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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 및 수성무기

우리민족은 세계 최초로 산성을 만든 민족인 만큼 성곽을 둘러싼 전투에 상당히 능했다. 특히 고구려 요동성, 안시성 전투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찍부터 다양한 형태의 수성 및 공성기술이 발달했다. 하지만 고려나 조선시대 들어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토벌의 대상이었던 북방의 야인들은 마을 주변을 목책으로 두르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화포 외에는 눈에 띄는 공성 무기가 거의 없는 편이다.

거마

적 기병의 돌격을 막기 위해 날카로운 창을 여러 개 묶어 세워놓은 것 을 거마(拒馬)라고 한다. 거마창(拒馬橋)이나 거마목(拒馬木)은 나무로 몸체를 만들고 그 끝에 창날을 단 것이고, 거마작(拒馬作)은 전체를 철로 만든 것 이다. 《재물보》에는 거마목을 우리말로 ‘거머젹’ 이라고 한다고 했고, 각 지방의 읍지에는 거마적(拒馬敵)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모두 거마작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생각된다.
조선 후기의 조선군은 대부분이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이었는데, 당시에는 아직 조총의 연사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평원에서 적기병의 돌격을 조총 사격만으로 저지하기는 어려웠다. 거마창은 운반이 용이하면서도 적기병의 돌격을 저지하는데 효과적인 장애물이었기 때문에, 조선군은 야전에서 이를 반드시 휴대했다. 기록을 살펴보면, 이미 임진왜란 당시에 이일(李鎰)이 거마목을 제작하여 선조에게 바친 기록이 있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선조가 이일에게 내린 북방 야인 정벌에 관한 비밀 비망기에도 적군의 야습에 대비하기 위하여 거마목을 많이 만들어 세우고 그 외부에는 함정(品防)을 파라는 지시가 있었다.
인조 5년에는 병조에서 거마를 순전히 철로만 만들면 공력이 과다하게 소모되므로, 참나무로 몸체를 만들고 그 끝부분에 철을 입혀서 간편하게 만들자고 건의했다. 《만기요람》에는 훈련도감과 총융청, 어영청, 금위영에 각각 348좌, 812좌, 576좌, 455좌의 거마창이 있다고 했다.

녹각목

녹각목(鹿角木)은 나무줄기를 사슴뿔처럼 뾰족하게 다듬어 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녹각목은 이미 《고려사》열전에도 그 사용 기록이 나오며, 조선시대에는 적기병을 저지하거나 적 보병의 진입을 막는 데 주로 사용했다. 삼포왜란 당시 황형과 유담년 등이 이끄는 조선군은 제포에서 선봉군으로 하여금 녹각목을 들고 왜구의 접근을 견제하게 했다. 이 당시 왜구는 보병으로만 구성되었으므로, 당시의 녹각목은 단순히 나뭇가지의 끝을 뾰족하게 깎아놓은 것이 아니라, 낭선과 같이 가지 끝에 철판을 씌우거나 뾰족한 날을 달았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재물보》에는 녹각목을 질려와 같은 종류의 무기라고 했는데, 이는 녹각목을 해자나 함정 아래에 묻어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용도로도 사용했기 때문이다.

능철판

선조 27년에 영의정 유성룡이 외적과 싸워 이길 방법 열 가지를 제시 했는데, 그중 하나가 중호(重懷)이다. 이 중호는 해자(漢)의 안쪽에 구덩이를 하나 더 파고, 거기에 능철판(裵鐵板)을 깔고 재를 덮은 것이다. 이 능 철판은 넓은 나무판을 깔고 그 위에 능철을 박아서 만든다. 《평안병영 군기집물중기》에는 중군(中軍)에 판질려 209개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능철판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능철판과 유사한 방어무기로는 정약용이 지은 《민보의》에 나오는 지위(地網)가 있다. 지위의 위網 자는 고슴도치라는 의미이며, 긴 나무판자 에 쇠못을 촘촘히 박아 마치 고슴도치처럼 만들어서 흙 속에 묻어놓은 것이다. 널빤지의 두께는 1촌 이상이어야 하고, 여기에 박는 쇠못은 길이가 3~5촌 이상이고 미늘이 달려 있다. 널빤지의 좌우에는 구멍을 뚫고 말뚝을 박아서 제거하기 어렵게 만든다.

철질려
육군박물관 유물 참조 육군박물관 유물 참조

철질려(鐵漢暴)는 4개의 뾰족한 날이 달린 철조각으로서 질려, 능철(裵鐵), 여철(暴鐵), 마름쇠라고도 한다. 이 철질려는 어떻게 던져놓더라도 4 개의 날 중에서 3개는 지면을 향하고 나머지 하나는 위쪽을 향하므로 이를 성 주변이나 적의 도하지점에 뿌려놓으면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철질려의 날에는 인분을 발라놓기도 했기 때문에, 철질려에 찔리면 이차적인 감염에 의해서 사망할 가능성도 높았다. 질려는 개별적으로 뿌리기도 하지만, 5, 6개를 하나의 줄에 묶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현존하는 철질려 유물 중 큰 것은 대부분 줄에 꿰기 위한 구멍이었다.《삼국사기》 태종무열왕 8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공격하자 성주 동타천(冬拖川)이 성 밖에 철질려를 던져놓아 사람과 말이 다니지 못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충남 부여읍 부소산성에서는 백제시대의 철질려가 출토되기도 했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이 철질려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적의 예상 접근 지점에 뿌려놓았다. 세종 23년에 이정석이 올린 상소를 보면, 철질려 는 육상에서 왜적의 예상 공격로에 빽빽하게 뿌려놓아 적이 가볍게 돌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수전에서는 배의 바깥쪽 공간에 뿌려놓아서 적 이 아군의 배로 뛰어넘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성종 11년에는 의주의 수구탄(水口難) 동 적의 도하가 예상되는 지점에 철제 기둥을 세우고, 여기에 여러 개의 철질려를 매단 밧줄을 묶어놓아 적의 도하를 저지하는 방안이 시도되었으며, 중종 때는 제주도의 포구에 철질려를 뿌려서 왜구를 방비했다. 얄은 물에 철질려를 깔아서 적을 저지하는 방법은 유성룡이 건의한 ‘전수십조’ 에도 나타나며, 조선 후기까지도 도하 저지 수단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수전에서의 질려 사용법은 《풍천유향》에 잘 나와 있는데, 질려 50개를 대나무 통 속에 넣어서 허리에 차고 있다가 적과의 육박전이 벌어지면 이를 풀어서 적선 안으로 던진다고 했다. 《만기요람》을 보면 오군영 에 대량의 철질려가 비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어영청에만도 3만 2,167개의 철질려가 있었다.
한편, 철질려와 능철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혹은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함평읍지》를 보면 철질려는 1좌라고 표시했고, 능철은 낱개로 표시했는데, 여기에서 철질려는 능철을 줄로 엮어 가시덤불처럼 만들어 놓은 상태를 말한다.

석포

화약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돌로 쌓은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무기는 큰 돌을 투척하는 석포(石砲)뿐이었다. 이 석포는 저울대처럼 생긴 투석기의 한끝에 돌을 담고 나머지 한쪽 끝에 밧줄을 달아, 이를 인력으로 당기거나 무거운 추를 달았다가 아래로 떨어뜨려 돌을 발사한다. 동양에서는 이 투석기를 포(砲)라고 불렀고, 게다가 투석기는 불덩이를 날리는 데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문헌기록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를 화약 무기의 일종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
삼국시대에는 삼국간에 성을 둘러싼 공방이 치열했기 때문에 석포가 널리 사용되었고, 신라에는 석투당(石投幢)이라는 별도의 석포부대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도 석포를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부대가 있었으며, 묘청의 난 때는 석포로 돌과 불덩이를 발사한 기록이 있다.

화약 무기가 동장하고 총통이라는 우수한 공성 무기가 등장한 조선시대에는 수백 명이 달라붙어 줄을 당겨야 하는 석포를 제작하거나 사용한 기록이 많지 않다. 다만 병자호란 때 용골산성의 의병장 정봉수(鄭鳳壽)가 석거포(石車砲)를 만들어서 적의 공성 무기를 격파한 사례가 있다. 시대적으로 봐서 용골산성의 석거포는 무거운 추를 이용하는 트레뷰솃 형 투석기였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 이름으로 보건대 투석기 아래에 바퀴를 달아서 투척 거리를 늘리고 신속한 이동이 가능하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민보의》에서 정약용은 성을 지키는 데 사용하는 투석 방법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제시했다.

물풀매

정약용은 적이 50~60보 밖에 있으면 가죽끈사이에 작은 돌을 넣고 돌리다가 던지도록 했다. 구한말에 조선을 방문한 미국인 선교사 조지 길모어는 조선인들이 석전놀이를 할 때 새끼끈으로 엮은 투석기로 돌을 던진다고 했다. 이때 사용되는 투석기를 우리말로는 물풀매, 줄팽개라 고한다.
물풀매는 주로 닥나무의 질긴 섬유질로 노끈을 꼬아서 만들며, 양쪽으로 약 60~80cm 정도의 길이로 늘어뜨리고, 그 가운데는 오목하게 짜서 돌을 얹는다. 돌을 던질 때는 노끈의 한끝을 손목에 매거나 손바닥에 쥐고, 나머지 한끝은 집게손가락에 걸어 빙빙 돌리다가 집게손가락을 놓으면 돌이 날아간다. 정약용은 민간에서 널리 사용되던 이 물풀매를 가죽으로 만들어 무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표석

정약용은 적이 10~20보 밖에 있으면 메줏덩이만한 돌을 나무자루가 달린 투석기에 넣어 던진다고 했다. 조선 후기에 송규빈이 쓴 《풍천유향》에도 대나무 막대에 물풀매를 달고 여기에 돌을 담아서 벙벙 돌리다가 던지면 힘이 강하고 맹렬하여 맞는 것을 모두 부술 수 있다고 했다. 이 표석(龜石)은 중국의 《기효신서》에도 소개되어 있고, 중세 유럽에서도 널리 사용한 수성용 무기였다.

중가와 현석

정약용은 적이 성 아래까지 공격해 들어오면 큰 돌을 사용하여 적군 과 공성 무기를 부숴야 한다고 했다. 이때 사용하는 것이 중가(重架)와 현석(縣石)이다. 중가와 현석은 저울대처럼 만들어 무거운 돌을 오르내리도록 하다가 적의 공성 무기에 충돌시키는 무기이다.
돌을 던지는 것은 구석기시대부터 있어온 고전적인 전투기술이지만, 갑주로 무장하거나 방패를 갖춘 적을 공격하는 데는 상당히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까지도 투석이 실전에서 사용되었다. 게다가 우리 민족은 돌팔매에는 일가견이 있는 민족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벼농사가 시작된 청동기시대부터 돌팔매 놀이가 존재했으며, 일본에는 야요이 시대에 벼농사와 함께 한반도에서 돌팔매 놀이가 전파되었다. 고구려시대에는 국왕까지 참여하여 석전을 즐겼고, 고려시대에도 석전놀이가 유행했다. 조선시대에도 그 전통이 이어져서 척석희(擲石戱)라는 돌싸움이 민간에서 유행했다. 태조 이성계와 같은 이는 특히 척석희를 즐겨서 직 접 척석군을 모집하기도 했다. 세종 3년에 태종이 벌였던 척석희는 실록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척석군을 좌우대(左右隊)로 나누고, 잘 싸우는 자를 모집하여 이에 충당했다. 좌군은 흰 기를 세우고, 우군은 푸른 기를 세워 표지로 했는데, 서로 거리가 200여 보나 되었다. 영을 내리기를, “감히 기를 넘어가면서 끝까지 추격하지는 못한다. 기를 빼앗는 편이 이기는 것으로 하고 이긴 편은 후하게 상을 줄 것이다” 했다. 그런데 좌군은 강하고 우군은 약하여 번번이 이기지 못하니, 권희달 · 하경복이 기사(騎士)를 거느리고 공격했으나, 좌군이 굳게 막고 돌이 비 오듯 하여 희달이 돌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달아났다. 기사가 이를 분하게 여겨 고함을 치면서 추격하니, 좌군이 무너지므로 이에 흰 기를 빼앗아서 바쳤다. 상왕이 좌군 패두(牌頭) 방복생(方復生)을 불러서 말하기를, “기를 빼앗긴 것은 치욕이니, 마땅히 다시 힘을 다할 것이다” 했다. 복생 등이 용기를 분발 하여 쳐서 크게 이겼다.
이와 같은 돌싸움은 잦은 금령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으며, 이를 처음 본 외국인들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그 격렬한 분위기에 놀라기도 했다. 게다가 조선의 돌싸움에는 다른 나라와 달리 나무몽둥이까지 사용되었다.
이들 척석군은 조선시대에 정규군을 지원하는 보조부대로도 활용되었다. 태조 당시에 이미 척석군을 왜구를 잡는 데 동원한 기록이 여러 번 있으며, 세종 18년에는 북방 야인을 막는 데 척석을 사용하라는 어명이 있었다. 성종 4년에는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준비한 병선에 반드시 던지는 돌을 갖추도록 했다. 중종 5년에 부산 지역에 거주하던 왜인들과 대마도인들이 삼포왜란을 일으켰을 때는 김해 출신의 투석군이 웅천성 전투에서 가장 선봉에 서서 돌을 던져 적의 방패를 모두 부숴버렸다.

윤제

순조 11년(1881)에 평안도 출신의 홍경래가 서북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한 달 만에 관군의 반격에 밀려 정주성에 고립되었다. 관군은 정주성을 쉽게 함락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정주성 내의 반란군은 넉 달 가까이 관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저항했다. 이에 관군은 윤제, 유거, 혁거 등 다수의 공성 무기를 제작하여 정주성을 공격했다. 절도사 박기풍(朴基豊)이 만든 윤제(輪佛)는 높이가 성을 굽어 볼 정도로 높았으며, 맨 위층과 아래층을 두터운 판자와 소가죽으로 감싸서 안에 있는 병사들을 보호했다. 윤제의 맨 위층에는 조총수가 숨어 조총을 쏘았으며, 아래층에는 살수들이 숨어 있다가 성에 접근하면 계단을 타고 올라가 성 위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정주성의 반군들은 성가퀴에 의지하여 조총을 쏘고 화약과 마른 풀을 던져 윤제를 막아냈다. 유거(油車)는 나무와 소가죽으로 방호된 수레 안에 커다란 가마솥 2개를 두고 여기에 기름을 끓이다가 성 아래에 이르면 기름에 찬물을 부어 자연발화를 일으키는 화공 무기였다. 하지만 가마솥의 기름은 성에 닿기도 전에 타버렸고, 수레바퀴는 진흙에 빠져 움직이지 않았다. 혁거(華車)는 나무와 소가죽으로 방호된 수레이며, 병사들이 그 안에 숨어 성벽 아래로 접근한 뒤 성벽의 아랫돌을 빼내어 붕괴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반군의 출격으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관군은 결국 토산을 쌓고 그 뒤에서 굴토군(塊土軍)으로 하여금 성벽 아래까지 터널을 파게 하고 여기에 화약 수천 근을 묻어 폭발시킴으로써 정주성을 무너뜨리게 된다.

현렴

《풍천유향》에는 성을 방어하는 기구로서 현렴(縣購)을 설명하고 있다. 이 현렴은 삼베로 사각형의 자루를 짓고 그 안에 쇠털과 솜을 넣어 만들 며, 혹은 급한 경우에는 민간의 솜이불을 물에 적셔서 긴 장대에 꿰어 늘어뜨린다고 했다. 현렴이 물에 젖으면 화살이 뚫지 못하고 돌을 던져도 손상되지 않으며 포환도 뚫을 수가 없었다. 조선 수군의 경우에는 판옥선이나 거북선 위에 물에 적신 거적을 덮어서 적의 화살과 화공을 막았는데, 이 또한 현렴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분포

분포(糞砲)는 글자 그대로 분뇨를 발사하는 무기이다. 《민보의》에는 민병이 성을 지키는 데 사용하는 무기 중의 하나로 이 분뇨 대포를 들고 있다. 분포는 분뇨를 항아리에 모아서 휘휘 저은 뒤 대나무로 만든 커다란 물총에 넣고 나무자루에 삼베를 감아서 만든 피스톤으로 성 아래의 적에게 분사한다. 분뇨가 살상력이 있을 리는 없지만, 역겨운 냄새로 적을 괴롭히고 작은 상처라도 있는 적에게는 이차 감염을 일으키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그밖에도 《풍천유향》에는 금즙(金什)을 이용한 공격 방법이 나오는데, 이 금즙은 인분을 걸러서 1년 정도 삭힌 것으로서, 독성이 매우 강하고 냄새가 지독했다.

당약

성을 지키는 데 사용하는 독극물인 당약은 《민보의》에 그 성분이 소개되어 있다. 당약은 옻나무를 주원료로 하고, 은행(銀香), 초오(草烏), 천오(川鳥), 반하(半夏), 남성(南星) 등을 섞어 끓인 독즙이다. 이 독즙을 적에게 뿌리면 적의 피부가 곧바로 헐어버린다고 한다. 또한 정약용은 남부지방에 천금자(千金子) 혹은 속수자(續隨子)라고 하는 풀이 있는데, 이 풀의 흰 즙을 사용하면 효과가 더 크다고 했다. 천금자의 우리 이름은 등대풀이며, 수종(水睡)을 치료하는 약초지만, 독성이 있다.

운제
전쟁기념관 유물 참조 전쟁기념관 유물 참조

운제(雲佛)는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은 사다리라는 의미지만, 군사적으로는 성벽을 타고 오를 수 있게 만든 사다리 혹은 사다리차를 말한다.
신라의 사설당(四設健) 중에는 운제를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운제당(雲佛陣)이 있었으며, 고구려를 침략한 수 · 당의 군사들도 모두 운제를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는 홍경래가 정주성에서 농성하고 있던 순조 12년에 평안 병사가 운제 60여 좌를 만들어서 사용한 기록이 있다.
《무비요람》에 그려진 운제는 반으로 접을 수 있게 만든 높은 나무 사다리 밑에 전거를 달아서 병사들을 보호했다. 운제의 바퀴는 모두 6개 이고, 2장 길이의 사다리 2개가 회전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수레의 사면은 생우피로 병풍처럼 막아서 적의 화공에 대비하며, 인력으로 이 수레를 밀어서 적의 성벽으로 접근한 후 사다리를 펼친다.

충차
창공 항로와 역사군상 시리즈 참조 창공 항로와 역사군상 시리즈 참조

충차는 앞부분에 철을 장갑한 쇠망치와 같은 것을 달고 움직여 성문을 파괴하는 병기이다.

이것은 공성무기이지만 수성(守城) 측에서는 적의 운제(雲梯) 등을 파괴하는 수성병기로도 활용하였다. 신라 법흥왕대에 창설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는 법당군단에는 충차를 운용하는 특수병기 부대가 소속되어 있는데 바로 충당(衝幢)이 그것이다. 이 충당은 노당(弩幢) . 운제당(雲梯幢) . 석투당(石投幢) 등과 함게 사설당(四設幢)이라 불리웠다. 이들 부대들의 임무는 노당은 쇠뇌를, 운제당은 운제를, 충당은 충차를, 석투당은 포차를 운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목만
창공 항로와 역사군상 시리즈 참조 창공 항로와 역사군상 시리즈 참조

목만은 성벽에 병사들을 근접시킬 때 사용하는 장비로 방패의 보호를 받으며 성벽에 접근하여 땅을 파거나 성벽에 기어오른다. 기둥에 달아맨 방패는 화공을 면하기 위해 생가죽으로 만든다.

전호차
창공 항로와 역사군상 시리즈 참조 창공 항로와 역사군상 시리즈 참조

전호차는 해자나 참호를 메우는 데 사용하는 장비로 수레에 돌, 흙, 나무, 풀 등을 싣고 가 호(壕)를 메운다. 전면에 설치한 방패는 작업병과 수레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소차
창공 항로와 역사군상 시리즈 참조 창공 항로와 역사군상 시리즈 참조

소차는 이동식 망대로 성안을 관측하는 기구다.

석회

조선시대에도 현대의 최루탄이나 화학탄과 유사한 기능을 갖는 무기들이 있었다. 이 중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화학 무기는 석회(石灰)주머니이다. 생석회가 눈 등의 점막에 닿으면 물과 반응하여 열을 발생시켜 화상을 입힌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 전투에서 왜군이 조선군의 목책을 뚫고 침입해 들어오자 처영(處英) 이 거느리는 1천의 승군은 석회를 담은 주머니를 터뜨려 왜군들이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도록 하고 백병전을 벌여 물리친 바가 있다. 이 석회 주머니는 처영 장군이 임기응변으로 처음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수성 전투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무기였다.

1789년에 간행된 《재물보》에는 회병(俠播)이라고 하는 석회 가 담긴 병이 수성전에 사용된다고 했다. 또한 정약용이 지은 《민보의》 에는 취회(吹俠)라고 하여, 조개껍질 가루와 석회, 비상, 초오, 천초 동을 허풍비 (魔風輔)라고 하는 가죽자루에 담아 적에게 방사하는 방법을 제시했다.《융원필비》에 소개된 찬혈비사신무통 (鍵穴飛妙神露簡)은 처영 장군이 사용한 석회 주머니를 좀 더 정교화시킨 무기로서, 석회가루 외에도 각종 독극물을 함께 살포하여 적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주는 본격적인 화학 무기였다.

중국에서 전래된 이 찬혈비사신무통은 길이가 3척, 직경 이 3촌 7분인 대나무로 만든 통 안에 유동기름에 적신 석회와 주사(走砂), 철각비(鐵脚砒), 유황, 남성, 반하, 세신, 감수, 천오, 초오, 망사, 단홉, 파상, 반묘, 강분, 동청을 넣는다. 이 통의 사용 방법은 다음과 같다.

비면(飛趣) 20근을 취하여 노구솥에 반쯤 익도록 볶고, 그 아래에 군약(群藥)을 마찬가지로 볶아서 준비한다. 병사가 적과 근접하여 싸울 때 가죽 자루에 이를 가득 담아 양손에 들고, 등에는 찬혈비사신무통을 숨겨 지닌다. 순풍이 불어 이것이 날아가고 적이 이 모래에 닿으면 오공으로 모래가 파고 들어가 구멍이 뚫려 피가 솟고 골수가 흐르며, 서 있는 자는 곧 정신이 혼미해져 땅에 쓰러지고 두 눈은 먼다. 이 찬혈비사신무통은 《군기색중기》에도 보유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