이후 603년(신라 진평왕 25)에 고구려군이 북한산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661년(신라 무열왕 8)에도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이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려시대에도 몇 차례 성을 수축하였고, 고려 8대 현종(顯宗)은 거란족 침입시에 북한산성의 계곡 중흥동에서 피난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232년 몽고 2차 침입때에는 북한산의 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으며, 태조의 재궁(梓宮: 왕의 시신이 담긴 관)을 이곳에 옮긴 일도 있었다. 고려말인 1388년에는 최영장군이 북한산에 중흥성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하는 등 북한산성 일대의 군사적 중요성은 지속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대외적 전란과 이괄의 난 등 대내적 위협을 겪고 수도 방위에 문제가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북한산성의 본격적인 축성에 대한 논의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산성 축성에 대한 논의는 임진왜란이 막바지에 이르던 1595년(선조 29)부터 병자호란 때 청(淸)에 인질로 끌려갔었던 효종조, 1675년(숙종 원년)과 1702년(숙종 28), 1703년(숙종 29), 1710년(숙종 36) 등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

북한산성 성벽 및 성문전경 북한산성 성벽 및 성문전경

본격적인 북한산성 축성 논의는 숙종 초기부터 계속되어왔으나 본격적인 논의는 숙종때부터 시작된다. 먼저 초기의 기록인 『숙종실록』29년

, 1월 20일(병인)에 의하면, 1703년 논의 당시 우의정 신완(申琬)은 왕에게 만언차(萬言箚)를 올려 강도(江都: 강화도)는 수세(水勢)가 예전과 같지 않고 남한산성은 고절(孤絶)하여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외적 침입시 오랫동안 항전할 수 있는 북한산성 축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숙종의 허락을 받아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였으나 축성에 대한 청의 오해 소지, 국가 재정의 궁핍, 그리고 도성의 지맥을 훼손한다는 풍수지리적 이유 등으로 축성 반대론에 부딪혀 결국 실행단계에서 중단되게 되었다. 대신 도성을 수축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먼저 1704년(숙종 30) 도성의 수축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 또한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1710년(숙종 36)에 완료되었다.
도성의 수축이 일단락 되면서 북한산성의 축성론은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당시 청(淸)이 해적의 출몰에 대비하라는 자문(咨文)을 보내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명시된 성지수축금지조항 사문화되었기 때문에 종래의 청(淸)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1710년에 축성론이 또다시 제기된 이유는 도성수비에 대한 불안감 증대, 바다(倭)와 육지(淸)의 적으로 부터의 침입 가능성에 대한 대비책, 성곽의 축조에 대한 청의 견제책 미비, 노론(老論)이 소론(小論)을 압도하고 지배권을 장악한 정치상황, 그리고 상인세력의 신장과 농업생산력의 향상 등에 의한 경제적 성장 및 실학사상의 태동 등 사회적 변화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와 대내외적인 환경은 북한산성의 축성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710년 9월부터 활기를 띠어 판부사 이이명이 강력히 축성을 주장하고, 10월에는 훈련대장 이기하(李基夏)가 북한산의 형세를 답사하고 북한산의 지리적 합리성을 극찬하며 축성을 주장하게 된다. 12월에는 어영대장 김석연 등이 다시 주장하고, 우의정 김창집(金昌集) 등이 북한산을 답사하였다.
축성반대론을 펼친 부제학 조태로(趙泰老)와 영중추부사 윤지완(尹趾完) 등은 종묘사직과 백성이 있는 도성을 굳건히 지키는 것이 새로이 축성하는 것 보다 상책이라며 극력 반대하였지만, 대신들의 축성론이 우세하고 숙종의 축성 의지가 명확해지면서 1711년(숙종 37) 2월에 북한산성의 축성 결정이 내려지고 4월에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축성은 4월 3일에 시작하여 삼군문(三軍門: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이 각기 축성 영역을 분담 진행함으로써 6개월 후인 10월 19일에 공사를 마쳤다. 축성에 필요한 노동력은 3군문의 군사를 비롯하여 도성의 주민과 모역군(募役軍), 그리고 각종 공장(工匠)과 승군(僧軍)이 동원되었다. 축성 기간은 그 규모에 비하여 매우 짧은 기간인데, 이는 도성의 수축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과 군(軍) 중심의 일사불란한 계획수립과 시행, 그리고 국방상의 시급성과 청(淸)에 이의제기 내지는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매우 서둘렀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숙종대의 북한산성 축성 이후에는 산성내 행궁의 영건이 마무리되던 1712년(숙종 38) 4월 10일에 북한산성 시찰을 한 이후 관리운영상의 부작용으로 원성의 대상이 되었고, 영조대에 이르러서는 도성방어 중심으로 국방정책이 변경되면서 북한산성의 폐지 요구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북한산성은 고종 말기까지 유지되었으나 갑오개혁 이후 관심에서 멀어져 승군제도가 폐지되고, 의병전쟁과 군대 해산, 일제에 의한 강제합병 등의 변혁기를 맞아 몰락의 길을 맞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산성 이야기
인수봉 인수봉

위 치 : 서울 종로구 신영동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북한리 경계 북한산
지정번호 : 국가지정 사적 제162호 (1968년 12월 05일 지정)
시 대 : 조선시대
성 격 : 석축산성 (포곡식)

북한산성은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정맥이며, 진산(鎭山)인 북한산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봉우리를 연결한 포곡식의 석축산성으로 지금의 산성은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이다. 북한산(836.5m)은 현재 행정구역상 서울시와 경기도 의정부시ㆍ고양시ㆍ양주군에 걸쳐 있으며, 우이령을 중심에 두고 남쪽의 북한산 지역과 북쪽의 도봉산 지역으로 구분하여 약 78.5㎢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북한산은 원래 『삼국사기』,『고려사』,『세종왕조실록』의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등에서 한산ㆍ화산ㆍ삼각산ㆍ부아악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워졌는데, 지금의 명칭은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이 축성되면서 불리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명칭
북한산(北漢山) : 한강 남쪽 광주시ㆍ성남시에 솟은 남한산에 대응한 호칭

삼각산(三角山) : 고려 성종 이후부터 불렸으며, 삼각산으로 불리는데는 암봉으로 이루어진 인수봉(810m)ㆍ백운대(836m)ㆍ만경대(800m)의 높은 암봉이 깍아 세운듯이 날카롭게 우뚝 솟아올라 삼각형을 이루는 뿔처럼 생겼다 하여 유래

부아악(負兒嶽) : 인수봉의 형태가 큰 암봉 뒤에 어린아이 형상의 바위가 붙어 있어 어린아이를 엎은 형태의 산모양이라는 데서 유래 산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봉우리는 백운봉(836.5m: 조선시대 여암 신경준 등이 백제의 건국과 관련이 깊은 산봉우리로 추정), 인수봉(810.5m: 북한지를 쓴 고승 성능이 백제 건국신화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 산봉우리), 만경봉(799.5m: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한양을 조망하고 국도를 정했다는 데서 유래하여 일명 국망봉이라 불림)과 염초봉, 노적봉(716m), 원효봉(565m), 의상봉, 용출봉, 용혈봉(565), 증취봉(773), 나월봉, 나한봉, 영봉(604m), 비봉(560m: 진흥왕순수비가 있어 붙여진 이름), 문수봉(715.7m), 보현봉(700m), 형제봉(462m) 등이 있다

해동지도 경도 오부 해동지도 경도 오부
북한산성과 북한행궁
북한행궁 내정전 전경 북한행궁 내정전 전경
북한행궁

행궁(行宮)

행궁이란 정궁(正宮)에 대비되는 용어로서 임금이 궁궐을 벗어나 거둥(行幸))할 때 머무는 별궁(別宮) 또는 이궁, 임시궁궐(臨時 宮闕)을 말한다.
그 조성 목적은 왕이 능행(陵幸)을 목적(화성행궁)으로 혹은 전란(戰亂)에 대비(남한행궁, 북한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월미행궁, 격포행궁 등)하여 조성하거나 휴양(休養) 공간(온양행궁, 초수행궁, 이천행궁 등) 혹은 왕이 궁궐을 벗어나 거둥하면서 중간 휴식지(休息地)로 이용(사근평행궁) 하는 것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행궁은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 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되어 왔다. 행궁을 만들어 이용한 기록은 백제 때부터 나타나는데, 삼국사기 백제 본기 진사왕(辰斯王) 8년에 왕이 구원행궁(狗原行宮))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행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 에서 40건의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행궁은 전 시기에 걸쳐서 조성되었는데 행궁의 이용 시기는 전기보다는 이괄의 난 등 국내 반란과 정묘호란ㆍ병자호란ㆍ임진왜란 이후의 군사적인 목적의 증대로 인하여 중 후기에 더 많이 조성되고 이용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조성된 행궁은 풍양궁(豊壤宮)과 온양행궁, 초수행궁, 이천행궁 등이 해당한다. 임진왜란 이후 인조에서 숙종대까지는 남한행궁, 북한행궁, 강화행궁, 전주행궁, 격포행궁, 월미행궁이며, 경종대 이후는 정조대(1776~1800)가 화성행궁과 노량행궁(용양봉저정), 시흥행궁, 과천행궁, 사근참행궁, 안양행궁, 안산행궁 등을 조성하는 등 행궁을 활발히 조성한 시기였다.

북한행궁의 조성

북한산성은 1711년(숙종 37)에 축성되었는데, 비상시 장기적인 항전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금이 거처할 행궁도 함께 고려되어 진행되었다. 행궁의 조성과정에 대하여는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과 『배릉등록(拜陵謄錄)』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행궁조성 공사를 주관할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은 공사가 진행되기 직전인 8월 초에 결정되었다. 숙종은 호조판서 김우항(金宇杭)이 축성을 담당했으므로 그대로 행궁영건당상(行宮營建堂上)으로 차출하고, 다른 1명은 공조판서 이언강(李彦綱)을 차출하며, 낭청(郎廳)은 두 부서의 낭관으로 차출하였다. 이어 행궁의 조성을 담당할 기관으로「행궁영건청(行宮營建廳)」을 설치하였다. 남한행궁의 경우는 유수가 성 전체의 일을 전관하므로 행궁 공사도 그 속에 포함해서 진행하였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행궁영건청(行宮營建廳)」은 행궁의 조성을 담당할 임시 기구로 처음에는 별도의 기관을 설치하지 않고 호조와 공조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그러나 공사의 진행상 전담 기관이 있어야 일을 추진하기에 편하고 효율적이므로 ‘영건청’이나 ‘영건소(營建所)’라는 명칭을 두기를 요청하여 설치하게 되었다. 이후 낭청으로 호조좌랑 서종유(徐宗愈)와 공조좌랑 이의화(李宜華)를 추가로 차출하고 사목(事目)을 마련하여 도감(都監)과 같은 공식 기관으로서 공사를 진행해 나갔다.
행궁의 영건(營建)은 일반적인 관영공사와 마찬가지로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길일(吉日)과 시간을 정하게 하여 진행되었다. 그에 따라 조성공사는 1711년 8월 17일 진시에 착수되었고, 내전의 정초는 9월 26일 진시, 입주는 9월 29일 묘시, 상량은 10월 6일 묘시로 정하여 진행하였다. 외전은 다음해인 1712년 2월에 북청(北廳)의 공사를 시작으로 재개되었다. 당초 외전의 공사 일정은 정초가 2월 21일 진시, 입주는 2월 26일 묘시, 상량은 2월 29일 묘시로 정하고 진행하였으나 산속 깊은 곳이라는 점과 추위로 인하여 공사가 지연되면서 공사 일정을 다시 정하였는데, 정초는 3월 5일 묘시, 입주는 3월 8일 진시, 상량은 3월 10일 오시로 결정하여 진행하게 되었다. 이로써 5월에는 수라간을 포함하여 계획되었던 건축물이 모두 완성되었고, 6월 9일에는 공사에 참여한 관리자 및 원역, 공장에 대한 시상을 함으로써 행궁 조성은 마무리되었다. 이어서 행궁의 관리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이후 행궁의 위치가 당시의 중흥사가 있던 자리가 더 좋다고 하여 다시 옮겨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산사태의 위험 등으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북한행궁의 규모

행궁의 전체 규모를 알 수 있는 기록은 『북한지』와 19세기초(1808년경)에 작성된 『만기요람(萬機要覽)』, 고종 초반기 문헌인『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가 있다. 이중 19세기 문헌인『만기요람』과『동국여지비고』는 행궁의 총칸수가 129칸으로 같다. 이것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각 문헌별 북한행궁 건물 규모

건물 / 문헌 내전 내전 부속건물 수라소 측소 외전 외전부속건물 비고 총칸수
『북한지』
28칸
28칸
5칸
2칸 28칸
33칸
124칸
『만기요람』 28칸 18칸 6칸 (수라간)
3칸 28칸 46칸 5칸 증건 129칸
『동국여지비고 28칸 28칸
① ~ ④
합 : 73칸

129칸
1902년 북한행궁 모습 1902년 북한행궁 모습

『북한지』와『만기요람』은 약 60여년의 시간 차이가 나는데 이 기간동안 영조는 1760년(영조 36)과 1772년(영조 48) 두 차례 행궁을 찾았다. 두 문헌상에 보이는 5칸의 차이는 두 차례 있었던 영조의 행행(行幸)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중 수라소와 측소가 각각 1칸씩 증축되었다. 나머지 3칸은 행궁내 부속 행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함께 두 문헌은 행궁의 행각 칸수를 기록하는데 다소 차이가 있다. 즉 내전에 속한 행각 칸수에서 30칸과 21칸으로 9칸의 차이가 난다. 외전 행각 칸수 역시 33칸과 46칸으로 수라소와 측소 2칸외에 11칸의 차이가 난다. 이것은 두 문헌의 기록자가 내전과 외전의 부속 행각을 두 건물 중 어느 건물에 속한 것으로 보았는가 하는 시각 차이로 볼 수 있다.
현재 행궁의 유구 상태나 『한국건축조사보고』의 사진은 『만기요람』의 건물 구성과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19세기 초 행궁의 배치 상태가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행궁은 순조 32년(1832)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피해를 입었으나 다음해 산성과 함께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1879년(고종 16)에는 홍수로 인하여 수리하였고, 1892년(고종 29)에도 수리를 결정하여 다음해까지 공사를 진행하였다. 이로 보아 행궁의 건물들은 홍수 등으로 피해를 입긴 하지만 중요시되어 계속 수리를 하여 유지하였음을 볼 수 있다.


북한행궁의 관리와 이용

행궁이 조성되는 중에도 산성과 함께 행궁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에 문제는 행궁의 공사가 진행되는 중에도 산성의 관리자를 정하는 문제와 함께 지속적으로 논의가 진행된다. 논의 과정에서는 따로 위장(衛將)을 내자는 안과 삼군문의 장교에게 수직하게 하자는 안이 대두되었다.
행궁 공사가 마무리되는 1712년 5월 숙종은 비변사회의에서 행궁을 수직할 가위장(假衛將) 2원을 우선 차출하도록 했다. 이 문제는 몇 일 뒤 재차 논의가 진행되었고, 수라간을 제외한 공사가 마무리된 행궁에는 위장 2인을 차출하여 교체하도록 하였다.
이후 행궁의 관리는 1712년 산성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설치된 경리청(經理廳) 소속의 관성장(管城將) 1원(員)이 맡아서 하였다. 관성장은 처음에는 ‘행궁소(行宮所) 위장’, ‘도별장(都別將)’으로 부르다가 경종 2년(1722)부터 ‘관성장’으로 불렸다. 행궁의 수직은 관성소(管城所) 소속의 행궁군사 2인이 하였다.
행궁의 관리는 행궁 영역에 보각이 들어서고 고종대에 사고로 전용되는 점과 이곳에 보관했던 물품들이 왕실의 어제나 어보, 어책, 의궤를 비롯한 중요 유물들이었으므로 엄격하였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행궁을 봉심하러 가기전 왕의 하교를 받는 기록 등을 통해 조정에서 행궁에 대한 정기적이면서도 엄격한 관리가 이루어 졌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행궁을 조성한 이후 행궁을 찾은 왕은 숙종과 영조 두 왕 뿐이다.

역대왕의 북한행궁 이용

시기/행행내역 행행 일자 행행 내용
숙 종
1712년(숙종 38) 4월 10일
산성, 행궁 조성 시찰
영 조 1760년(영조 36) 8월 20일 행궁 시찰, 보각 봉심
1772년(영조 48) 4월 10일 선왕 행행 추모

숙종은 1712년(숙종 38) 4월 구파발을 거쳐 산성을 찾았다. 숙종은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행궁을 둘러보고 산성의 동장대(東將臺)에 올랐다. 당시 연잉군이던 영조는 19세였는데 총관(摠管)으로 부왕인 숙종을 호가(扈駕)하였다. 이전에 숙종은 성역이 진행중이던 7월 이전에 북한산에 행행하고자 하였으나 도제조 이이명의 반대로 다음해(1712년)로 미루었다. 또한 1712년 3월에도 숙종은 행행 날짜를 늦춰 잡으라는 부제학(副提學) 이조(李肇)의 상소에 이미 행행 날짜를 늦추었다는 하교를 내린 적이 있었다.
숙종은 1712년(숙종 38) 대서문과 수문을 거쳐 행궁을 찾았다. 숙종은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행궁을 둘러보고 대신과 제신(諸臣)이 입시한 가운데 성의 서북변에 중성(重城)의 축성을 지시하고, 산성내 사찰의 건립시 공명첩의 발행과 양향(糧餉) 문제를 결정하였다. 이어 시단봉(柴丹峰)에 올라 산성의 동장대(東將臺)를 살펴보았다.
행궁을 조성할 무렵부터 행궁에『조선왕조실록』의 한 본을 베껴 본관(本館)이나 북한에 두도록 요청한 것으로 보아 평상시 이용에 대해서는 중요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로서의 기능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하들과 산성에 관한 제반 문제를 의논한 곳은 편전의 역할을 하는 외전이었을 것이다. 행행 당시 행궁 공사는 막바지 단계로 5월 8일 공조판서 조태구의 보고에 의하면 수라간 이외에는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다. 당시 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되지는 않았지만 왕의 행행에 대비하여 진행 상황에 맞게 다소 정리된 상태로 왕의 행행을 맞았을 것이다.
영조는 1760년(영조 36)년 8월과 1772년(영조 48) 4월 두 차례 행궁을 찾았다. 1760년 행행은 영조에게는 왕자일 때 부왕을 호위한지 49년만에 다시 행궁을 찾는 것으로 영조는 친히 눈물을 머금으며 「북한행궁기회(北漢行宮紀懷)」라는 글을 남겼다. 이날 영조는 행궁에 들어가 숙종이 쓰던 포진(鋪陳)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총융사(摠戎使)에게 궤(櫃) 안에 간직하게 하였다. 또한 돈령판관(敦寧判官) 서일보(徐日輔)에게 보각(譜閣)을 열어서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보각이 1760년 이전에 행궁 영역안에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는 1772년에도 79세의 나이로 험한 산행을 통해 행궁을 찾았다. 이날 행행은 선왕인 숙종의 행행이 주갑(周甲)을 맞은 것을 추모하는 의미였다. 1772년 영조는 부왕인 숙종이 1712년 행궁을 찾았던 4월 10일에 거동하여 선왕의 행행을 추모하였다. 행궁은 영조의 두 차례 행행이 있던 동안에 5칸이 증축되었다.
도성에서 행궁으로 진입하는 길은 기존에는 구파발을 거쳐 대서문(大西門)으로 들어가는 길을 이용했다. 이후 새로 도로을 조성하여 창의문(彰義門)을 통해 북한산성의 대성문(大成門)을 거쳐 행궁에 도달하는 길을 마련해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영조는 행궁을 정치적으로도 이용하였다. 영조는 세자와 갈등이 있거나 신하들과의 의견 충돌시 자신의 견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이어처(移御處)로서 북한산과 북한행궁을 제시하면서 결국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켜 나갔다.
행궁 관리 주체로서 경리청(經理廳)이 임시로 편성된 것은 1712년 1월이었다. 같은 해 4월 숙종의 행행 당시 산성의 관리 주체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11월 ‘경리청절목(經理廳節目)’이 마련되면서 하나의 관청으로 성립한다. 경리청의 중요한 임무는 향곡(餉穀)의 확보와 관리에 있었다. 북한산성의 향곡은 10만석으로 확정되었는데 이것은 강화나 남한산성과 같은 양으로 산성의 전략적 비중이 두 곳 보다 특별히 더 크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18세기 조선의 방어 전략은 적의 양태에 따라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 또는 강화 중에서 선택적으로 피난처를 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리청에 대한 비판과 혁파의 주장은 숙종 말년부터 시작되어 경종대에 고조되었다. 그러나 북한산성의 중요성이 무시되지 않는 한 경리청은 혁파되기 어려웠다.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계기로 국가 방어전략은 산성방수체제(山城防守體制)에서 도성수호체제(都城守護體制)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북한산성에 많은 쌀을 저치(儲置)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이를 관리할 관청 역시 있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영조 23년(1747) 경리청은 혁파되고 산성관리는 총융청으로 넘어갔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 따라 행궁 역시 건물 이용에 변화가 수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행궁은 건립 단계부터『조선왕조실록』의 사본을 옮겨와 보관하게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이이명은 『조선왕조실록』의 사본을 본관(춘추관)이나 북한에 두어 후일에 살펴보기 쉽게 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제안은 강화사고에 보관중인 서책을 꺼내어 살펴보는 과정이 번거롭고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도성내에 두거나 강화보다 가까운 북한행궁에 두자는 주장이었다. 결국 행궁은 영조대에 있었던 방어체제의 변화에 따라 중요성이 다소 약화되면서 행궁 본래의 기능에 왕실 서고의 기능이 부가되어 운영되었다.
행궁의 기능 전환으로 인해 행궁은 본래의 기능에 왕실 서고로서의 기능이 첨가된다. 행궁에 왕실서고를 설치한다면 책들과 중요 물품들을 어느 곳에 보관했는가는 중요한 문제로서 기존에 있던 행궁 건물을 이용하는 방법과 별도로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방법이 있었다. 북한행궁은 후자를 택하여 보각을 설치하여 중요 서적들을 보관하게 했다.
1760년 영조의 행행은 행궁을 둘러보고 보각을 봉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것은 1760년 이전에 행궁 영역내에 보각을 설치하여 왕실 족보 등을 보관하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보각은 이후 고종년간에 와서 사고로 전용(轉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고에 보관했던 책의 목록은『북한책목록(北漢冊目錄)』에 전한다. 이중 사고가 지어지기 전에 보각에 보관했을 왕실족보는 5종 139책이 있다. 행궁이 건립되기 직전 이이명의 제안에 의해 행궁에 『조선왕조실록』의 사본을 보관하였을 가능성은 있으나, 실제『북한책목록』에서 확인되는 것은『정조실록』1책 뿐이다.『북한책목록』의 책을 종류별로 정리하면 표와 같다.

『북한책목록』의 도서분류와 수량

분류 수량 분류 수량
儀軌/謄錄
64종 323책 弘齋全書
656책
族譜類 5종 139책 읍지류 4종 85책
御寶/御冊類 81점 (보함 25점) 지도류 7종 67점
御製/御筆類 560점 式年
155책
行狀/誌狀 12책 무제목 34책
印章類
136점 (금함 24점)

목록에서 확인되는 의궤 등 서적의 상당 부분은 고종년간의 것이다. 이것은 병인양요(1866년, 고종 3) 때 외규장각(外奎章閣)의 소실로 인해 왕실의 중요 서적을 비롯한 물품들을 보관할 곳이 사라지자 이후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왕실의 중요 서적이나 어보, 어책류 등의 보관 기능을 행궁내 사고가 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행궁내 사고에 보관했던 책은 1909년(융희 3, 명치 42) 4월 상순에 소격동에 위치한 종친부(후에 총독부 학무과분실, 1934년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로 이장(移藏)하였는데, 이로써 사고는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표면상 궁내부가 주도하였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홍문관, 규장각, 집옥재(集玉齋), 시강원(侍講院)과 강화 정족산 사고의 도서들도 이때에 이관되어 궁내부 도서과(圖書課)에서 이관받아 집중 관리되었다.
따라서『북한책목록』은 궁내부(宮內府)가 행궁 서고에 보관했던 각종 서적과 왕실 물품들을 종친부로 이관하기 직전에 책의 종류와 수량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한 기록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북한책목록』의 첫 장에 기록된 ‘隆熙三年四月一日’이라는 책의 작성 일자에서도 확인된다.
사고는 1912년 영국교회에 10년간 건물을 대여한 기록으로 보아 행궁과 같이 건물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건물은 현재의 지형 상황으로 보아 행궁이 파괴된 1915년 홍수에 큰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나 당시의 피해 정도나 건물의 손상여부는 알 수 없다. 일본학자인 세키노 다다스(關野貞)이 다녀간 1902년에도 행궁은 대체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915년 대홍수로 파괴되었다.
한편 이곳에 조선시대 역대 왕의 옥쇄와 금은 옥대, 의궤, 고문헌 등을 비밀리에 보관하여왔고, 더불어 다량이 정제 금괴가 저장되어 있었으며, 전란에 대비하여 땅속에 막대한 돌소금과 목탕 수만관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기도 한다.

북한산성내 시설물
복원된 성곽 복원된 성곽
복원된 성곽1 복원된 성곽1

북한산성의 규모는 1711년 축성 당시와 현재가 거의 차이가 없다. 현재 성곽의 전체 둘레는 12.7km, 성벽을 둘린 체성 연장은 약 8.4km이며, 축성당시의 체성(體城) 규모는 지금의 북한산성 터 그대로를 연결하는 7620보, 즉 21리 60보(현재 圖上 11,541m) 였는데, 백운봉ㆍ만경봉ㆍ용암봉ㆍ문수봉ㆍ의상봉ㆍ원효봉ㆍ영취봉 등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북한산성은 체성과 여장으로 이루어진 성벽에 14개소의 성문과 각각 1개의 수문과 시구문, 그리고 장대로 이루어져 있고, 기타 성내에 행궁ㆍ창고ㆍ성랑과 사찰 및 암자 등이 있다. 축성 초기의 상황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717년)과 북한지[北漢誌: 1745년(영조 21)에 북한지를 편찬한 성능(聖能)은 1711년 북한산성을 축조할 때에 승려들을 총 관리하는 팔도도총섭(八道都總攝)이었음]에 기록된 내용으로 살펴보면, 축성공사는 각 군문별로 영역을 분담하여 수행되었는데, 체성의 길이는
7,620보, 여장은 2,807첩, 성문 12개[대문 5(북한지에는 7)ㆍ암문 7ㆍ], 수문 1개, 장대 3개소, 성랑 143개소의 규모였고, 기타 성내의 시설물로는 행궁 1개소, 누각 3개소, 창고 5개소, 사찰 18개소, 암자 3개소, 교량 7개, 저수지 26개소, 우물 99개소 등이 위치하거나 새롭게 설치되었다.

성벽

북한산성의 성벽은 방비에 유리한 자연적인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는데, 지형조건을 적절히 살려서 고축, 반축, 반반축, 지축여장으로 나누어 쌓았다. 즉 편탄한 평지부분은 비교적 높게 쌓았으나 산지의 높은 지역으로 올라가면서 점점 높이를 낮추거나 자연암반에 그랭이질만 하여 성벽을 쌓기도 하고 아예 자연암반을 그대로 활용하는 방법으로 성곽을 쌓지 않기도 하였으며, 정상부에는 여장만 설치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성벽의 전반적인 규모는 고축(高築: 10척~14척) 2,746보, 반축(半築: 6척~7척) 2,906보, 반축의 반인 반반축(半半築: 3~4척) 511보, 그리고 체성을 쌓지 않고 직접 성가퀴(城堞)를 축조한 형태의 지축여장(只築女墻)이 1,457보의 형태였으며, 여장(높이 4척, 너비 3척)은 2,807첩에 이르렀다.

당시 공사를 담당하였던 삼군문(三軍門: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은 각기 축성 영역을 분담 진행하였는데, 각각의 구간별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훈련도감(訓練都監)은 수문 북변에서 용암봉까지의 2,292보(체성형태는 고축 1,052보, 반축 771보, 지축 여장 469보)로 수문ㆍ북문(홍예식)ㆍ서암문ㆍ백운봉 암문 등의 성문과 704첩의 여장을 축성하였다. 금위영(禁衛營)은 용암 남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281보(체성형태는 고축 474보, 반축 1,836보, 반반축 511보)로 용암 암문ㆍ소동문(홍예식)ㆍ동암문ㆍ대동문(홍예식) 등의 성문과 1,107첩의 여장을 축성하였다. 어영청(御營廳)은 수문 남변에서 보현봉까지의 2,507보(체성형태는 고축 1,220보, 반축 299보, 지축 여장 908보)로 대서문(홍예식)ㆍ청수문 암문ㆍ부왕동 암문ㆍ가사당 암문ㆍ소남문(홍예식) 등의 성문과 986첩의 여장을 축성하였다.

복원전 여장모습 복원전 여장모습
성랑 성랑

체성(體城)의 형태는 산성축성 직전의 도성 수축 경험을 토대로 보다 높은 수준의 축성기술이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이전에 축성된 여타의 산성과는 달리 체성을 축조하는 석재를 크고 반듯하게 하여 각 면과 모서리를 세밀하게 다듬은 정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하여 지세에 관계없이 평축(平築)으로 하였고, 매 단은 들여쌓는 수법을 취하고 있다.그리고 성문이 연결부나 일부 지역에서만 협축방식을 이용하고 대부분의 지역은 지세를 이용하여 능선의 외벽만 석축으로 하고 내벽은 작은 석재와 진흙 등으로 채워서 붕괴를 막거나 지반 보강을 위한 보축(補築)을 쌓아 올리는 편축식(片築式)을 채택하였다.
여장(女墻: 城堞ㆍ여담ㆍ성가퀴)은 규격화된 견고한 석재를 사용하지 않고 체성 위에 자연석에 약간의 치석만을 가한 얇은 판석재를 진흙이나 회를 발라 쌓아 올렸다. 미석(楣石)을 두지 않고 약간 들여서 축조하였는데 평균 여장 폭은 3척, 높이는 4척, 길이는 10~12척 내외이다. 타( )의 길이는 3.3.m 내외로 한 타에 1개의 총안을 둔 곳도 있지만 3개의 총안(銃眼)을 둔 것이 일반적이며, 중앙에 근총안을 두고 양편에 원총안을 두었다. 총안의 규모는 15~18x18~22cm 정도이며, 규모가 큰 것은 포혈일 가능성도 있다.

치(雉)

북한산성의 경우 지형의 굴곡이 심하고 험난하여 별도로 의도하여 치를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성곽의 형태상 치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 곳이 몇몇 있을 뿐이다. 대체로 10 여 개소 정도인데, 북문에서 시구문 사이에 2개소, 시구문에서 수구문 사이에 1개소, 부왕동암문에서 청수동암문 사이에 1개소, 대남문에서 대성문 사이에 1개소, 대성문에서 보국문 사이에 1개소, 보국문에서 대동문 사이에 1개소, 대동문에서 동장대 사이에 1개소, 동장대에서 용암문 사이에 2개소 등이다.
이중 동장대에서 용암문 사이의 반용봉에 있는 치는 가장 규모가 크며, 숙종년간에 제작된 북한도(北漢圖)에서도 곡성(曲城)이라는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다.

성문

산성의 성문은 1717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의하면 12개, 1745년의 북한지(北漢誌: 1745년)에 의하면 14개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북한지에는 기록된 대성문과 중성문이 비변사등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장과 총안 여장과 총안
용암문 용암문

북한지에 의하면, 14개 성문의 구조는 북문(北門)ㆍ대동문(大東門)ㆍ대서문(大西門)ㆍ대성문(大成門)ㆍ중성문(中城門) 등 5개는 홍예식(虹 式) 구조로 상부에 초루( 樓)가 설치된 형태로 높이 11~13척, 너비 13~14척 규모이며, 소동문(小東門: 일명 輔國門)ㆍ소남문(小南門: 일명 大南門)ㆍ서암문(西暗門: 성내에서 생긴 시신을 내보내던 문이라 하여 시구문이라고도 불림)ㆍ위문(衛門: 읾명 白雲洞暗門)ㆍ용암문(龍岩門: 일명 龍岩峰暗門)ㆍ동암문(東暗門)ㆍ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 일명 國寧門)ㆍ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ㆍ가사당암문(架娑堂暗門) 등 9개는 문의 높고 낮음이 일정치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홍예형에 상부 건축물을 가지고 있었던 성문의 경우 건물 초석의 형태가 각각 다른 점은 독특한 현상인데, 대성문과 중성문은 원형(圓形), 북문과 대성문은 단주형(短柱形), 대동문과 대남문은 팔각주형(八角柱形)의 형태이다. 그리고 초석은 모두 10개로 구성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단층 문루가 있었으며, 지붕은 대체로 우진각형으로 하였다. 기록상의 각 성문 규모는 북문 높이 11척 넓이 10척, 대동문 높이 9척 넓이 10척, 대성문 높이 13척 넓이 14척, 소동문 높이 6척 6촌 넓이 6척 5촌, 소남문 높이 11척 넓이 11척, 서암문 높이 7척 넓이 7척, 위문 높이 6척 3촌, 용암문 높이 6척 5분 넓이 7척 5분, 부왕동암문 높이 9척 넓이 8척, 가사당암문 높이 7척 넓이 7척 이다. 이외의 성문으로는 수문(水門) 1개소가 있다. 수문은 서암문에서 대서문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높이 16척에 너비 50척에 이른다. 수문 그림이 남아있는 북한지에 의하면, 수문을 성벽을 잘라 놓은 개방형으로 되어 있다.
성문의 출입구는 대문이나 암문 모두 안쪽이 바깥쪽 보다 높고 넓게 하여 외부로부터 문짝의 고정부나 틈을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하였으며, 문은 모두 철엽(鐵葉)을 대어 화공에 대비한 형태의 나무문 2개로 구성된 여닫이 형태였다.
암문은 외부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에 특별한 시설 없이 설치되었다.

장대(將臺)

북한산성에는 동, 남, 북 각 방면에 각각 하나씩 봉성암(奉聖庵) 뒤의 시단봉(柴丹峰)에 위치한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쪽의 남장대(南將臺), 중성문(中城門) 서북쪽의 북장대(北將臺) 등 3개의 장대가 있다. 이중 최고 지휘관이 머무르는 가장 중요한 장대는 동장대이며, 행궁을 비롯한 성의 안팎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으로서 1712년(숙종 38)에 총융청(摠戎廳)에서 완성하였다. 이 장대는 숙종이 당시 연잉군이던 영조와 함께 올라 살피기도 하였던 곳이며, 이후 1915년 8월의 집중호후 때 유실되어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성랑(城廊)

성랑은 성곽을 지키는 일반 병사들의 초소이자 숙소건물이다. 성랑의 건립은 행궁이나 창고 보다 먼저 착수되어 1712년(숙종 38)까지 훈련도감 구역에 42개소, 금위영 구역에 60개소, 어영청 구역에 41개소가 설치되었다. 성문의 주변이나 성벽이 돌출된 곳, 그리고 성벽 중 봉우리에 있는 지역 등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모두 143개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성내의 주요 시설물 주변에도 설치하였는데, 주로 행궁이나 창고, 그리고 삼군문의 유영지에 설치되었다. 규모는 성벽에 있는 것은 대체로 1~2칸 정도의 34평, 그리고 성내에 있는 것들은 10~20평 정도이다.

북한산성 중성문 북한산성 중성문
북한산성 대남문 북한산성 대남문
사진으로 보는 북한산성

시 대 : 조선
면 적 : 543,795㎡
위 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때 한성의 관망을 위해 도성을 축조하고, 그 방어 효과를 높이기 위해 삼각산에 산성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 외곽성의 축성론이 대두하여, 1711년(숙종 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석성(石城) 7,620보(步)가 완성되었다.
성의 규모를 보면 대서문(大西門) ·동북문(東北門)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자단봉(紫丹峰) 위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에 남장대(南將臺) ·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北將臺)가 있었고, 1712년에 건립한 130칸의 행궁(行宮)과 140칸의 군창(軍倉)이 있었다. 성내 중흥사(重興寺)는 승군(僧軍)을 배치한 136칸의 대찰이었으며 12개의 사찰이 있었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 성 안의 면적은 200여만평으로, 성벽은 아직도 잘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졌으나, 현재 대서문이 남아 있고 장대지(將臺址)·우물터·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시설의 일부가 남아 있다. 1990년부터 훼손된 동장대·대남문·대성문·대동문·보국문과 성곽들을 보수·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