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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등주공격 - 장문휴의 등주 원정

1장, 장문휴의 등주 원정/ 1절, 발해 등주 공격의 배경

발해의 등주 공격

1장. 발해, 등주 공격의 배경


발해가 732년 당의 등주(지금의 중국 산동성 봉래시)를 공격하였던 사건은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선제공격의 하나였다. 이 사건은 일반적으로 발해의 세력 확장을 꺼린 흑수말갈이 당과 결탁한 데 따른 발해의 위기감이 표출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당시 발해는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군사적으로도 약소국인 발해가 당을 공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나 명분상으로도 매우 곤란한 문제였다. 또한 당은 발해를 공격하기 위하여 신라에 참전을 요구하였고, 신라는 그 대가로 대동강 이남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이처럼 발해의 등주 공격을 전후해서 흑수말갈과 신라 등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발해와 당의 관계를 넘어서 당시 동아시아세계의 국제관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편 발해가 등주를 공격하기 직전까지 발해와 당은 발해 무왕의 동생 대문예의 처벌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문예는 흑수말갈을 토벌하려는 무왕에 반대하여 당으로 망명하였다. 지배체제가 아직 확립되지 않은 발해 초기의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국왕의 동생인 대문예가 망명한 원인은 외교노선상의 의견 대립을 넘어 좀더 정치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대체로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대내적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대외전쟁을 벌이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2장, 장문휴의 등주 원정/ 1절, 당과 발해의 국교 수립 과정

발해의 등주 공격

2장. 당과 발해의 국교 수립 과정


고구려의 멸망 이후 많은 고구려 유민은 당의 내륙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과거 고구려 세력권에 포함되었던 말갈족과 함께 요서지역의 영주(지금의 요녕성 조양)에 거주하였다. 영주는 당의 동북방면의 요충지로서 이곳에는 거란족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다. 당은 이민족을 기미주로 편제하여 집단적으로 거주시키되 정치적 통합을 못하도록 분리 통치하였다. 그 위에 이들을 총괄하기 위하여 당의 관리가 파견되었는데, 이러한 지배방식을 기미지배라고 부른다.
696년 5월 당 관리의 학정에 못견딘 거란족이 이진충을 중심으로 봉기하였다. 이른바 이진충의 난이 발발한 것이다. 이진충의 거란군은 순식간에 영주를 점령하고 하북지역까지 세력을 뻗쳤다. 이진충의 난은 700년까지 지속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당은 동북 방면의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곧 당의 기미지배가 붕괴한 것이다.
당은 자력으로 이진충의 난을 진압할 수 없어 북아시아에서 세력을 떨치던 돌궐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영주에 거주하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대조영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며 요동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대조영은 698년 당의 토벌군을 천문령(지금의 길림합달령)에서 격파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과거 고구려 영역을 지배하던 안동도호부는 698년 안동도독부로 축소되어 요동 지역만을 관할하기에 이르렀다.
대조영은 이후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모산(지금의 길림성 돈화 부근)에서 나라를 건국하였다. 처음에는 진(振)이라 자칭하였으나, 713년 대조영이 당으로부터 발해군왕에 책봉됨으로써 국호를 발해로 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엄밀하게는 698년부터 713년까지는 진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편의상 발해로 통칭하기로 한다.
당은 천문령 패배 이후에도 발해의 건국집단을 토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거란이 돌궐에 복속되어 도로가 차단되었으므로 당은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이처럼 당은 발해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해는 곧바로 당과 대립하던 돌궐과 통교하였다. 또한 발해는 신라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당시 신라는 나당전쟁의 앙금으로 당과 국교가 실질적으로 단절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신라는 대조영에게 신라의 제5관등인 대아찬을 제수하였다.
발해는 이로써 대외적 안정을 확보하고 고구려 멸망 이후 분산된 세력들을 규합하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반면 당은 이진충의 난 이후 상실한 영주 지역을 거란으로부터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당은 705년 장행급을 파견하여 발해를 위무하였다. 이는 당이 발해에 대한 토벌 방침을 취소하고 그 실체를 인정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당의 태도 변화는 거란의 배후에 위치하면서 점차 발전해 나가는 발해를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파악된다. 당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 대조영은 아들을 인질로 파견하였다. 이제 양국이 국교를 맺기 위해서는 형식적으로 발해가 당의 책봉을 받는 절차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돌궐과 거란이 매년 당의 변방을 침략함으로써 양국의 국교 수립은 지연되었다.
결국 당은 돌궐과 화친을 맺은 후 713년에 발해와 국교를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전해에 당은 거란과 해(奚)를 공격하였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침공을 받았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은 거란을 물리치고 영주를 회복하기 위해서 발해를 끌어들일 필요성이 더욱 높아졌던 것이다. 그런데 발해는 당의 책봉에 앞서 먼저 711년 11월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발해 또한 국제관계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3장, 장문휴의 등주 원정/ 1절, 당과 흑수말갈의 밀착

발해의 등주 공격

3장. 당과 흑수말갈의 밀착


발해는 당과 국교를 수립한 이후 대외적 안정 속에서 주변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그 대상은 주로 과거 고구려 영역과 말갈 지역이었다. 건국 시조인 고왕 대조영대에는 도읍지인 동모산 일대를 중심으로 과거 고구려 영역 가운데 당의 안동도호부가 관할하는 요동 지역과 나당전쟁 이후 군사적 완충지대가 된 평양일대를 제외한 지역, 즉 압록강과 혼강 이서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고왕을 뒤이어 719년 무왕 대무예가 즉위하였다. 그는 ‘무왕’이라는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활발하게 주변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신라가 712년에 즉위한 성덕왕대부터 이전과 달리 대당외교를 적극적으로 나선 데에는 북방의 발해의 동향과 무관치 않다. 또한 721년에는 하슬라(지금의 강릉) 지역의 장정 이천명을 동원하여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았다. 이 장성은 함경남도 영흥군에 비정된다는 점에서 그 목적이 발해의 세력 확장에 대한 신라의 대비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발해는 동북방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주변의 말갈족들을 복속시켰다. 발해의 배후에는 불녈말갈, 월희말갈, 철리말갈, 흑수말갈 등이 있었다. 발해를 비롯하여 말갈족들이 처한 자연지리적 조건하에서 삼림은 풍부하지만 농경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반농반렵 생활을 영위하면서 필요한 물자는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얻을 수밖에 없었다. 발해와 말갈족들이 당과 활발하게 통교한 원인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말갈족들이 당과 접촉하기 위해서는 발해를 경유해야만 하였고, 그 과정에서 발해 사신이 동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를 통해 발해는 말갈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불녈․월희․철리말갈은 714년부터 당과 교섭한 반면, 흑수말갈은 722년 처음으로 당과 교섭하였다. 송화강 하류에 위치한 흑수말갈은 6세기 무렵 대부분의 말갈족이 고구려에 신속하고 있었을 때도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흑수말갈은 다른 말갈족과 달리 뒤늦게 발해의 세력권하에 포섭되었음을 알 수 있다. 725년 안동도호 설태가 흑수말갈을 기미주로 편제하고, 당의 관리를 파견하여 이를 관장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 제안은 이듬해 실행되었다. 이는 물론 당나라의 일방적인 조치만은 아니었다. 발해의 세력확장에 반발한 흑수말갈의 동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당나라가 흑수말갈에 주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8세기 초반 당은 북아시아에서 돌궐과 대립하면서, 동북방면에서는 돌궐에 종속되었던 거란과 국지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은 발해와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요동지역을 안정시키고 이를 통해 배후에서 거란을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돌궐이 묵철가한(691~716) 말기에 쇠약해지자 거란은 716년 당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당은 영주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가가한(716~733)이 내분을 수습하면서 세력을 회복하자, 거란은 다시 돌궐에 복속되었다.
720년 9월 당은 발해에 사신을 보내어 거란 토벌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이에 호응하지 않았다. 발해가 당과 국교를 맺었지만 돌궐과 국교를 단절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왕 대무예는 대조영에 대해 고왕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발해가 당의 책봉을 받았음에도 독자적인 노선을 견지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당의 입장에서 볼 때 발해는 당의 외신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저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당으로서는 발해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흑수말갈에 기미주를 설치할 것을 건의한 설태는 720년 거란 토벌에 나섰다가 오히려 생포된 장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준다.

4장, 장문휴의 등주 원정/ 1절, 흑수말갈 토벌을 둘러싼 발해 지배층의 의견 대립

발해의 등주 공격

4장. 흑수말갈 토벌을 둘러싼 발해 지배층의 의견 대립


흑수말갈은 당에 접근하기 이전에 돌궐에 토둔을 요청하였다. 토둔은 돌궐이 복속시킨 종족에게 설치한 관직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흑수말갈은 발해에 먼저 통보하고 함께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즉 말갈족과 당의 교류 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발해는 흑수말갈에 대해 관여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수말갈이 독자적으로 당과 결탁한 까닭은 발해의 세력 확장을 돌궐이 보호해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흑수말갈과 당의 결탁 과정에서 발해가 배제되었기 때문에, 무왕은 이를 양자가 앞뒤에서 발해를 공격하려는 의도로 파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흑수말갈에 대한 당의 접근은 발해에 복속된 말갈족에 대한 당의 영향력의 침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주변 말갈족을 복속함으로써 국가의 기틀을 마련해 가던 발해에게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점에서 무왕은 흑수말갈을 토벌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런데 발해의 지배층이 모두 무왕에 동조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흑수말갈 토벌은 필연적으로 당과의 전쟁을 야기하기 때문이었다. 이 점을 우려하였던 것은 바로 무왕의 동생인 대문예였다. 그는 옛날 강성했던 고구려도 당에 대적하다가 하루아침에 망해버렸는데, 고구려보다 몇배나 국력이 약한 발해가 당과 대적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대문예는 일찍이 당나라에 숙위로 파견되어 오랫동안 머무르다 귀국하였다. 따라서 대문예로서는 나름대로 당의 국력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약소국인 발해가 흑수말갈을 공격함으로써 야기되는 당과의 전쟁만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무왕 대무예와 대문예의 의견 차이가 단지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이 시기 발해의 지배층은 대당외교노선을 둘러싸고 각각 무왕과 대문예로 대표되는 강경파와 온건파로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 당은 돌궐과 대립하고 있었다. 발해는 초기에는 당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돌궐과 친선을 도모하였다. 비록 당과 국교를 맺었다고 해서 돌궐과의 관계를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무왕이 대당강경책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돌궐 및 거란과의 제휴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5장, 장문휴의 등주 원정/ 1절, 대문예의 망명과 이를 둘러싼 외교전

발해의 등주 공격

5장. 대문예의 망명과 이를 둘러싼 외교전


발해 지배층 내부의 외교노선상의 차이는 726년 무왕이 흑수말갈 토벌을 강행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흑수말갈 토벌의 사령관으로 대문예가 파견되었다. 그런데 대문예는 국경에 이르러 다시 토벌 불가의 상소를 올렸다. 전쟁터에 나간 장수가 다시 전쟁 불가론을 제기하자, 무왕은 진노하여 종형 대일하를 파견하고 대문예를 소환하였다. 대문예는 소환령이 자신의 처벌을 의미함을 알고 곧바로 당으로 달아났다.
대문예 대신 파견된 대일하가 흑수말갈을 토벌한 결과 당분간 흑수말갈은 물론이고 다른 말갈족과 당의 교류는 중단되었다. 무왕은 흑수말갈의 토벌과 함께 당으로 망명한 대문예의 송환을 당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이 이에 응할 리는 없었다. 당으로서는 오히려 발해 지배층의 내분을 반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왕이 대문예의 송환 및 처벌을 요구하자, 당나라는 일단 발해의 집요한 요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를 유배보냈다고 거짓으로 통고하였다. 그러나 당의 거짓은 곧 발각되었고 무왕은 재차 당에 항의하였다. 당은 기밀 누설의 책임으로 담당 관리를 좌천시키고, 대문예를 유배보냈다. 이처럼 발해의 집요한 요구에 당은 변명으로 일관하는 등 명분상 수세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732년 7월에 보낸 국서에서 당의 태도는 일변하였다. 당은 형제지간의 우애라는 측면에서 대문예에 대한 처벌 요구를 중단하도록 설득하는 한편, 발해가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해오면 무력 응징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드러내었다. 이처럼 당이 강경하게 나설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서 728년에 발생한 두 사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당이 다시 흑수말갈과 결탁하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왕의 큰아들 대도리행이 당에 숙위로 있던 중에 사망한 것이다.
728년 1월 흑수말갈이 사신을 파견하자, 당은 흑수말갈의 추장에게 이헌성(李獻誠)이라는 중국식 성명의 하사와 함께 운휘장군 겸 흑수경략사를 제수하고, 유주도독의 관할하에 두었다. 726년 발해의 흑수말갈 토벌에도 불구하고 2년만에 당이 다시 흑수말갈과 결탁함으로써 발해는 대외적 위기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한편 728년 4월에 사망한 대도리행은 720년 계루군왕에 봉해진 발해의 왕위계승자였다. 왕위계승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필연적으로 왕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다. 이 점에서 무왕이 그토록 집요하게 대문예를 처벌하려는 의도를 외교노선상의 의견 대립에서 벗어나 발해의 내부 문제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발해는 건국한 지 30년밖에 안된 상황이었고, 국왕 자신도 건국집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아직 왕권 자체가 확고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왕위의 부자계승도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왕과 마찬가지로 건국 과정에 참여하였던 대문예의 경우 왕의 동생이라는 점에서 왕위계승을 주장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무왕과 대문예간에는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외교노선상의 차이를 계기로 폭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문예가 당으로 망명한 것은 어쩌면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728년 무왕의 큰 아들인 대도리행이 당에 숙위로 있던 중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그의 사망은 무왕의 동생인 대문예에게 왕위계승의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게다가 대문예는 당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이 무력 응징의 뜻을 드러낸 것은 결국 대문예로 왕을 교체하겠다는 일종의 협박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왕은 지배층의 분열을 방지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차원에서 대문예의 처벌에 그토록 집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장, 장문휴의 등주 원정/ 1절, 발해의 등주 공격

발해의 등주 공격

6장. 발해의 등주 공격


이처럼 발해는 흑수말갈과 당의 밀착에 따라 대외적으로 위기에 처하였고, 내부적으로 왕위계승을 둘러싼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 외교노선상의 차이를 매개로 증폭되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위기를 무왕은 등주 공격으로 돌파하였다.
공략의 대상이 된 등주(登州 ; 지금의 봉래)는 산동반도에 있는 당나라의 국제무역항이었다.
발해의 왕 대무예는 육로를 통해 군사를 이동시킨다면 곧 당나라에서 눈치를 채고 준비할 것이기 때문에 수적으로 열세인 발해군의 승리를 기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기습전을 모색했다. 은밀히 군사를 이동시켜 기습을 통한 군사적 타격을 주기 위해 발해만을 통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산동반도의 등주를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
등주는 산둥반도 북부 해안, 묘도해협(廟島海峽)에 면한 항구도시로 발해와 신라의 해상교역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신라는 대체로 바닷길을 통해 당나라와 교역하였는데 예성강.당은포에서 출발하여 황해를 가로질러 등주에 이르는 항로는 비교적 일찍부터 개척되었었다. 신라는 해로를 통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당나라와의 사신왕래, 유학생 왕래, 교역 등의 편의를 위해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는 초입인 이곳 등주에 사신.상인.유학생들을 위해 신라방, 신라소, 신라관 등을 지어 머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많은 신라인들이 머물기도 하였다.
발해 또한 등주를 통한 당나라와의 해상교역로를 일찍부터 이용해 왔다.
발해는 주로 영주(營州)를 통하는 육로를 택하지 않고 신주(神州)를 거쳐 압록강 어귀에 이르러 바닷길로 산동반도의 등주(登州)에 상륙했다. 여기서 다시 청주, 혹은 운주를 거쳐 당의 수도 장안으로 들어갔다. 발해는 이러한 주요교역 요충지인 등주에 신라처럼 발해관(渤海館)을 두어 운영하기도 했다.
이처럼 한반도와의 교역 요충지인 등주는 중국에 의해서도 주요한 무역로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진출의 군사적 요충지로도 긴요하게 활용되었다. 대체로 중국 수군의 출병지가 바로 이 등주였던 것이다.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발해를 공격할 때 바로 이 등주에서 바다를 건너 덕적도로 진군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내용이다. 이에 앞서 수나라 문제가 영양왕 9년(598년)에 육.해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할 때 수군총관 주라후(周羅喉)도 등주에서 바로 황해를 횡단하여 평양으로 침공하기도 했다. 수나라 양제의 제 2차 고구려 침략이나 당나라 태종과 고종의 고구려.발해 침공도 등주로부터 출발하는 황해횡단항로를 이용하였다.
이와 같이 등주는 중국의 세력이 한반도로 진출하거나 한반도에서 중국의 중앙으로 들어가는 데 있어 반드시 거쳐야만 될 경제적.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발해의 왕 대무예는 오랜 동안 중국의 한반도 침략의 거점이었던 등주를 오히려 당나라 공략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는 오랜 수난의 역사에 대한 응보였을 뿐 아니라 당나라 수도인 장안까지 진격하여 정벌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해로를 통해 당나라의 등주를 공격하기로 결심한 대무예는 이 계획을 은밀하고 지속적으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대무예는 등주정벌의 적임자로 발해 제일의 수장(水將) 장문휴(張文休)를 지목했다.
장문휴의 가문은 옛 고구려 시절 가장 큰 해상세력을 구축했던 집안 출신의 장수였다. 그의 가문은 고구려 멸망 이후 비록 세력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발해만 일대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장문휴 또한 젊은 시절 한반도 서해안에 횡행하던 해적들을 제압하며 수전(水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쌓았던 백전노장이었다. 대문예는 이러한 장문휴의 해전 능력과 발해만 일대에 미치고 있던 영향력이야말로 등주를 공격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732년 9월.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구국의 대무예로부터 출진의 명이 떨어지자 장문휴를 필두로 하는 2만 5천의 정벌군이 드디어 대당전쟁을 위한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해풍을 타고 순조롭게 발해만을 건넌 장문휴의 함대는 등주 해상에서 함진을 구축했다. 장문휴는 우선 5백의 선발대를 야음을 틈타 해안에 침투시켰다.
등주는 오랜 동안 해상활동을 하던 해적들의 침략을 받아 해상 경비에 소홀하지 않은 항구였다. 장문휴의 5백 선발대는 당나라 해안 경비대의 감시를 피해 비교적 경비가 삼엄하지 않은 해안 북쪽의 절벽을 이용했다.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쳐진 북쪽 해안은 자연방벽으로 이루어져 달리 경비가 세워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여의 혹독한 침투훈련으로 단련된 선발대에게 깎아지른 절벽은 그리 커다란 장애가 될 수 없었다. 야음을 틈타 절벽을 기어오른 선발대는 한 명의 낙오도 없이 순식간에 해안선으로 역침투하여 당나라 경비대와 항구를 점령했다.
해안 침투가 성공한 뒤 12발의 신호탄이 야음에 젖어 있던 밤하늘에 떠오르자 드디어 2만 5천의 정벌군이 등주항에 상륙하고 별다른 피해 없이 등주정벌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장문휴는 등주해안에 상륙한 뒤 병사들에게 잠시의 휴식을 취하게 하고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 전군에 진군명령을 하달했다.
이른 새벽, 잠이 채 깨기도 전에 발해대군의 진군 소식을 전해들은 등주자사(登州刺使) 위준(韋俊)은 급히 군세를 모아 이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인근의 수비병이 채 집결하기도 전에 밀어닥친 장문휴의 선발대에 의해 대부분의 수비병들이 전사하고 후일을 도모하고 달아나던 위준은 발해 추격병들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게 된다.
이로써 발해정벌군은 채 한나절도 걸리지 않고 별다른 피해 없이 대륙진출의 교두보인 등주를 함락시키게 되었다.

발해의 수군으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은 당은 이듬해 본격적으로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곧 733년 1월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의 병사를 징발하여 발해를 공격하는 한편, 신라도 발해를 공격케 하는 협공작전을 구사하였다.
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나라는 일체의 교류를 끊고 있었지만 현종은 발해를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신라와의 양동작전이 필요하다는 판단하에 볼모로 장안에 와있던 신라의 김사란(金思蘭)을 귀국시켜 신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발해의 남쪽을 치도록 하였다.
신라에서는 발해를 치는 대신 대동강 이남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보장한다는 당나라 현종의 밀약을 믿고 김윤중, 김윤문 등 4명의 장군들에게 군사를 이끌고 발해의 남쪽 경계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으나 겨울에 출병하여 추운 날씨와 험한 도로 사정으로 군사의 절반 이상이 사망하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7장, 장문휴의 등주 원정/ 1절, 대문예 암살 계획

발해의 등주 공격

7장. 대문예 암살 계획


당의 토벌 사령관으로 대문예가 임명되었던 사실은 발해에 있어서 왕명을 어기고 당으로 망명한 사실보다 더 큰 반역행위에 해당한다. 때문에 무왕은 자객을 동원하여 대문예 암살을 시도하였다.
당시 대문예는 당나라의 동도(東都)인 낙양에 머물고 있었으며 오랜 망명생활로 인해 의기소침해 있던 상태였다. 자객들은 낙양의 천진교(天津橋) 남단에서 대무예를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대문예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대문예 암살 미수 이후 발해는 다시 마도산(하북성 산해관 부근)을 공격하였다.
이번의 당나라 공격은 당시 돌궐과 거란이 당과 대립하는 형세하에서 이루어졌다. 이 무렵 거란도 내부적으로 정쟁이 발생한 결과 해와 함께 돌궐에 투항하여 730년부터 당을 공격하고 있었다. 특히 거란이 733년 윤3월에는 유관도산에서 당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이곳은 곧 마도산과 동일한 지역이었다. 즉 발해는 거란을 지원하여 마도산에서 당과 격돌한 것이었다.
그러나 발해, 돌궐, 거란의 연합세력의 도산공략은 연합세력의 한 축인 거란군이 당나라 토벌군에게 섬멸되면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2년여에 걸친 발해의 대당 정벌은 비록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발해 내부적으로는 친당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를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한 무왕 대무예는 왕조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을 만큼을 튼튼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다.

8장, 장문휴의 등주 원정/ 1절, 대당전쟁 그 후

발해의 등주 공격

8장. 대당전쟁 그 후


발해의 등주 공격으로 흑수말갈은 741년까지 당과 접촉이 중단되었다. 무왕은 대내적으로 대문예로 대표되는 온건파를 배제하고 권력 강화를 도모하였다. 특히 망명한 대문예가 당의 군대를 이끌고 발해를 공격한 사실은 무왕이 대내적으로 대문예를 지지하는 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좋은 명분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발해의 지원세력이었던 돌궐은 734년부터 붕괴되기 시작하여, 그 결과 거란과 해가 당에 복속되었다. 또한 신라는 이 무렵 단독으로 발해를 공격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처럼 국제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감에 따라 발해도 더 이상 대당강경책을 지속할 수 없었다. 736년 돌궐이 거란과 해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한 사신을 발해가 억류하고 당에 알린 사실이나, 발해가 당의 포로를 송환하고 당은 억류하던 발해의 사신을 방면한 사실들은 양국의 화해 분위기를 전해준다.
한편 발해의 등주 공격에 신라가 참전한 대가로 735년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영유권을 인정받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발해의 건국 초기에 발해와 신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발해의 세력 확장에 따라 신라는 점차 발해에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발해가 727년에 일본과 국교를 수립한 까닭은 신라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었다. 이처럼 양국간의 잠재적인 대립 의식은 신라가 발해를 공격함으로써 전면화되었고, 이에 따라 신라는 발해를 점차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물론 신라 지배층인 진골귀족들에 국한된다. 이후 양국간의 교류에도 불구하고, 진골귀족들의 발해에 대한 배타적인 인식은 발해 멸망 이후 한국사가 한반도에 국한되어 전개됨에 따라 한국중세사회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도산 위성사진 도산 위성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