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발해 건국전쟁 - 고구려,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프롤로그

1부
건국전쟁
발해, 새로운 제국의 탄생























프롤로그


668년.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항복으로...

수백 년 동안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며 웅장한 세력을 떨치던 대제국 고구려가 무너진다..

이후..

세계제국을 꿈꾸던 당나라는 고구려 지역에 대한 실질적 지배를 강화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 첫 걸음으로 요동도안무사 유인궤가 고구려 복속의 총책임자로 결정되고 안동도호 설인귀가 평양에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고구려 지배정책이 펼쳐지게 되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반발을 누르고 옛 고구려 세력을 해체하기 위해 당나라지배에 걸림돌이 되는 고구려의 유력한 세력들을 당나라 내지의 황무지로 강제 이주시킨다.
고구려의 유력한 민호 28,200호를 비롯하여 수레⋅소⋅말⋅낙타를 산동반도와 요녕성의 조양을 경유하여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시켜 결과적으로 원래 고구려 지역에는 빈약자들만 남겨지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으로부터 내몰림을 당한 고구려 유민들은 산동반도와 요녕성을 경유하여 강서성 일대 및 장안성 서쪽의 감숙성⋅청해성 일대, 곧 당나라의 서부와 남부 변경지대의 황무지로 옮겨져 낯선 땅에서 고달프고 처참한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강제 이주를 통해 고구려의 유력자들을 몰락시키려는 계획은 고구려 전지역에 불안과 동요를 파급시켰고 급기야 당나라에 대한 적극적인 도전과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고구려는 보장왕의 항복으로 중앙 정부만 무너졌을 뿐, 지방 정부나 각 성들은 여전히 독립적으로 당과 전쟁을 계속하고 있던 형편이었다.
당나라 군대에 투항하거나 점령당한 성은 불과 14개에 지나지 않았고, 교전 중이거나 당군을 피해 백성들이 이동한 성이 모두 18개라는 사실은 당나라 군대가 압록강 이북에서 장악한 성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사실...

전쟁터인 요동 지역과 평양성 남부 지역을 제외한 만주와 동북부 지역은 당나라 군대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못했으며, 이 지역은 고구려인들에 의해서 자치적으로 다스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정권이 몰락하고 아직 당나라의 수중에 완전히 장악되지 않은 옛 고구려의 영토에는 세계제국인 당나라와 경쟁하여 이 지역을 패권을 차지할 수 있는 숨은 세력들이 웅크리고 있었고 이들은 향후 전개될 동북아 패권전쟁의 불씨이자 발해 건국의 토대가 된다.

1장, 고구려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1절, 당나라의 고구려복속정책과 고구려유민들의 반발

1부 건국전쟁 - 발해, 새로운 제국의 탄생

1장 고구려,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1절 당나라의 고구려복속정책과 고구려유민들의 반발

668년 고구려의 보장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당나라는 이후 본격적으로 지배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당나라는 먼저 옛 고구려 지역에 9도독부 42주 100현을 설치하여 당나라의 통치체제 속으로 편입시켰고,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점령지역 전체를 통괄하게 하였다. 안동도호부의 책임자로는 설인귀(薛仁貴)가 임명되었다. 설인귀는 고구려와의 숱한 전쟁을 통해 성장한 장수로 이미 658년에 당나라의 장수로 고구려를 침공한 적이 있으며 667년 9월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파병된 50만 대군의 부사령관으로 참전할 정도로 옛 고구려의 인물들과 지역적 정세에 밝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다스리는 적임자로 선택된 것이다.
당나라는 설인귀를 안동도호로 삼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함과 동시에 고구려세력의 중심이었던 유력한 지방의 민호 2만 8,000여 호를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분산시켜 고구려의 유민세력 약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이러한 강압적 지배정책은 오랫동안 대국인 당나라와의 전쟁과 대결을 통해 불굴의 투지를 내재화해왔던 고구려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왔다. 고구려지역 전역에 당나라에 대한 직.간접의 저항이 불길처럼 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평양성이 함락된 이후 안시성.요동성.신성 등 압록강 이북지역에서만 해도 11개의 큰 성들이 항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저항하였으며 적리성 등 7개의 성 주민들은 당나라 군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피함으로써 당나라의 통치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소극적 저항을 벌였다. 뒤에 지속적인 고구려부흥운동의 한 주체세력이었던 보장왕의 아들 안승(安勝)도 이들처럼 당나라 군대의 손길을 피해 유민 4천여 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하여 사야도(史冶島, 지금의 德積群島 중의 蘇爺島)에 머물고 있었다.(669년)
이처럼 고구려지역의 유민들은 항복하지 않고 당나라군과 계속 전쟁을 하는 등 적극적인 저항을 벌이거나 그들의 간섭을 피해 당나라군의 세력범위 밖으로 피하는 등의 소극적인 저항을 통해 당나라의 고구려복속정책을 무력화시켜 나갔다.
고구려 멸망 직후 당나라에 대한 고구려유민들의 저항이 옛 고구려의 전지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이어져 오다가 그 이듬해인 669년에 들어오면서부터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고구려 부흥운동이 전개된다.

1장, 고구려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2절, 대당 저항운동의 상징 검모잠

1부 건국전쟁 - 발해, 새로운 제국의 탄생

1장 고구려,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2절 대당 저항운동의 상징 검모잠(劒牟岑)

당나라에 저항하는 고구려유민들의 세력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은 고구려 대형(大兄) 출신이었던 검모잠의 세력이었다.
검모잠은 수림성(水臨城, 지금의 황해도 평산 협계) 출신으로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 대형의 벼슬에 올랐었다. 대형은 고구려 14관등 중 7번째의 서열로 검모잠은 촉망받던 중견관리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또한 수림성의 유력한 호족의 맏아들로 태어난 검모잠은 두터운 신의와 용맹함으로 주변에 깊은 신뢰를 받았으며 덕망이 높아 주변에는 항상 그의 휘하에 머물기를 원했던 용맹한 젊은 장수들로 넘쳐났던 인물이다.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무너지자 울분을 삼키며 고향인 수림성에 깊이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당나라가 고구려 멸망 초기에 고구려 출신의 협력적 지방호족들을 중용했던 것과는 달리 옛 고구려 지역에 대한 실질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직접 중앙의 당나라 관리와 군사를 각 주와 현에 파견하면서부터 고구려유민들과의 크고 작은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검모잠이 은신해 있던 황해도 지역은 고구려 옛 영토 전체를 관할하던 평양도호부 이남으로 신라와 인접해 있어 비교적 당나라 중앙의 통제와 간섭이 강하지 않았던 지역이었으나 점차 중앙의 관리들이 파견되면서부터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옛 고구려 각 지역으로부터 당나라의 통제를 피하기 위해 신라에 인접한 이 지역으로 이주해 있던 유력 호족들에게 당나라관리의 직접 통제는 매우 심각한 불만의 대상이었다. 여기에 노골적으로 지역민들을 착취하는 탐관오리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이 지역 고구려유민들의 불만이 차츰 고조되어 갔다. 이러한 불만은 서서히 고구려부흥에의 열망으로 옮아가기 시작했다.
평소 사냥을 통해 당나라의 감시와 통제를 피해 긴밀한 유대를 이어오던 이 지역의 유력호족들은 본격적으로 당나라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이 논의의 중심에 검모잠이 있었다.
검모잠을 추종하던 젊은 장수들은 지략과 용맹함을 겸비한 검모잠을 고구려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추대했고 인근의 다른 호족들도 이에 동의하면서 고구려 부흥을 위한 대당전쟁이 준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피신해 왔던 호족세력들과의 연대가 이루어지면서 이 저항세력의 규모는 산발적으로 당나라에 저항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세력으로 준비되어 갔다.
고구려부흥운동의 지도자로 추대를 받은 검모잠은 이 지역 호족들의 지도자 추대 제안을 수락하면서 내심 이 세력을 당나라와의 전면 전쟁을 통해 옛 고구려를 완전히 회복하는 기반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수.당대에 걸쳐 수십만 대군의 침략전쟁을 결연히 물리쳐 냈고 900년 동안 저 광활한 대륙의 한 부분을 호령해왔던 선조들의 기개와 용맹을 가슴에 품고 있던 검모잠에게 당나라의 고구려 지배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던 것이다. 검모잠은 황해도 지역의 저항세력을 중심으로 옛 고구려의 각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저항운동을 펼치고 있는 세력들을 한 곳에 모은다면 다시 한 번 고구려의 운명을 걸고 대국 당나라와의 전면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꿈을 갖고 대당전쟁의 첫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지략이 뛰어난 검모잠은 그를 추종하던 세력들을 동원해 황해도 각 지역의 당나라 거점들을 일시에 공격.점령해야만 황해도 일대를 당나라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음을 휘하 장수들에게 주지시키고 치밀한 작전계획을 통해 각각의 장수들에게 역할 분담을 시켰다. 거사의 시점으로 삼은 것은 당나라 황제의 칙사로서 신라를 향해 남하하고 있던 승려 법안(法安)이 황해도의 궁모성(窮牟城, 지금의 황해도 서흥)에 머물고 있던 때였다. 검모잠은 친히 가장 총애하던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이끌고 궁모성에 주둔하던 당나라 관병들을 처단함과 동시에 법안을 살해함으로써 당나라에 대한 봉기의 출발을 알렸다. 이를 신호로 각 지역의 호족들이 지역 내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의 관리 및 군사들을 일시에 제거함으로써 봉기가 완결되었고 이를 계기로 당나라에 대한 저항운동의 거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검모잠은 궁모성을 장악하여 이곳에 주둔함으로써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군대와의 저항전선을 형성함과 동시에 황제를 대신하고 있던 칙사 법안을 죽임으로써 저항운동의 궁극적 목적이 당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옛 고구려의 영토를 완전히 회복하는 데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로 삼았다.
일단 검모잠의 봉기가 성공하자 그 동안 미온적 태도를 보였던 황해도 지역 내의 호족들이 하나 둘씩 고구려부흥운동에 가세하면서 검모잠의 저항세력은 급격히 확장되기 시작했다. 세력이 점점 커지게 되자 검모잠은 궁모성으로부터 패수(浿水, 지금의 대동강) 남쪽인 한성(漢城, 지금의 황해도 재령)으로 거점을 북상시켜 패수 이남 지역을 완전히 장악함과 동시에 본격적인 대당 전쟁을 위한 전선을 형성해 나갔다.
또한 검모잠은 서해안에 있는 섬 가운데 하나인 사야도(史冶島)에 보장왕의 아들 안승(安勝)이 내려와 피신하고 있음 알게 되자 그를 한성으로 맞아들여 고구려의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고구려왕실을 복원하였고 이로써 명실상부하게 고구려복원운동이 본격적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검모잠은 안승을 왕으로 세움으로써 국가체제의 모양을 갖추게 되자 그들의 배후에 있던 신라에 심복인 다식(多式) 등을 파견하여 대당 전쟁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신라의 문무왕은 사찬(沙飡)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삼았다.(670년)
당나라가 신라와 함께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시킨 이후에 본격적으로 신라를 노리기 시작하고 있던 시점에서 이들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은 신라로써는 당나라의 동진을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어서 신라로써는 이들에 대한 지원이 곧 자신의 안위를 위한 가장 경제적인 정책이기도 했던 것이다.
검모잠은 고구려왕인 안승을 중심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고구려 지역에서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나갔다. 이처럼 고구려 부흥운동의 구심점이 형성되자 한반도 이외의 옛 고구려 각지에서 당나라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키는 고구려유민 세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당나라 저항의 성지인 안시성에서처럼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나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안시성을 완전히 점령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삼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옛 고구려의 완전한 복원이라는 검모잠의 원대한 웅지가 점차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