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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 역사적 인물

걸걸중상

대조영(大祚榮)의 아버지.
생몰년 미상.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에 의하면 걸걸중상은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속말말갈족(粟末靺鞨族) 출신으로 당나라의 영주(榮州) 지방에 옮겨가 살고 있었다.


676년 이진충의 난을 틈타 함께하던 말갈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 및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당으로부터 벗어나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이 걸걸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 허국공(許國公)을 각각 봉하여 회유하려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자 당은 이해고(李楷固)의 토벌군을 보내 걸사비우를 전사시켰다. 이때는 이미 걸걸중상이 죽은 후이다.


결국, 대조영은 걸사비우의 잔당과 고구려유민들을 규합해 천문령(天門嶺)에서 당군을 격파하였다.


한편 <구당서 舊唐書>의 기록에서는 대조영이 영주지방을 탈출할 때부터 자기집단의 우두머리였고, 고구려출신이라고 하였으며, 걸걸중상에 대한 언급은 기록되어있지 않다.

걸사비우

고구려에 복속된 말갈족의 추장.
생몰년 미상.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唐)의 영주(榮州: 현재 조양(朝陽))로 강제 이동되어 생활하였다. 676년 거란족 이진충의 난으로 혼란을 틈타 영주를 탈출하여 걸걸중상과 함께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은 그를 허국공(許國公)에 봉하고 회유하였으나 듣지 않자 이해고(李楷固)로 하여금 토벌군을 이끌게 하여 고구려 유민집단을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그는 패전하여 전사하고, 이후 고구려 유민집단은 대조영(大祚榮)이 이끌게 되었다. 결국, 대조영은 천문령에서 당군을 격파시키고 동모산에 이르러 진국을 세워 발해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대조영

발해의 제1대왕
재위 698 ~ 718


본명은 대조영(大祚榮)으로, 발해의 건국자이다.
고구려 유민으로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의 영주(營州)지방에 그 일족과 함께 옮겨와 거주하였다. 696년 이진충(李盡忠). 손만영(孫萬榮) 등이 이끈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말갈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하였다.
당과의 천문령(天門嶺)전투에서 이긴 후, 동부 만주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길림성 돈화현(敦化縣)인 동모산(東牟山)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하였다.
국호를 진(振)이라 하였다.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때가 대체로 698년 무렵으로 여겨진다. 당나라와는 중종 때 정식으로 통교하였다. 당나라는 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는데, 그때부터 발해라는 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사료에 의하면, 고왕 당시 승병 수만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개척한 지역이 2천리나 되고 편입된 호수는 10여만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 옥저(沃沮)와 조선해 북쪽의 여러 지역을 몽땅 차지하였으며 남으로 니하(泥河)를 경계로 신라와 인접하고 동으로는 가없는 바다이고 서쪽은 거란과 이웃하고 북으로는 흑수말갈에 이르렀고, 문자와 서기(書記)가 있어서 개국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무왕

발해의 제2대왕
재위 718∼737


이름은 대무예(大武藝)이고, 발해국의 건국자 대조영(大祚榮)의 아들이다.
713년(고왕 15) 당(唐)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할 때, 대무예도 같이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하였다. 719년(무왕 1) 3월 고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인안(仁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우고, 영토를 크게 넓히는 등 발해국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722년 흑수말갈(黑水靺鞨)이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자, 당나라는 그곳에 흑수부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두어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에 무왕은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통모하여 복배(腹背)에서 발해국을 공격하려는 심산으로 단정하고, 아우인 대문예(大門藝) 등으로 하여금 군을 이끌고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대문예는 발해국의 국력으로서 당과 겨루는 것은 무모하다고 여겨 중지할것을 요구하였으나, 무왕은 듣지않고 오히려 크게 노하여 대문예를 소환시켜 죽이려 하였다. 이에 대문예는 당으로 망명하여 당나라로부터 좌요위장군(佐驍衛將軍)직을 받았다.
무왕은 당나라에 대문예를 죽이도록 외교적 교섭을 폈으나 당나라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격분한 무왕은 723년에 장군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해적을 이끌고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게 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였다. 이에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무왕은 예상되는 당나라와의 충돌에 대비하는 방책의 일환으로 727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였다. 이때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밝히고 우호관계를 맺자고 제의하였다.
한편, 당나라는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에 가서 군사를 모아 발해를 치게 하고, 한편으로는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신라는 732년 발해의 남쪽 국경지역을 공격하였으나, 추위와 눈으로 반 이상의 병사를 잃고 돌아왔다. 당나라의 앞잡이로 전락한 대문예를 제거하기 위하여 무왕은 자객을 보내어 그를 살해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무왕은 당나라와 분쟁의 원인이 되었던 흑수말갈족의 토벌을 결행하지도 못하고 병사하였다.

대문예

발해의 왕족.
생몰년 미상.


시조 고왕(高王:大祚榮)의 둘째 아들이며 무왕 대무예(大武藝)의 동생이다.


당(唐) 중종(中宗) 초에 장행읍(張行岌)이 발해에 사신으로 오자, 그를 따라 당나라에 가서 숙위(宿衛)하였다가, 현종(玄宗) 개원(開元)초에 돌아왔다. 따라서 친당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726년(인안 8)에 무왕은 흑수말갈이 당과 통하여 발해를 압박하자, 대문예와 임아(任雅)에게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대문예는 토벌을 반대하다가 당나라로 망명하여, 당으로부터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을 받았다. 무왕은 마문궤(馬文軌) 등을 당나라에 보내어 그의 죄상을 말하고 죽일 것을 요청하였으나, 당 현종은 그를 안서(安西:지금의 新彊省)에 머무르도록 하고, 발해에 이도수(李道邃) 등을 보내어 대문예가 궁하여 찾아왔으니 의리상 죽일 수 없어 영남에 유배하였다고 알렸다. 그러나 대문예에 대한 당나라의 후대가 알려져 무왕은 다시 이진언(李盡彦)을 보내어 대국으로서의 거짓을 꾸짖으며, 대문예를 죽일 것을 거듭 요구하였다. 이에 크게 노한 현종은 이도수가 그 관속들에게 비밀을 지키도록 감독 못한 죄를 물어서 조주자사(曹州刺史)로 좌천하는 한편, 발해에는 최심읍을 보내어 서신으로 형제간의 우의를 간곡히 타일렀다.


그러나 무왕은 732년 장수 장문휴(張文休)로 하여금 등주(登州:山東省蓬萊縣)를 공격하여 자사 위준(韋俊)을 죽이고, 이후 마도산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당나라에서는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개복순(蓋福順)과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에서 병사를 모아서 치게 하고, 그 다음해 당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신라로 보내어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다.


대문예는 끝내 발해로 돌아가지 않고 당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문왕

발해의 제3대왕
재위 737 ~ 793


발해의 3대왕으로, 이름은 대흠무(大欽茂)이다. 737년에 즉위하여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였고, 774년(대흥 38) 보력(寶曆)으로 개원(改元)하였다가 다시 대흥으로 바꾸어 재위기간 내내 이 연호를 사용하였다.
문왕은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이래 30년간의 수도였던 지금의 돈화분지(敦化盆地)안에 있는 오동성(敷東城)의 비좁은 지역을 벗어나 두만강 하류로 흘러들어가는 해란하(海蘭河)유역에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목단강(牧丹江)유역에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그리고 지금의 혼춘현(琿春縣) 반랍성(半拉城)에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를 구축하여 천도를 거듭하였다.
문왕 대흥 25년(762)에 당나라는 종래 ‘발해군'이라고 호칭하던 것을 ‘발해국'으로 바꾸고,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책봉하였다. 문왕은 당과 일본과의 활발한 외교적 교섭을 통해 발해의 정치-문화적 역량을 확장시켰던 왕이었다.

선왕

발해의 제10대왕
재위 818∼830


본명은 대인수(大仁秀). 대조영(大祖榮), 즉 고왕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발해국을 중흥시킨 군주이다.
발해국은 제6대 강왕(康王) 대숭린(大嵩璘)이 809년에 죽은 뒤 그를 이은 정왕(定王) 대원유(大元瑜)부터 희왕(僖王).간왕(簡王)에 이르는 3대왕의 재위기간이 너무 짧아 정치적 불안의 시기였는데, 818년(선왕 1) 선왕대에 이르러 침체된 국세를 회복하였다.
<신당서>에는 선왕이 “해북(海北)의 여러 부족을 쳐서 크게 영토을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해국과는 예로부터 대립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송화강(松花江)하류에서 흑룡강(黑龍江)유역에 걸쳐 살고 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815년(희왕 3)에 다시 당나라에 조공하는 등의 독자적 움직임을 보이다가, 선왕대 이후 당나라와의 조공관계가 단절되었던 사실은 그러한 면을 반증해 주고 있다.
선왕에 의하여 넓혀진 영토의 구체적인 지역은 밝힐 만한 자료가 없으나 발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가리켜 5경(京) 15부(府) 62주(州)라 하고 또 그 번영을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표현하였던 만큼 대내외적인 치적을 남겼다. 당나라와의 관계를 보면 819∼820년의 2년간에 무려 16회의 조공사를 보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뒤에도 매년 사신을 파견하고 있다.
한편, 일본과의 사신교환도 매우 활발하여 마치 종주국이나 된 기분으로 들떠 있는 일본에서도 이들을 맞이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기에 827년에 이르러는 12년마다 한번씩 사신을 받기로 제한할 정도였다. 이것은 발해가 일본과의 외교적 교섭을 이용하여 관.사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도모함에 따른 것이었다.

대인선

발해의 마지막 왕.
재위 906∼926


대인선은 발해의 제15대 마지막 왕이다. 그의 재위 시절 발해는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의 팽창주의에 위협을 느끼고 신라 등 여러 나라와 연합하여 이를 견제하려 하였다. 이에 야율아보기가 925년 12월 대원수 요골(堯骨) 등을 이끌고 친정(親征)을 감행하자, 발해는 저항다운 전투도 치르지 못하고 다음해 정월에 수도 상경성(上京城)이 포위되어 항복하였다. 이로써 발해는 건국 후 229년 만에 멸망하였다. 그해 7월에 있었던 거란군의 회군시에 그는 왕후와 더불어 거란 본토로 끌려갔다.
그뒤 거란이 정해준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의 서쪽에 성을 쌓고 살았다. 그뒤 사용한 이름은 거란이 내린 오로고(烏魯古)였으며, 왕후는 아리지(阿里只)였다. 이 이름은 <요사(遼史)> 국어해(國語解)에는 야율아보기와 그의 왕후가 대인선으로부터 항복받을 때 탔던 말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대인선은 발해 제13대왕인 대현석(大玄錫)을 계승한 제14대왕으로만 알려져 내려왔다. 그러나 김육불이 <당회요 唐會要>에서 895년(乾寧 2) 10월 발해왕 대위해(大瑋)에게 칙서를 내린 기사를 찾아내게 되어 이 대위해를 현석왕을 계승한 제14대왕으로 하고, 대인선은 대위해를 계승한 제15대왕으로 고쳐야 한다는 것을 <발해국지장편>에서 밝힘으로써 결정이 되었다.

오소도

발해의 관인
생몰년 미상.


발해 13대 왕 대현석(大玄錫 : 재위 871~895)과 14대왕인 대위해(大瑋瑎 : 재위 895~906) 시기의 관인(官人)이다. 대현석 재위시 당나라에 들어가 빈공시(賓貢試)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이때 신라의 빈공인 이동과 동방에 친사급제를 하였는데 이름은 그의 앞에 있었고 벼슬은 나라의 재상까지 하였다. 906년 그의 아들 오광찬도 당나라에 들어가 빈공시에 응시하였다. 이때 예부시랑 설정규가 지공에 뽑히고 광찬은 신라의 빈공인 최언위와 더불에 한방에 진사급제를 하고 이름은 그의 아래에 있었다. 마침 오소도가 봉사로 당에 조하함에 표로 청하여 이르기를 "신이 지난 때에 입조하여 급제하였을 때에 이름이 신라인 이동의 앞이었는데 지금 신의 아들 오광찬이도 응당 최언위의 앞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으나 당나라 소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정효공주

3대 文王의 넷째딸
생몰연대 757~792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의 용두산(龍頭山)에서 무덤이 발견되었다. 길림성(吉林城) 돈화현(敦化縣)의 육정산(六頂山)에서 발견된 정혜공주묘(貞惠公主墓)의 주인공의 동생이다. 墓誌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빼어난 용모와 유순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훌륭한 배필에게 시집을 갔다고 한다. 이후 남편과 어린 딸이 일찍 죽자, 수심에 잠겨 있다가 792년 6월 9일 36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호를 貞孝公主라 하고, 같은 해 겨울 11월 28일 己卯日에 染谷의 서쪽 언덕에 배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