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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성곽의 개요

반파유적 해자 반파유적 해자

성곽(城郭)은 집단의 공동목적과 더불어 군사상의 방어 임무를 가지고 축조된 공간으로 본래 내성(內城)만을 뜻하는 성(城)과 외성(外城)을 가리키는 곽(郭)의 합성어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곽은 거주 주체의 일정한 공동 활동공간을 확보하고 그 구조물이 연결성을 갖는 건조물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에서 거주지역에 방어시설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앙소문화기(仰韶文化期)로 보고 있다.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의 반포유적[半坡遺蹟]에는 씨족원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거주지역 바깥에 토벽과 해자가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를 이은 신석기 후반 용산문화기 것으로 보이는 직사각형으로 판축된 성벽이 발굴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성곽도시의 건설이 시작된 것으로 간주된다. 또 황허[黃河]의 남안에 소재한 허난성[河南省] 정저우 유적[鄭州遺蹟]에서는 은허(殷墟)보다 오래된 시대에 축성된 성벽이 발견되었다. 이 정저우성은 궁전구역 외에 귀족에서 서민에 이르는 사람들의 거주구역과 각종의 기물제작소를 포함한 지역에 성벽을 축조해 이루어진다. 이 성은 도성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평지의 하천을 비롯한 자연지형을 방어 용도로 한껏 이용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은나라와 주나라 때는 각지에 성곽이 축조되었는데 모두 읍에 있었다. 특별히 전쟁용으로 축조된 것은 아니지만 외적을 방어하기 쉽게 〈시경〉에 보이는 것과 같이 높은 지대에 자리 잡기도 했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에 접어들어 철기가 실용화되고 그것이 보급·발전됨에 따라 농업을 비롯한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 같은 경제의 발전은 당연히 각국의 영토확대를 촉진시켜 읍제 국가에서 영토적 국가로 변하게 했다. 이는 말할 나위 없이 각국 사이에 군사적 경쟁을 촉진시켰는데, 이에 따라 많은 성곽들이 축조되었다. 이 성읍들은 정치군사적 기능 외에 경제적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성읍의 입지는 교통과 물자의 운반에 편리한 강 근처에 축조되었다.
한나라가 들어선 후 지방행정은 군국제(郡國制)였는데, 성의 구조와 성격은 이전의 시대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한나라는 북방의 이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진나라 때 축조된 만리장성을 수비하고 관리하는 데 각별히 힘을 기울였다. 후한시대에 접어들어 호족들도 성을 쌓게 됨에 따라 중국 고대의 성제(城制)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도성으로서 가장 정비된 형태는 북위의 낙양성(洛陽城)이다. 낙양성은 시가지가 바둑판 모양으로 정연하게 구획되었고, 외성과 내성 및 궁성이라는 3개의 구조로 정비되었다. 이러한 구조의 성곽 양식은 수나라와 당나라뿐 아니라 우리나라 삼국에도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