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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나라의 활쏘기

몽골

몽골은 동서 직선 길이 2,368㎞, 남북 길이 1,260㎞, 총면적은 1,565,000㎢로 분명한 지리적 경계, 험난한 산맥 등과 더불어 다양한 식물상과 동물상이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대륙성 기후가 나타난다. 이러한 환경에서 몽골 민족은 활을 수렵과 종족의 번영, 군사 목적 등을 위해 사용하였다.

내몽골 자치구의 대흑구에 있는 흑산 암화(岩畵) 중 사안도(射雁圖)는, 말 위에 1人이 올라타서 왼손에 활을 두고 오른손에 화살을 잡고서 머리는 뒤로 향하고 몸은 앞으로 향하여 활을 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몽골 지역의 청동기 시대 바위그림에는 샤만의 제구용(祭具用) 활이나 사냥용 활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암각화에서 활을 겨누며 맞서고 있는 두 전사의 모습과 동물을 활로 겨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몽골의 서사시에는 활의 중요성을 암시하는 뜻으로 장사(壯士)의 영혼이 엄지손가락에 있다는 언급이 있다. 고분에서는 화살통을 매달기 위한 청동걸쇠가 발견되었는데, 이처럼 활은 몽골유목민에게 힘의 상징이자 생업 수단으로서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몽골의 활은 흉노와 거란, 돌궐의 활쏘기에서 유래되었다. 거란족의 기우제 때 등장하는 사류(射柳) 행위는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가지를 향해 화살을 쏘는 일종의 오락성 연무(演武) 행위로서, 이후 국가 대제나 조회 때 여흥의 수단으로 도입되었다. 돌궐의 활쏘기 방식은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첫째는 양편에서 선발된 선사자(善射者)들이 6명씩 각기 조를 이루어 일인당 6발씩 6개의 고정 표적에 쏘아 종합 성적으로 우열을 가리는 단체전 방식이고, 둘째는 이동 표적 즉 날아가는 새를 쏘아 맞혀 승부를 가리는 개인전 방식이다.

전통적으로 몽골인들은 근거리용, 원거리용, 신호용 등의 3가지 활을 사용하였다. 적과 육박전을 벌일 때 가장 많이 사용된 활은 시위, 살대, 깃, 오뉘 등의 부분에 나무줄기, 새의 깃털, 짐승의 뿔과 힘줄 등이 사용되어 적중률과 살상력이 높았다. 활체의 끝부분에는 말머리 모양을 조각하였고, 화살은 나무로 길고 굵게 만드는데 끝에는 매의 깃털로 된 깃이 달려 있다. 이에 비해 이들의 조상으로 보는 흉노족의 활은 너무 길고 거란족의 활은 너무 짧아 화살이 멀리 날아가지 않았다. 몽골군은 그들의 중간 크기로 활을 만들어 신호용 화살을 최고 200m까지 날아가도록 만들었다.

몽골 활은 길이도 길고 탄력이 강하여 줄을 만월형(滿月型)까지 당기기조차 어렵다. 몽골의 활은 물소뿔이나 사슴뿔과 나무로 만들어졌고, 활의 몸통에 그려진 민속도(활의 중심에서부터 소뿔, 평화, 장수)에는 몽골민족의 기원이 담겨 있다. 현재의 몽골 활은 자작나무, 물소뿔, 낙타뼈로 만드는데, 아교를 발라 서로를 연결하고 1년 정도 고정을 시킨다.

몽골의 화살은 가늘고 길며, 화살대는 나무로 만들고, 끝을 매와 독수리의 깃털로 장식하여 한 마리 날렵한 새를 보는 것 같다. 화살촉은 몽골어로 ‘볼초'(우리는 고도리, 樸頭, 木箭이라 함)라 하는데, 옛날에는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화살촉을 사용하였으나 현대화된 촉은 뚫을 수 없는 화살촉이다. 화살집은 4개의 화살이 구분될 수 있도록 내부가 나뉘어 있으며 궁수는 화살집을 오른쪽에 매고, 활은 가로질러 왼쪽으로 오게 맨다.

몽골 활에는 양궁의 조준 구멍이나 안정기 등의 어떠한 부착물도 없다. 사격은 전적으로 사수의 예리한 눈과 팔의 힘 그리고 경험에 의존한다. 시위를 엄지로 힘껏 움켜쥐고 어깨 힘으로 가능한 한 길게 잡아당긴 후 활줄을 놓으면 화살이 날아간다. 몽골인들은 이 때 과녁에 미치지 못한 것보다 멀리 날아간 화살을 선호한다. 물론 명중시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과녁에 도달하지도 못하는 것은 궁수가 힘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법(射法) 중 기사(騎射)는 몸을 조금 앞으로 숙여서 쏘는데, 몽골인들의 활쏘기 능력을 알 수 있는 것은 파르티안 샤프트(parthian shaft)이다. 그리고 몽골인들은 야생 동물을 사냥할 때 모두 관자놀이 부근을 노린다. 왜냐하면 그 곳이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곳이라는 점과 빗나갈 경우 동물의 몸에 고통스러운 상처를 입히지 않은 채 화살을 쉽게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몽골인의 궁술은 옛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흑달사략(黑?事略)』의 ‘疾如飇至 勁如山壓 左旋右折 如飛翼 故能左顧而右射 不特??而已' 기록을 통해서 북방 유목 기마 민족은 모두 뛰어난 기병이자 명사수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칸이 거행하는 대규모의 사냥은 유목민들의 기술을 총체적으로 정립하여 전술화 시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수렵장에서 수렵을 통해 기마사술에 익히며 고난을 견디는 능력을 키운다.

몽골의 태조인 칭기즈칸의 일화를 통해서도 몽골민족과 활의 관련성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전투에 직접 참가했고, 부하들이 후퇴해서 돌아올 때마다 후미를 맡아 최후의 병사들이 돌아올 때까지 직접 화살을 날리며 이들을 엄호하면서 기다렸다가 함께 후퇴하곤 했다. 자무카와의 전투에서 자무카 편에 있던 타이치우트의 젊은 용사 예수드는 칭기즈칸의 이러한 면을 노려 화살을 쏘아서 칭기즈칸의 목덜미를 명중시켜 말에서 떨어뜨렸다. 이 때 칭기즈칸의 충성스러운 추종자 젤메가 그의 화살을 뽑고 자신의 입으로 빨아 상처를 치료하였다. 부상을 당한 칭기즈칸은 예수드를 용서하고 자신의 휘하에 종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예수드는 후일 몽골 제일의 명장으로 꼽히게 되는 제베이다. 전설적인 활의 명수인 제베는 ‘화살촉'이라는 뜻으로 칭기즈칸이 직접 붙여 준 이름이며, 후일 유럽인들은 그를 화살 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다루면 천하를 얻는다'는 속담에서도 몽골인과 활의 관련성을 알 수 있는데, 특히 화살로 날아가는 새를 자유자재로 쏘아 맞히는 것은 신기에 가깝다. 고대 몽골인들은 동물이나 새를 자유자재로 쏘아 맞히는 신궁(神弓)을 메르겐(mergen)이라 하여 사회적으로 큰 존경을 나타내었다.

또한 활은 몽골민족의 삶 자체였다. 전통혼례 시 신랑집으로 향하는 신부 행렬에서 남자에게 안겨 빨간 천에 덮여 있는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활을 매고 있는 사람이나, 몽골의 전통가옥인 게르(ger) 입구의 왼쪽 상단(게르 밖에서 바라봄)에 활을 놓는 모습에서 활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몽골에서 아이를 낳아서 아들이면 활이 그려진 그림을 주거나 작은 활을 선물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등에 화살촉을 붙여 주었다. 몽골 아이들은 4-5세에 이르면 작은 활 사용법을 익히기 시작하며 칭기즈칸 이후로 몽골족의 남자들은 성년이 되면 의무적으로 군대에 들어가 말을 타고 활과 화살을 무기로 사용하였다.

몽골의 민속 축제인 나담에서는 활쏘기를 ‘소일합포납(蘇日哈布納)'이라 하는데, 그 의미는 ‘가죽을 쏜다'는 뜻이다. 활쏘기 시합을 할 때의 과녁은 과거에는 가죽으로 된 둥근 과녁이었으나 이제는 정식 과녁으로 고쳐 쓰고 있다. 몽골의 활쏘기는 궁수가 하나의 과녁을 겨누는 것이 아니라, 가죽끈으로 묶인 주먹만한 크기의 펠트로 만들어진 원형의 소르(sur)를 많이 쌓아 올려놓고 겨누어 맞히는 것이다. 중앙에는 붉은 색을 칠한 소르가 본보기로 놓여지는데, 과녁은 직경 8㎝ 정도로 10개씩 2층으로 쌓은 것이다. 경기 방식은 화살을 날려 과녁을 쓰러뜨리면 되는데, 남자의 사정거리는 70m, 여자의 사정거리는 60m이며, 화살에는 촉이 없다.


원천자료
서정, 『흑달사략』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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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골국기속의 활 1. 몽골국기속의 활
일본

일본의 궁도
일본에 있어서 활은 예로부터 신성함의 상징이다. 나라 시대에는 오래된 활을 신기(神器)로서 받들고 있었다. 활은 시대가 바뀌어 가마쿠라 막부 시기, 무사계급이 생겨났을 때 무기로서 급격한 발전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철포가 전래되고 나서 무기로서의 활은 급격히 쇠퇴했고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무사의 여흥으로 번영했다. 현재는 정신수양, 스포츠 분야의 하나로서 확립되어 있다.

일본의 활
일본의 활은 나무와 대나무를 접착제로 접합한 것이다. 예전에는 사슴가죽을 끓인 부레를 이용했지만 최근에는 합성수지 부레를 이용한다. 부레는 습기에 약하기 때문에 손질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최근에는 글래스파이버(glass fiber) 활이 개발되어서 장력도 있고 모양이 변형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널리 이용하고 있다. 길이의 기준은 2.21m이지만 신장에 따라 0.3~0.6m 가량 길어지거나 짧아질 수 있다.

일본의 화살
화살은 대나무 화살대와 세 장의 깃털로 만들어져 있다. 지금은 두랄루민(duralumin) 화살이 널리 보급되고 있는데 손상이 적기 때문에 학생들이 많이 이용한다. 화살에는 갑시와 을시가 있고 이 두 대를 한데 묶어서 일수(一手)라 한다. 갑시, 을시란 것은 활을 단면으로 봤을 때 날개의 방향 차이에 따라 붙여지는 명칭이다. 갑시부터 쏘는 것이 원칙이다.

일본의 깍지
깍지는 엄지손가락을 덮는 부드러운 것부터 있지만 반견(半堅) 엄지나 견모자(堅帽子) 세손가락 섭에 가죽도 부드러운 것이 처음에는 무난하다.


참고자료
弓道』, 小笠原?信, 講談社, 1977, p.115, p.124~6.
전일본궁도연맹(全日本弓道連盟)

1. 일본騎射_Archery Traditional Asia 1. 일본騎射_Archery Traditional Asia
2. 일본 기사법1(쯔꾸바대) 2. 일본 기사법1(쯔꾸바대)
3. 일본 기사법2(쯔꾸바대) 3. 일본 기사법2(쯔꾸바대)
4. 일본 기사법3(쯔꾸바대) 4. 일본 기사법3(쯔꾸바대)
5. 일본 기사법4(쯔꾸바대) 5. 일본 기사법4(쯔꾸바대)
6. 일본 기사법5(쯔꾸바대) 6. 일본 기사법5(쯔꾸바대)
7. 일본 기사법 송판 과녁(쯔꾸바대) 7. 일본 기사법 송판 과녁(쯔꾸바대)
8. 일본 기사법(쯔꾸바대) 8. 일본 기사법(쯔꾸바대)
중국

중국의 활은 세계적으로 그 유래가 오래된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에서 활은 구석기 시대이래 사용된 흔적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문헌상으로는 서주시대에 활은 귀족들의 기본적인 무예이자 가장 중요한 교양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각종 활쏘기 활동이 성행하였는데 대사, 연사, 향사 등의 예사(禮射)가 발달했는가 하면, 각 학교에서는 기본적으로 활쏘기를 가르쳤다. 특히 활쏘기는 덕을 보는 수단의 하나이자 유교 육례(六禮)의 하나로 발달하여 유교사상의 발달과 함께 널리 보급되었다.

한나라 때부터는 흉노의 기사법에 대항하기 위해 강노를 만들어 중국 활의 약점을 보강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호인(胡人)의 기사(騎射)와 한인(漢人)의 강노(强弩)는 천하가 남북으로 대등하게 갈라진 이유라고 하였다. 이후 활은 노와 함께 장병기로서 큰 효과를 보았을 뿐 아니라 총포가 등장한 이후에도 한동안 이를 보완하는 무기로 기능하였다.

중국의 활은 아주 커서 대체로 우리나라의 육량(六兩) 활과 비슷했다. 줌통[弝]과 활고자[弰]까지는 물소뿔[黑角]로 되었고 봇나무[樺] 껍질로 활등[背]을 감샀는데 봇나무 껍질과 뿔의 틈은 옻칠을 해 놓았으므로 비록 여름철 비에도 힘줄 갖풀이 쉽사리 녹지 않았다.

산해관 동쪽 지방에서는 활시위[弦]를 대부분 가죽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활은 대체로 그 탄성이 우리나라의 활보다 못하여 멀리 쏠 수 없었다. 사정거리는 우리나라가 200보까지 나가는 것에 비해 60~70보에 그쳤다. 그러나 활은 강경하여 바람과 비에 손상당하지 않기 때문에 전쟁 때나 수렵을 하기에 적당했는바 이는 또한 조선 활이 따르지 못할 점이었다.

중국의 화살은 죽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청대에 이르러서는 순전히 나무 화살만을 썼다. 그 까닭은 나무 화살이 가운데가 실했으므로 바람을 가를 수 있고 더위와 비로 하여 들러 붙지 않았다. 화살 재료는 버드나무나 목근[?]나무 같은 것을 불에 구워서 완전히 말린 다음 그 나무의 질을 따라 먹줄을 튕기고 톱으로 잘라서 만들고 휘어 만들지 않았다. 여름철 빗바람에도 구불어들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 모양은 둥글었는데 지름이 우리나라 화살의 곱절이나 되었고 가운데가 굵고 아래위가 좀 가늘었다. 화살의 깃은 나선형으로 생긴 것이 우리나라와 차이가 났다.

또한 중국에서도 분지자(扮指子)란 각지(角指)를 사용하였다. 그 길이는 한 치 가량 되어 엄지손가락 아랫마디까지 닿았다. 그 모양은 위쪽은 뾰족하고 아래쪽은 두껍고 입술 같이 생겨서 활줄을 걸게 되었다. 또한 둥글고 앞뒤의 분별이 없어 아무 곳이나 활줄을 걸 수 있으므로 편리하였다.

중국의 활쏘기 방법은 『무경총요』, 『호금경』, 『사림광기』『보사총법』『사마총법』『흑달유사』『검경』『기효신서』『무비지』『태백음경』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보사법의 경우는 비정비팔(非丁非八)의 보법을 유지하고, 기사법의 경우에는 역시 분종, 대등, 말추 등 3가지로 우리가 같았다. 다만, 시위를 당기는 방식은 중국이 무명지를 새끼 손가락에 포개고 중지로 엄지 끝을 눌러 시위에 바로 세우는 것이 중국식이라면, 우리나라는 북호식(北胡式)과 같이 엄지를 굽히고 둘째손가락으로 눌러 갈고리처럼 하는 방식의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의 방법은 힘이 조금 들어 기사법에 쓰고 좋고, 중국식은 힘이 많이 들어 보사법에 쓰기 좋다.


원천자료
『조선부(朝鮮賦)』『북학의(北學議)』『무비지(武備志)』

참고자료
마명달, 중국 고대사서고, 2003.

1. 중국騎射 1. 중국騎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