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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주몽

주몽 (왕) : 고구려 건국 - 自作射, 命中, 儀禮, 遠射, 百發百中

고구려 시조인 주몽은 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구나가 인정하는 명궁이다. 어렸을 때부터 활을 직접 만들어 탁월한 사예를 보였으며, 천자의 후예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신묘한 활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하지만 주몽은 어린 시절 귀엽고 앳된 모습이었으며, 자라서는 그 외모를 유지하면서 어머니 유화의 가르침 속에서 온유한 성품과 대범함을 길러 늠름한 국왕이 되었다. 언제나 활을 지니고 다니며, 진지함을 잃지 않는 미소년의 선사자이다.

원천자료

『삼국사기』권제 13, 고구려 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 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牟, 一云衆解】, 先是, 扶餘王解夫婁, 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蛙一作蝸】,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立爲太子, 後, 其相阿蘭弗曰, 日者, 天降我曰, 將使吾子孫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유宜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 及解夫婁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 問之, 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下, 鴨綠邊室中私之, 卽往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炤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과之, 置於暖處, 有一男兒, 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억然異常, 自作弓矢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희,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而감食令瘦, 駑者善養令肥, 王以肥者自乘, 瘦者給朱蒙, 後, 獵于野, 以朱蒙善射, 與其矢小, 而朱蒙에獸甚多, 王子及諸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而不可, 與其遲留而受辱, 不若遠適以有爲, 朱蒙乃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표水【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行至毛屯谷【魏書云至普述水】,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默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默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本川【魏書云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皇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時朱蒙年二十二歲,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世二十一年甲申歲也,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盜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王見沸流水中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往尋, 至沸流國, 其國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來, 答曰, 我是天帝子, 來都於某所, 松讓曰,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都日淺, 爲我附庸可乎, 王忿其言, 因與之鬪辯, 亦相射以校藝, 松讓不能抗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三年, 春三月, 黃龍見於골嶺, 秋七月, 慶雲見골嶺南, 其色靑赤
四年, 夏四月, 雲霧四起, 人不辨色七日, 秋七月, 營作城郭宮室
六年, 秋八月, 神雀集宮庭, 冬十月, 王命烏伊扶芬奴, 伐太白山東南荇人國, 取其地爲城邑
十年, 秋九月, 鸞集於王臺, 冬十一月, 王命扶尉염伐北沃沮, 滅之, 以其地爲城邑
十四年,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 遂立神廟, 冬十月, 遣使扶餘饋方物, 以報其德
十九年, 夏四月, 王子類利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원문번역

○ 始祖(시조) 東明聖王(동명성왕)의 성은 高(고)씨요 諱(휘)는 朱蒙(주몽)[혹은 鄒牟(추모) 혹은 象解(상해)[衆牟(중모)]라고도 씀]이다.
처음에 扶餘王(부여왕) 解夫婁(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山川(산천)에 제사하여 後嗣(후사)를 구하려 했는데, 그가 탄 말이 鯤淵(곤연)이란 곳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解夫婁(해부루)]이 괴이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겨 놓고 보니, 한 金色(금색) 蛙形(와형)[蛙(와)는 一本(일본)에 蝸(와)로 쓰여 있음]의 小兒(소아)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賢嗣(현사)를 주심이라" 하고 곧 데려다 길렀다. 이름을 金蛙(금와)라 하고 長成(장성)하자 太子(태자)를 삼았다.
그 후에 [扶餘(부여)]國相(국상) 阿蘭弗(아란불)이 말하기를, "日前(일전)에 天神(천신)이 나에게 降臨(강림)하여 이르기를, 장차 나[天神(천신)]의 자손으로 이 곳에 建國(건국)케 하려 하니 너희(나라)는 다른 곳으로 避(피)하라. 東海(동해)가에 迦葉原(가섭원)이란 곳이 있으니 土壤(토양)이 기름지고 五穀(오곡)에 알맞으니 도읍할 만하다 하였다"고 하였다. 阿蘭弗(아란불)이 드디어 왕을 권하여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國號(국호)를 東扶餘(동부여)라 하였다.
그 舊都(구도)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자칭 天帝(천제)의 아들 解慕漱(해모수)라 하고 와서 도읍하였다.
解夫婁(해부루)가 돌아가고, 金蛙(금와)가 그 位(위)를 이었다. 이 때 [金蛙(금와)는] 太白山[태백산:지금의 白頭山(백두산)] 남쪽 優渤水(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얻어(만나) 來歷(내력)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河伯(하백)의 딸로, 이름은 柳花(유화)입니다.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와 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나타나, 제 말로 天帝(천제)의 아들 解慕漱(해모수)라 하고 나를 熊心山(웅심산) 아래 鴨록(압록) 가[邊(변)]의 집 속으로 誘引(유인)하여 사욕을 채운 후 곧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에게 몸을 허락하였다고 하여 (꾸짖어) 드디어 이 優渤水(우발수)에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습니다"고 했다. 金蛙(금와)는 이상히 여겨 그를 집 속에 가두었는데, 日光(일광)이 비추더니 몸을 피하는 대로 일광이 또 따라 비추었다. 그로 인하여 태기가 있더니 닷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았다. 왕[金蛙(금와)]이 (상서롭지 못하게 여겨)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더니 모두 먹지 아니하였고, 또 (이를) 길바닥에 버렸더니 牛馬(우마)가 (밟지 않고) 피해 갔다. 후에 들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품어 주었다.
왕이 그 알을 쪼개 보려 하였으나 잘 깨어지지 않으므로, 드디어 그 어미에게 도로 주었다.
그 어미는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왔다. 아이의 외모가 영특하여 나이 일곱 살에 유표히 凡兒(범아)와 달리 제 손으로 弓矢(궁시)를 만들어 쏘는데, 百發百中(백발백중)이었다. 扶餘(부여)의 俗語(속어)에 善射者(선사자)를 '朱蒙(주몽)'이라 하므로, 그와 같이 이름을 지었다 한다.
金蛙(금와)에게는 아들 7형제가 있어 朱蒙(주몽)으로 더불어 遊戱(유희)하는데 그 技能(기능)이 모두 주몽을 따를 수 없었다.
그 長子(장자)인 帶素(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고 그 위인이 용맹스러우니, 만일 일찍이 그를 도모치 않으면 後患(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없애소서"라 하였다. 왕은 듣지 않고 (도리어) 주몽으로 말을 기르게 하였다.
朱蒙(주몽)이 말의 성질을 살피어 駿馬(준마)에게는 먹을 것을 減(감)하여 여위게 하고 노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것을 자기가 타고 여윈 것을 주몽에게 주었다. 그 후 [王(왕)이] 原野(원야)에서 사냥을 할 때 주몽은 善射(선사)인 까닭으로,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그의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王子(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또 그를 謀殺(모살)하려 하므로, 주몽의 어머니가 비밀히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라 사람이 장차 너를 해치려 하니 너의 재주와 智略(지략)을 가지고 어디에 간들 아니되랴. (이 곳에) 지체하다가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멀리 가서 有爲(유위)한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주몽은 이에 鳥(烏)伊[조(오)이]·摩離(마리)·陜父(협부) 등 3명과 벗삼아 (도망하여) 淹사水(엄사수)[一名(일명) 蓋斯水(개사수)니 지금의 鴨綠(압록) 東北(동북)에 있다]에 이르러 (물을)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追兵(추병)이 쫓아 올까하여 강물에 告(고)하기를, "나는 天帝(천제)의 아들이요 河伯(하백)의 外孫(외손)으로 오늘 도망하는 중에 追者(추자)가 쫓으니 어찌하랴"고 하였다. 이 때 (물 속에서) 魚鼈(어별)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朱蒙(주몽)이 무사히 건너자 魚鼈(어별)이 곧 흩어지니 뒤를 쫓는 騎兵(기병)이 건너오지 못하고 말았다.
주몽은 毛屯谷(모둔곡)[魏書(위서)에는 音(普)述水(음(보)술수)에 이르렀다 함]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麻衣(마의)를 입고 한 사람은 衲衣(납의:장삼)를 입고 또 한 사람은 水藻(水草)衣(수조(수초)의)를 입었다. 주몽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떠한 사람이며 姓名(성명)이 무엇이냐"고 하니, 麻衣(마의) 입은 사람은 말하기를 이름이 再思(재사)라 하고, 衲衣(납의) 입은 사람은 말하기를 武骨(무골)이라 하고, 水藻衣(수조의) 입은 사람은 말하기를 默居(묵거)라 하고 姓(성)은 말하지 아니하였다. 주몽은 再思(재사)에게 克氏(극씨)란 姓(성)을, 武骨(무골)에게는 仲室氏(중실씨), 默居(묵거)에게는 少室氏(소실씨)를 賜(사)하고,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지금 大命(대명)을 받아 國家(국가)의 基業(기업)을 開創(개창)하려 하는데 마침 이 세 賢人(현인)을 만났으니 어찌 天賜(천사)가 아니랴" 하고 드디어 그 재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卒本川(졸본천)에 이르렀다. 그 土壤(토양)이 肥美(비미)하고 山河(산하)가 險固(험고)함을 보고 거기에 都邑(도읍)을 정하려 하였는데, 宮室(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단지 沸流水邊[비류수변:지금의 桓仁(환인)]에 집을 짓고 거기 居(거)하여 나라를 高句麗(고구려)라 하고 인하여 高(고)로써 氏(씨)를 삼았다[혹은 이르되, 朱蒙(주몽)이 卒本扶餘(졸본부여)에 이르니 (마침) 王(왕)이 無子(무자)하여 朱蒙(주몽)이 普通人物(보통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으며 왕이 돌아가니 朱蒙(주몽)이 그 位(위)를 이었던 것이라 한다. 이 때 주몽의 나이는 22세이니, 漢(한) 孝元帝(효원제) 建昭(건소) 2년이요, 新羅(신라) 始祖(시조) 赫居世(혁거세) 21년인 甲申(갑신)년이었다.
四方(사방)에서 [朱蒙(주몽)의 建國(건국)을] 듣고 來附(내부)하는 자가 많았다.
그 地境(지경)이 靺鞨部落(말갈부락)과 연접하였으므로 侵寇(침구)의 害(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드디어 이를 쳐 물리치니, 靺鞨(말갈)이 畏服(외복)하여 감히 (高句麗(고구려)를) 침범치 못하였다.
왕[朱蒙(주몽)]은 沸流水中(비류수중)에 菜葉(채엽)이 흘러내려 오는 것을 보고 上流(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사냥을 하면서 沸流國(비류국)을 찾아가니, 그 國王(국왕) 松讓(송양)이 나와 보고 "寡人(과인)이 海隅(해우)에 僻在(벽재)하여 일찍이 君子(군자)를 만나 보지 못하다가 오늘 의외에 서로 만나니,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냐. 그런데 그대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대답하기를, "나는 天帝(천제)의 아들로 某處(모처)에 와서 도읍을 하였다"고 했다. 松讓(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기서 여러 대 동안 王(왕) 노릇을 하였지만, 땅이 작아 두 임금을 용납하기는 어렵다.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 며칠 안 되니, 우리의 附庸(부용)이 될 수 있겠느냐"고 하니, 왕[朱蒙(주몽)]은 이 말에 분노하여 그와 是非(시비)를 하다가 또한 서로 활쏘기를 하여 재주를 시험해 보니 松讓(송양)이 抗拒(항거)치 못하였다.
2년 6월에 [沸流國王(비류국왕)] 松讓(송양)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므로 왕은 그 곳을 多勿都(다물도)라 하고, 송양을 봉하여 그 곳의 主(주)를 삼았다 高句麗(고구려) 國語(국어)에 舊土(구토)의 回復(회복)을 多勿(다물)이라 하므로 그와 같이 이름한 것이다.
3년 3월에 黃龍(황룡)이 홀嶺[홀(골)령]에 나타났고, 7월에 慶雲[경운:祥雲(상운)]이 홀령에 나타났는데, 빛이 푸르고 붉었다.
4년 4월에 雲霧(운무)가 四方(사방)에서 일어나 사람이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치 못하였다.
7월에 城郭(성곽)과 宮室(궁실)을 지었다.
6년 8월에 神雀[신작:鳳(봉)]이 宮庭(궁정)에 모여들었다.
10월에 왕이 烏伊(오이)와 扶芬奴(부분노)를 명하여 太白山[태백산:白頭山(백두산)] 동남쪽의 荇人國(행인국)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城邑(성읍)을 삼았다.
10년 9월에 鸞[난:瑞鳥(서조)]새가 王臺(왕대)에 모여들었다.
11월에 왕이 扶尉염(부위염)을 시켜 北沃沮(북옥저:지금의 咸鏡北道(함경북도) 방면)을 쳐 滅(멸)하고 그 땅에 城邑(성읍)을 두었다.
14년 8월에 王母(왕모) 柳花(유화)가 東扶餘(동부여)에서 돌아가니, 其王(기왕) 金蛙(금와)가 太后(태후)의 禮(예)로써 장사하고 드디어 神廟(신묘)를 세웠다.
10월에 [王(왕)이] 사신을 扶餘(부여)에 보내어 方物[방물:貢物(공물)]을 바쳐 그 德(덕)을 갚았다.
19년 4월에 王子(왕자) 類利(유리)가 扶餘(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왕은 기뻐하여 太子(태자)를 삼았다.
9월에 왕이 돌아가니 나이 40세요, 龍山(용산)에 장사하고 東明聖王(동명성왕)이라 諡號(시호)하였다.

시나리오

1. 궁중 안 뒤뜰-활 연습터

소년 주몽(7세)이 나무를 깎아 활을 만들고 있다.
땀이 송글송글 이마에 맺히지만, 화살을 깎느라 여념이 없다.
유화가 주몽을 찾아 나타난다.

유화 : 어, 내 아들. 너, 여기 있었구나. 아니, 지금 뭐하는 거니?
주몽 : 아, 엄마. 지금 활을 만들고 있어요.
유화 : 아니, 무슨 활을 만든다고 그러니? 그러다 손 베겠다.
주몽 : 아! 이제 다 만들었어요. 자, 보세요. 아주 멋지고 힘찬 활이죠?

주몽, 활 시위를 팽팽히 당겨본다.

유화 : 어머나. 아니, 7살짜리 꼬마가 어른이나 쏘는 활을 만들다니....대체 활 만드는 법은누구한테 배웠느냐?
주몽 : 배운 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잘 보고 만든 거에요.
유화 : 저런.....걸음마 할 때부터 유독 활만 가지고 놀더니만.....
주몽 : 엄마. 제가 화살 쏘아 볼 테니까 보세요.

주몽, 활 시위를 당겨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쏜다.
화살이 힘차게 날아올라 과녁을 맞춘다.

유화 : 어머나. 명중이야, 명중! 이럴 수가.....
주몽 : 자, 또 쏠 테니까 보세요!

화살은 다시 과녁으로 날아간다.
어느새 활을 든 금와왕이 장남 대소를 대동하고 나타나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본다.
정중앙에 명중하는 화살.

금와 : (박수 치며) 오, 대단하구나! 어린 아이가 어찌 이토록 활 솜씨가 신통할 수가 있단 말인가.

유화, 주몽, 왕의 행차에 놀라서 고개를 숙인다.
대소 태자의 얼굴이 질투로 일그러진다.

금와 : 참으로 놀랍도다. 대소 태자. 너의 활 솜씨 또한 아주 뛰어나니. 이 아이와 한번 솜씨 를 겨뤄 보거라.

대소, 굳은 표정으로 주몽과 나란히 서서 활 시위를 당긴다.
대소의 활에서 날아가는 화살, 중앙에서 조금 비껴난 곳에 꽂힌다.
주몽의 화살이 날아간다. 정중앙에 꽂히는 화살.
대소의 표정, 분노와 질투심으로 일그러진다.

금와 : 호, 놀랍도다. 진정 이 아이는 명궁이로구나. 이제부터 이 아이에게 부여국의 명궁에 게만 주어지는 이름, 주몽이란 이름을 하사하겠노라.
유화 : 황공하옵니다.
주몽 : 감사하옵니다.

온달

온달 (무인) : 바보 장군 - 百發百中, 狩獵射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의 사람으로 용모가 바보스럽고 우스웠으나 마음은 착한 인물로서, 집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걸식하여 어머니를 봉양하며 다 떨어진 옷과 헤어진 신발을 신고 시정을 왕래하여 바보 온달로 불렸다. 그러나 남루한 옷차림과 외모 속에 숨겨진 그의 무장의 기질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어수룩하고 초라한 행색은 이후에 펼치는 그의 활약상을 부각시키기 위한 일종의 전략적 배치일 뿐이다. 그의 차림새와는 대조적으로 왼쪽 팔목에서 빛을 내는 팔찌는 평강공주의 사랑을 상징한다 하겠다.

원천자료

『삼국사기』권제 45, 열전 제5, 온달
○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鍾可笑, 中心則▩[수]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汝常啼괄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及女年二八, 欲下嫁於上部高氏, 公主對曰,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황至尊乎, 故曰, 王者無戱言, 今大王之命, 謬矣, 妾不敢祗承, 王怒曰, 汝不從我敎,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宜從汝所適矣, 於是, 公主以寶釧數十枚繫주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問溫達之家,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 問其子所在, 老母對曰, 吾子貧且陋,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주, 以至於此乎, 惟我息不忍饑, 取楡皮於山林, 久而未還, 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負楡皮而來, 公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公主獨歸, 宿柴門下, 明朝, 更入, 與母子備言之, 溫達依違未決, 其母曰, 吾息至陋, 不足爲貴人匹, 吾家至구, 固不宜貴人居, 公主對曰, 古人言一斗粟猶可용,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可共乎, 乃賣金釧,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 資用完具, 初, 買馬, 公主語溫達曰,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其勤, 馬日肥且壯,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군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 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常在前, 所獲亦多, 他無若者, 王召來, 問姓名, 驚且異之,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第一, 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由此, 寵榮尤渥, 威權日盛, 及陽岡王卽位, 溫達奏曰, 惟新羅割我漢北之地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臨行誓曰, 鷄立峴竹嶺已西, 不歸於我則不返也,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失所中, 路而死,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於乎歸矣, 遂擧而폄, 大王聞之悲慟

원문번역

○ 溫達(온달)은 고구려 平岡(原)王(평강(원)왕) 때(西紀(서기) 559∼90)의 사람이다. 얼굴이 파리[龍鍾(용종)]하여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心中(심중)]는 명랑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떨어진 옷과 헤어진 신으로 市井間(시정간)에 왕래하니, 그 때 사람들이 지목하기를 바보 溫達(온달)이라 하였다. 平岡王(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희롱하여,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士大夫(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 없고 바보 溫達(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 하며, 왕은 매양 말하였다. (그런데) 딸의 나이 二八[이팔:16歲(세)]이 되자 上部[상부:東部(동부)] 高氏(고씨)에게로 시집보내려 하니 公主(공주)가 대답하기를, "大王(대왕)께서 항상 말씀이,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고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시나이까? 匹夫(필부)도 食言(식언: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거늘 하물며 至尊(지존)이겠습니까? 그러므로 王者(왕자)는 희言(희언)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오니 小女(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怒(노)하여 이르기를 "네가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말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있을 수 있으랴? 너는 갈 데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에 公主(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매고 宮闕(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을 만나 溫達(온달)의 집을 물어 그 집에 이르렀다. 盲人(맹인) 老母(노모)가 있음을 보고 앞으로 가까이 가서 절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물으니, 老母(노모)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貴人(귀인)이 가까이할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이상하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 풀솜과 같은즉 반드시 天下(천하)의 貴人(귀인)이요.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에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山(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하였다. 公主(공주)가 (그 집에서) 나와 걸어서 산 밑에 이르러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공주가 더불어 所懷(소회:속에 품은 바)를 말하니 온달이 성을 내며, "이는 어린 女子(여자)의 행동할 바가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내 곁으로 오지 말라" 하며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공주는 혼자 (온달의 집으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서 자고, 이튿날 다시 들어가서 母子(모자)에게 자세한 것을 말하였는데, 온달은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내 자식은 지극히 누추하여 貴人(귀인)의 配匹(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의 거처할 곳이 못 되오" 하였다. 공주가 대답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 자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음만 같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에 금팔찌를 팔아 田地(전지)·住宅(주택)·奴婢(노비)·牛馬(우마)와 器物(기물) 등을 사니 用品(용품)이 다 갖추어졌다. 처음 말을 살 때에 公主(공주)는 온달에게 이르기를 "아예 市場人(시장인)의 말을 사지 말고, 꼭 國馬(국마)를 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시오" 하였다. 온달이 그 말대로 하였는데, 공주가 먹이기를 부지런히 하여 말이 날마다 살찌고 또 건강해졌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철 3월 3일이면 樂浪(낙랑) 언덕에 모여 田獵(전렵: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산돼지·사슴으로 하늘과 山川神(산천신)에 제사를 지내는데, 그 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들과 5部(부)의 兵士(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이에 온달도 기른 말을 타고 따라갔는데, 그 달리는 품이 언제나 (남보다) 앞에 서고 捕獲(포획)하는 짐승도 많아서, 그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 왕이 불러 그 姓名(성명)을 물어보고 놀라며 또 이상히 여겼다. 이 때 後周(후주)의 武帝(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遼東(요동)을 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拜山(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는데, 온달이 先鋒將(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여 명을 베니, 여러 군사가 乘勝奮擊(승승분격)하여 크게 이겼다. 功(공)을 의논할 때에 온달로 제일을 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嘉歎(가탄)하여, "이 사람은 나의 사위라" 하고, 禮(예)를 갖추어 맞이하며 爵位(작위)를 주어 大兄(대형)을 삼았다. 이로 해서 恩寵(은총)과 榮華(영화)가 더욱 우악하고, 위엄과 권세가 날로 성하였다.
陽岡王(양강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기를, "신라가 우리 漢北(한북)의 땅을 빼앗아 郡縣(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痛恨(통한)하여 일찍이 父母(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大王(대왕)께서는 愚臣(우신)을 不肖(불초)하다 하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立峴[계립현:鳥嶺(조령)]과 竹嶺(죽령) 以西[이서:以北(이북)]의 땅을 우리에게 歸屬(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고, 나가 신라 군사들과 阿旦城[아단성:지금 廣壯津(광장진) 북쪽 峨嵯山(아차산)] 아래서 싸우다가 (新羅軍(신라군)의) 流矢(유시)에 맞아 넘어져서 죽었다. 葬事(장사)를 행하려 하였는데 靈柩(영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公主(공주)가 와서 棺(관)을 어루만지면서, "死生(사생)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 하고 드디어 들어서 葬事(장사)지냈는데, 대왕이 듣고 비통해 하였다.

시나리오

1. 장터

해진 옷에 해진 짚신을 신고 머리는 산발인 온달이 나무 짐을 지고 걸어간다.

남자1 : 어이, 바보 온달! 나무는 많이 했나?
온달 : (바보스럽게 웃는) 헤헤. 두 짐을 해서, 김부자님네 댁에 가져가는 길이구먼요.
남자2 : 바보 온달! 장가는 언제 갈 거야?
온달 : 헤헤. 장가는 웬걸요.....
남자1 : 어이구, 저 옷 입은 꼬라지 좀 봐. 헝클어진 머리 하며. 여자들이 온달만 보면 무섭 다고 도망가는 판에 장가는 무슨. 올 여자가 있어야 장가를 가지.
남자2 : 하긴, 우리 고구려 땅에선 우는 애기들도 온달이 와서 잡아간다! 하면 울음을 뚝 그치지. 호랑이보다 더 무섭게 아는 게 바보 온달이라니까. 하하.
남자1 : 그래도 온달보다 효자는 없을 거야. 날마다 밥 빌어다 눈먼 어머니 봉양하고 숯 구 어다 팔고, 나무하고, 참말로 부지런하지. 그나 저나 바보 온달은 영락없이 총각귀신 되겠구만.

개구쟁이 아이들이 돌을 주워 들고 나타나, 키득거리며 온달에게 집어던진다.

온달 : (돌을 여기 저기 맞고서, 뒤뚱거리다 나뭇짐을 쏟는다) 아이쿠! 아야! 누구야?
애들 ; 하하하. 바보래요! 바보래요! 바보 온달! 바보 온달! 하하하하.

애들, 까르르 웃으며 도망친다.

2. 궁궐 안, 내실

평강공주(5세)가 요란하게 울고 있다. 공주를 업고 달래느라 쩔쩔 매는 유모.

유모 : 아기씨! 공주마마! 왜 이렇게 우시어요?
공주 : 엉엉! 엉엉! 엄마 보고 싶어!
유모 : 공주 마마. 왕비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계시잖습니까. 하늘에서 공주님을 지켜보고 계 실 것이옵니다. 공주마마가 우시면 하늘에 계신 왕비님게서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 습니까?
공주 : (울며) 어마 마마를 데려오란 말야!

평강왕이 머리를 싸매고 나타난다.

왕 : 대체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구나. 유모! 공주를 왜 이리 울리는 거요?
유모 : 마마, 황공하옵니다. 공주마마가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으셔서.....
왕 : 아이구, 머리 아퍼! 왜 이렇게 공주가 맨날 울기만 하느냐 말이다! 울보도 이런 울보 는 세상 천지에 없겠구나.
공주 : 엉엉. 어마 마마....엉엉.....
왕 : 공주야. 울음 좀 그치지 못하겠느냐?
공주 : (울며) 어마 마마가 보고 싶단 말에요!
왕 : 어허! 울음 뚝! 아이고, 머리야. 날마다 공주가 밤낮으로 울어대니 당최 머리가 아퍼 서 살 수가 없구나.
유모 : 황공하옵니다. 공주님, 제발 이 유모를 봐서라도 울음을 좀 그치세요.
왕 : 공주야. 너 이렇게 시끄럽게 울어대니 사대부 집안엔 시집 보낼 수가 없겠구나. 그저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되겠다. 알겠느냐?
공주 : (울먹이며) 바보 온달이 누구에요?
왕 : 저 성밖에 사는 아주 무서운 거지야. 머리는 망태 할아버지처럼 산발이고, 힘은 무지 무지 세단다. 너같이 우는 애는 지게에 번쩍 싣고 산에 데려다 버린단다.
공주 : (울음 그치며) 바보 온달.....무서워요......
왕 : 하하하. 요것 봐라. 공주가 울음을 그쳤구나.
유모 : 에그머니나. 정말 공주님이...... 호호호. 바보 온달이 무섭긴 무서운가 봐요.

양만춘

양만춘 (무인) : 안시성 전투 - 命中(眼)

위험천만한 전시 상황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고 활시위를 당겨 당나라 태종의 눈을 명중시켜 아군의 사기를 충전시켰으며 마침내 장수ㆍ병사들과 힘을 합쳐 안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과 호탕한 웃음에서 무장의 기질을 엿볼 수 있으며, 특히 힘줄이 드러난 검게 그을린 양팔은 궁력의 특출함을 나타낸다.

원천자료

서경순, 『夢經堂日史』 編[一] - 達城徐慶淳公善著


十一月 初一日. 庚申. 早陰晩晴。平明離發。從人皆貰車而乘。車是太平車也。車制。蓋如我國坐車。而兩輪之上設幈屋。馭用二騾。幹車的 馭者之稱 執長鞭。踞坐前左長杠上而揮鞭。則鞭末有聲。聲如霹靂。二騾瞥見鞭影。奔走效命。左之右之。惟人指揮。而屛息不敢橫逸矣。有一徐姓者。稱以同姓。來面款洽。余問曰。爾是徐宗孟子孫乎。曰。然。鳳城西北下一大庄院是吾家也。宗中一人。現在皇城作通官矣。栅門徐姓。自古稱吾宗。而欲問貫籍來歷。則其人目不識丁。非筆談可詳也。爲見鳳凰城。迂回十里。歷安市城。城在鳳凰山中。唐太宗親征高麗時。此城屢月不下。爲守將楊萬春射中左目。及其回軍。萬春登城拜謝。太宗賜絹百匹。此載金富軾三國史。而通鑑及唐史所不記也。城址尙存。可通線路云。而行忙未及見。轉入鳳凰城。歇息于鳳凰寺。登樓望見鳳凰山。特立於碧霄之中。藍壁靑巒如劈掌開指。三角,道峰不意復見於此。心目俱欣。頓忘行役之勞。舊栅門在外鳳城。而康煕時。以生齒繁息。加闢二十餘里。設今栅云。路見大車羣行絡繹。其制朴斲如我國卜車。載卜如山。車夫坐臥其上。駕以騾馬牛驢四五或六七或八九。無論車之小大。輪輻俱是井字形。軌轍同是一尺度。故前轍後轍。無不合軌。市肆屋宇之櫛比壯麗。果愈於栅門。而亦一都會也。止宿於乾子浦。自日暮時。寒風驟至。夜尤緊。路中偶吟一絶曰 金石山前日欲曛。鳳凰城外雪紛紛。車中坐計燕行路。路去三分僅一分。

원문번역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제1편 마자인정기(馬訾軔征紀)
을묘년(1855, 철종 6) 11월[1일-16일] 1일(경신)

아침에는 흐리다가 늦게 맑았다. 평명(平明 해뜰 무렵)에 떠났다.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수레를 세내어 타는데, 수레는 태평거(太平車)이다. 수레의 제도는 대개 우리나라 좌거(坐車)와 같은데, 두 바퀴 위에 휘장을 쳐 집을 만들었다. 두 필 노새에 매어 몰이꾼이 길다란 채찍을 잡고 앞의 왼쪽 장대 위에 걸터앉아서 채찍을 휘두르면, 채찍 끝에서 벼락 같은 소리가 울린다. 두 마리의 노새는 채찍 그림자만 보면 죽으라고 달려,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오직 사람이 지휘하는 대로 숨소리를 죽이고 가는데, 감히 제 멋대로 가지 못한다. 서(徐)가 성을 가진 사람 하나가 같은 성이라 일컬으면서 와서 보고 반가워한다. 내가 묻기를,

“그대가 서종맹(徐宗孟)의 자손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봉성(鳳城) 서북쪽 아래에 있는 큰 장원(莊院)이 우리집이며, 우리 일족 가운데 한 사람이 지금 황성(皇城)에서 통관(通官)으로 있습니다.”

한다. 책문에 있는 서가 성은 자고로 우리와 일족이라 하는데, 관향의 내력을 물으니, 그 사람은 글자를 모르므로 필담(筆談)으로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봉황성(鳳凰城)을 보기 위해 10리를 돌아서 안시성(安市城)을 지났다. 이 성은 봉황성 안에 있다. 당 태종(唐太宗)이 친히 고구려를 칠 때에 이 성이 여러 달을 두고 항복하지 않았고, 성을 지키던 장수 양만춘(楊萬春)의 화살에 왼쪽 눈을 맞았다. 당 태종이 회군(回軍)할 때에 양만춘이 성에 올라가서 절하고 사과하니, 태종이 명주 100필을 주었다 한다. 이 이야기는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실려 있으나, 《통감(通鑑)》과 《당사(唐史)》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성터가 여태껏 그대로 있고 한 갈래 길이 통할 수 있다 하나, 갈 길이 바빠서 가보지는 못했다. 도로 봉황성에 들어가서 봉황사(鳳凰寺)에서 쉬었다. 누각에 올라가서 봉황산을 바라보니, 파란 하늘 위로 우뚝 솟아 있어서 남색 절벽과 퍼진 산봉우리가 손바닥을 쪼개어 손가락을 갈라 놓은 것 같아서, 뜻밖에도 삼각산과 도봉산을 다시 여기에서 보게 되니, 마음과 눈이 한꺼번에 즐거워져서 여행하는 피로가 싹 가셔버렸다. 옛날 책문은 외봉성(外鳳城)에 있었는데, 강희(康煕) 때에 인구가 번성하자 20여 리를 더 물려 지금 있는 책문을 설치하였다 한다. 길가에서 보니 큰 수레가 떼를 지어서 연달아 다닌다. 그 제도가 둔박하여 우리나라 짐수레와 같다. 짐을 산더미같이 싣고 차부(車夫)는 그 위에 앉았다 누웠다가 하며, 노새나 말이나 소나 나귀를 4, 5마리 혹은 6, 7마리 혹은 8, 9마리를 매었다. 수레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수레바퀴의 살은 똑같이 정(井) 자 모양이고 굴대바퀴는 똑같은 척도(尺度)여서 앞 수레나 뒷 수레가 궤도(軌道)에 맞지 않은 것이 없다. 저자 집과 일반 집들이 즐비하고 장려(壯麗)하기는 과연 책문보다 나아서 역시 하나의 도회였다. 건자포(乾子浦)에서 숙박하였다. 저물녘부터 찬바람이 몰아닥치어 밤에는 더 심하였다. 도중에서 절구(絶句) 한 수를 우연히 읊었는데, 다음과 같다.

금석산 앞에서 해는 저물고 / 金石山前日欲曛
봉황성 밖에는 눈이 날린다 / 鳳凰城外雪紛紛
수레에 앉아서 앞길 헤어보니 / 車中坐計燕行路
삼분에 일분만 겨우 왔나보다 / 路去三分僅一分

시나리오

등장인물
양만춘: 안시성 성주 연개소문: 고구려 대막리지
당태종 : 이세민 진대덕 : 당 사신, 재상
이세적 : 당 장군 고연수 : 고구려 북부욕살(대신)
요동성주 : 고구려 요동성주 신하1, 신하2 : 당태종 신하
점쟁이 : 고구려 장님점쟁이 현장 : 당나라 사신
무기 : 당태종의 손자 장군1, 2 : 연개소문의 휘하 장군들
그외

1. 고구려의 궁궐 전경

2.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회의장
당나라 재상 현장이 사신으로 와서 연개소문에게 당태종의 뜻을 전달하고 있다.

·현장 : 우리 당나라 황제께서는 귀국이 백제와 연합하여 우리 당나라의 동맹국 신라를 공격하고 있는 데 대해 심한 우려를 가지고 계십니다. 신라를 침공하지 말고 화해하시라는 것이 황제 폐하의 뜻입니다. 만약.......
·연개소문 : 아니, 당나라 황제께서 왜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한단 말이오? 만약이라니? 어서말해 보시오.
·현장 : 만약 계속 고구려와 백제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한다면 우리 당나라도 동맹국을 지키기 위해 내년에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칠 수밖에 없다 하셨나이다.
·연개소문 : 신라가 먼저 우리나라를 침공하여 성읍 50여개를 빼앗고 돌려주지 않는데, 우리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현장 : 이미 지난 일을 새삼 따져서 무엇하겠습니까. 옛땅을 찾겠다 하지 마시고, 우리 당 나라의 권고대로 신라와 화친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나라도 더 이상 동맹국 신라가 고구려군에 유린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을 것입니다.
·연개소문 : 뭐라고? 어디서 그따위 내정간섭을 하려 든단 말이오? 고구려의 전쟁은 민족 통일전쟁이오. 당나라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황제에게 전하시오!

3. 당 태종의 궁궐 전경
거대한 규모의 중국 궁궐, 중국 궁정 음악

장보고

장보고 (무인) : 활보의 해전 - 遠射, 百發百中, 海戰射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巴)라고도 불렸던 해전의 왕, 장보고는 먼 거리의 물체도 정확하게 알아보고 명중시키는 명궁으로서, 육박전에서도 어느 누구에게 지지 않는 무인이다. 그의 거대한 체구는 흔들리는 선상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으며, 적진을 향해 날아가는 길고 굵은 화살은 그의 큰 손과 굵은 팔뚝에 어울렸다. 호방한 성격으로 동료 장수와 부하 병사들을 이끌었으며, 평시에는 활솜씨를 겨루며 우애를 돈독히 하는 호걸 중의 호걸이다.

원천자료

『삼국사기』권제 44, 열전 제4, 장보고
○ 張保皐【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鄕邑父祖, 皆善鬪戰, 年復能沒海底, 行, 五十里不일, 角其勇壯, 保皐差不及也, 年以兄呼保皐, 保皐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後保皐還國, 謁大王曰, 遍中國, 以吾人爲奴婢, 願得鎭淸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淸海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大王與保皐萬人, 此後海上無죽鄕人者, 保皐旣貴, 年去職饑寒, 在泗之漣水縣, 一日, 言於戍將馮元規曰, 我欲東歸, 乞食於張保皐, 元規曰, 若與保皐所負如何, 奈何去取死其手, 年曰, 饑寒死, 不如兵死快, 황死故鄕耶, 遂去謁, 保皐飮之極歡, 飮未卒, 聞王弑國亂無主, 保皐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入國誅叛者立王, 王召保皐爲相, 以年代守淸海【此與新羅傳記頗異, 以杜牧言傳, 故兩存之】
論曰, 杜牧言, 天寶安祿山亂, 朔方節度使安思順, 以祿山從弟賜死, 詔郭汾陽代之, 後旬日, 復詔李臨淮, 持節分朔方半兵, 東出趙魏, 當思順時, 汾陽臨淮俱爲牙門都將, 二人不相能, 雖同盤飮食, 常제相視, 不交一言, 及汾陽代思順, 臨淮欲亡去, 計未決, 詔臨淮, 分汾陽半兵東討, 臨淮入請曰, 一死固甘, 乞免妻子, 汾陽추下, 持手上堂, 偶坐曰, 今國亂主遷, 非公不能東伐, 豈懷私忿時耶, 及別, 執手泣涕, 相勉以忠義, 訖平巨盜, 實二公之力, 知其心不叛, 知其材可任, 然後心不疑, 兵可分, 平生積憤, 知其心難也, 忿必見短, 知其材益難也, 此保皐與汾陽之賢等耳, 年投保皐, 必曰, 彼貴我賤, 我降下之, 不宜以舊忿殺我, 保皐果不殺, 人之常情也, 臨淮請死於汾陽, 亦人之常情也, 保皐任年事, 出於己, 年且饑寒, 易爲感動, 汾陽臨淮平生抗立, 臨淮之命, 出於天子, 확於保皐, 汾陽爲優, 此乃聖賢遲疑成敗之際也, 彼無他也, 仁義之心, 與雜情병植, 雜情勝則仁義滅, 仁義勝則雜情消, 彼二人, 仁義之心旣勝, 復資之以明, 故卒成功, 世稱周召爲百代之師, 周公擁孺子, 而召公疑之, 以周公之聖召公之賢, 少事文王, 老佐武王, 能平天下, 周公之心, 召公且不知之, 苟有仁義之心, 不資以明, 雖召公尙爾, 황其下哉, 語曰, 國有一人, 其國不亡, 夫亡國非無人也, 丁其亡時, 賢人不用, 苟能用之, 一人足矣, 宋祁曰, 嗟乎, 不以怨毒相甚, 而先國家之憂, 晉有祁奚, 唐有汾陽保皐, 孰謂夷無人哉

원문번역

○ 張保皐(장보고)[新羅本紀(신라본기)에는 弓福(궁복)으로 되어 있음]와 鄭年(정년)[年(연)은 連(연)으로도 되어 있음]은 모두 新羅(신라) 사람이나, 그들의 고향과 父祖(부조)는 알 수 없다. 두 사람이 모두 싸움을 잘하였는데, 年(연)은 그 밖에 바다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걸어) 가면서도 물을 내뿜지 아니하였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保皐(보고)가 (年(연)에게) 좀 미치지 못하였으나, 年(연)이 보고를 兄(형)으로 불렀다. 보고는 年齡(연령)으로, 年(연)은 技藝(기예)로 항상 맞서 서로 지지 아니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唐(당)에 가서 武寧軍小將(무령군소장)이 되어 말을 타고 槍(창)을 쓰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후에 保皐(보고)가 귀국하여 大王[대왕:興德王(흥덕왕)]을 뵙고 말하기를, "중국의 어디를 가 보나, 우리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淸海(청해)에 鎭營(진영)을 설하고, 海賊(해적)들이 사람을 掠取(약취)하여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바라나이다" 하였다. 淸海(청해)는 신라 海路(해로)의 要地(요지)로 지금 莞島(완도)라 하는 곳이다. 大王(대왕)이 保皐(보고)에게 (군사) 만 명을 주어 (淸海(청해)에 設鎭(설진)하게 하니), 그 후로 海上(해상)에서 國人(국인)을 파는[賣(매)] 자가 없었다. (이로 인해) 보고는 이미 貴(귀)하게 되었는데, 年(연)은 (唐(당)에서) 職業(직업)을 잃고 饑寒(기한)을 무릅쓰며 泗水[사수:淮水(회수)의 한 支流(지류)]의 漣빙(水)縣(연빙(수)현:지금 江蘇省(강소성) 漣水(연수)에 있었다. 하루는 수비하는 장수 馮元規(풍원규)에게 말하기를 "내가 東(동)으로 돌아가서 張保皐(장보고)에게 乞食[걸식:依托(의탁)]하려 한다" 하니, 元規(원규)가 "그대와 保皐(보고)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가서 그 손에 죽으려 하는가" 하였다. 年(연)은 "饑寒(기한)에 죽는 것이 싸워서 快(쾌)하게 죽느니만 같지 못하다. 하물며 고향에서 죽는 것이랴?" 하고 그 곳을 떠나 張保皐(장보고)에게 뵈었다. 保皐(보고)가 함께 술을 마시며 마음껏 즐기는데,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閔哀王(민애왕)]이 試害(시해)되고 나라가 어지러우며 임금이 없다고 하는 소식이 들어왔다. 보고가 군사 5,000명을 나누어 年(연)에게 주며, 연의 손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면 禍難(화난)을 평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年(연)이 國都(국도)에 들어가 배반한 자를 베고 왕[祐徵(우징) 즉 神武王(신무왕)]을 세웠다. 왕은 保皐(보고)를 불러 宰相(재상)을 삼고 年(연)으로 대신 淸海(청해)를 지키게 하였다[이것은 新羅(신라)의 傳記(전기)와는 퍽 다르나, 杜牧[두목:唐(당)의 文人(문인), 字(자)는 牧之(목지)]이 傳(전)을 짓기도 하였으므로 그대로 남겨 둔다].
[史臣(사신)은] 論(논)한다. 杜牧(두목)이 말하기를, 天寶(천보:唐玄宗(당현종) 연호) 年間(연간:西紀(서기) 742∼55), 安祿山(안록산)의 亂(난)에 朔方節度使(삭방절도사) 安思順(안사순)을 祿山(녹산)의 從弟(종제)인 까닭으로 해서 賜死(사사)하고, 詔書(조서)를 내려 郭汾陽[곽분양:子儀(자의)]을 그에 대신케 하였는데, 旬日(순일) 후에는 다시 二臨淮(이임회)에게 詔書(조서)를 내려 節(절)을 가지고 朔方[삭방:郭氏(곽씨)]의 兵力(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東(동)으로 趙(조)·魏地方(위지방)에 나가게 하였다. [安(안)]思順(사순) 때에는 汾陽(분양)과 臨淮(임회)가 모두 牙門(本陣)都將(아문(본진)도장)으로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여, 소반을 함께 하여 飮食(음식)을 먹더라도 항상 서로 흘겨보며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汾陽(분양)이 思順(사순)을 대신하게 되자, 臨淮(임회)는 도망하려다가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임회에게 詔命(조명)하여 汾陽(분양)의 절반 兵力(병력)을 나누어 東(동)으로 나가 討伐(토벌)하게 하였다. 臨淮(임회)가 들어가 청하기를 "내 한 죽음은 달게 받겠으니 妻子(처자)나 살려 주시오" 하였다. 汾陽(분양)이 내려가 손을 잡고 堂上(당상)으로 올라 마주앉아 말하기를 "지금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이 播遷(파천)하였는데, 公(공)이 아니면 東伐(동벌)을 할 수 없소. 어찌 사사로운 忿恨(분한)을 품을 때이겠소" 하였다. 작별하게 되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忠義(충의)로써 勸勉(권면)하였으니, 큰 도둑[安祿山(안록산)]을 평정한 것은 사실 두 公(공)의 힘이었다.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그 材能(재능)이 일을 맡길 만한 것을 안 후에야 마음으로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平生(평생)에 忿恨(분한)을 쌓아 왔으니 그 마음 알기가 어렵고, 忿恨(분한)하면 반드시 短點(단점)을 보는 것이니 그 材能(재능)을 알기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 점은 保皐(보고)가 汾陽(분양)의 어짊[賢(현)]과 같은 것이다. 年(연)이 보고에게로 갈 때에 말하기를 "저는 貴(귀)하고 나는 賤(천)하니, 내 自身(자신)을 낮추면 전의 忿恨(분한)을 가지고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保皐(보고)가 과연 죽이지 않았으니 이것은 사람의 常情(상정)이다. 그리고 臨淮(임회)가 汾陽(분양)에게 죽음을 청한 것도 역시 사람의 常情(상정)이었다. 또 保皐(보고)가 年(연)에게 맡긴 것은 그 일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며, 年(연)이 또 饑寒中(기한중)에 있었으므로 감동되기 쉬운 일이었다. 汾陽(분양)과 臨淮(임회)가 평생을 대립하였지만, 임회에 대한 命(명)은 天子(천자)에게서 나왔으니 保皐(보고)에게 견주어 본다면 분양이 優越(우월)한 듯하다. 이것은 곧 聖賢(성현)이 成敗(성패)를 遲疑(지의)하는 기틀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仁義(인의)의 마음이 雜情(잡정)과 함께 심어져 있어, 雜情(잡정)이 勝(승)하면 仁義(인의)가 멸하고 仁義(인의)가 勝(승)하면 雜情(잡정)이 사라지는 것이다. 저 두 사람[張保皐(장보고)·郭汾陽(곽분양)]은 仁義(인의)의 마음이 이미 勝(승)하였고, 여기에 다시 明見(명견)이 바탕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世間(세간)에서는 周公(주공)·召公(소공)을 100代(대)의 스승으로 일컫고 있지만, 周公(주공)이 孺子[유자:成王(성왕)]를 擁立(옹립)하는 데는 召公[소공:周公弟(주공제)]도 의심하였다. 周公(주공)의 聖(성)과 召公(소공)의 賢(현)으로써, 젊어서는 文王(문왕)을 섬기고, 늙어서는 武王(무왕)을 도와 능히 天下(천하)를 평정하였지만, 周公(주공)의 마음을 召公(소공)도 알지 못하였다. 진실로 仁義(인의)의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明見(명견)의 바탕이 없다면 비록 召公(소공)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그만 못한 사람에 있어서랴? 語(어)에 이르기를 "나라에 한 사람이 있으면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대저 나라를 망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망할 때를 당하여 어진 사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능히 (어진 사람을) 쓴다면 한 사람으로서도 足(족)할 것이다[以上(이상)이 杜牧(두목)의 贊辭(찬사)] 宋祁(송기)가 말하기를 "아마, 원망과 害毒(해독)으로써 서로 끼치지 않고 나라의 우환을 먼저 생각한 것은, 晉(진)에 祁奚(기해)가 있었고, 唐(당)에 汾陽(분양)과 保皐(보고)가 있었다. 누가 東夷(동이)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 하였다.

시나리오

등장인물
궁복(장보고) 정년: 장보고의 고향 후배
염장 : 장보고의 부하 김우징(신무왕)
흥덕왕 삼보: 장보고의 고향 형
연화 : 장보고의 딸 해적
김양 : 무주도독 김명(민애왕)
경응(문성왕) : 김우징의 아들 예징 : 상대등. 김우징의 조카
그외

1. 바닷가
소년 궁복과 정년이 헤엄치고 있다.

어린 궁복 : 연아. 우리 누가 먼저 저 바위섬까지 헤엄쳐 가나 내기하자. 이긴 사람한테 엎드려 절하고 대장으로 모시기!
어린 정년 : 좋아, 형. 그냥 헤엄치는 건 재미없으니까 잠수해서 가는 걸로 해.
궁복 : 야, 잠수는 너 특기잖아! 니가 유리해.
정년 : 에이, 그럼 항복해. 나한테 졌다고.
궁복 : 뭐, 항복? 야, 사내 대장부가 무슨 항복을 하냐? 좋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시작이다!

두 소년, 잠수해서 헤엄치기 시작한다.
한참 후, 궁복, 숨을 몰아쉬며 수면위로 얼굴을 내민다. 정년은 여전히 잠수 중이다.

궁복 : 어푸 어푸! 어휴, 내가 졌다, 졌어. 이녀석은 전생에 물고기였을 거야. 하여간 물 속에서 50리 정도는 거뜬히 잠수해서 헤엄친다니까.

거타지

거타지 (병사) : 바다를 쏘다 - 命中(龍)

제51대 진성여왕 시절 용을 쏘아서 바다의 풍랑을 잠재웠던 병사 거타지는 신라의 궁사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갖춘 명궁이다. 검은 피부와 건장하고 굳센 모습 그리고 억실억실한 이목구비는 어디서든 눈에 뜨일 수밖에 없다. 위기에서도 평온과 공손함을 잃지 않는 겸손한 그의 자세는 모든 궁사가 본받을 만하다. 얌전한 성격의 소유자인 거타지는 말을 하거나 웃지 않으면 화가 난 듯한 표정이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따듯한 가슴을 가진 진정한 남자이다.

원천자료

『삼국유사』권제 2, 기이 제2, 진성여대왕과 거타지
○ 第五十一眞聖女王, 臨朝有年, 乳母鳧好夫人, 與其夫魏弘잡干等三四寵臣, 擅權撓政, 盜賊蜂起. 國人患之, 乃作타羅尼隱語, 書投路上. 王與權臣等得之, 謂曰, 此非王居仁, 誰作此文. 乃囚居仁於獄. 居仁作詩訴于天, 天乃震其獄囚以免之. 詩曰, 燕丹泣血虹穿日, 鄒衍含悲夏落霜. 今我失途還似舊, 皇天何事不垂祥. 타羅尼曰,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 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裟婆訶. 說者云, 刹尼那帝者, 言女主也, 判尼判尼蘇判尼者, 言二蘇判也, 蘇判爵名, 于于三阿十也, 鳧伊者, 言鳧好也. 此王代阿손良貝, 王之季子也, 奉使於唐, 聞百濟海賊梗於津鳧, 選弓士五十人隨之. 舡次鵠島(鄕云骨大島), 風濤大作, 信宿俠(浹)旬. 公患之, 使人卜之, 曰, 島有神池, 祭之可矣. 於是, 具奠於池上, 池水湧高丈餘. 夜夢有老人, 謂公曰, 善射一人, 留此島中, 可得便風. 公覺而以事諮於左右曰, 留誰可矣. 衆人曰, 宜以木簡五十片, 書我輩名, 沈水而구之. 公從之. 軍士有居타知者, 名沈水中, 乃留其人, 便風忽起, 舡進無滯. 居타愁立島嶼, 忽有老人, 從池而出, 謂曰, 我是西海若, 每一沙彌, 日出之時, 從天而降, 誦타羅尼, 三繞此池, 我之夫婦·子孫皆浮水上, 沙彌取吾子孫肝腸, 食之盡矣, 唯存吾夫婦與一女爾. 來朝又必來, 請君射之. 居타曰, 弓矢之事, 吾所長也, 聞命矣. 老人謝之而沒. 居타隱伏而待, 明日扶桑旣暾, 沙彌果來, 誦呪如前, 欲取老龍肝. 時居타射之中, 沙彌卽變老狐, 墜地而斃. 於是, 老人出而謝曰, 受公之賜, 全我性命, 請以女子妻之. 居타曰, 見賜不遺, 固所願也. 老人以其女, 變作一枝花, 納之懷中, 仍命二龍, 捧居타知及使舡, 仍護其舡, 入於唐境. 唐人見新羅舡有二龍負之, 具事上聞, 帝曰, 新羅之使, 必非常人. 賜宴坐於群臣之上, 厚以金帛遺之. 旣還國, 居타出花枝, 變女同居焉.

원문번역

○ 第五十一代(제51대) 眞聖女王(진성여왕)이 임금된 지 몇 해만에 乳母(유모) 鳧好夫人(부호부인)과 그의 남편 魏弘匝干(위홍잡간) 등 三四(삼사) 寵臣(총신)이 더불어 權勢(권세)를 잡고 政事(정사)를 휘두르니, 盜賊(도적)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 國人(국인)이 근심하여 陁羅尼(다라니)의 隱語(은어)를 지어 써서(書) 路上(노상)에 던지었다. 王(왕)과 權臣(권신)들이 얻어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王居仁(왕거인)이 아니면 누가 이 글을 지으랴 하고 居仁(거인)을 잡아 獄(옥)에 가두었다. 居仁(거인)이 詩(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니 하늘이 그 獄(옥)에 벼락을 쳐서 면하게 하였다. 그 詩(시)에 「燕丹(연단)의 피어린 눈물, 무지개가 해【日(일)】를 뚫고, 鄒衍(추연)의 머금은 슬픔, 여름에도 서리를 나린다, 지금 이내 시름, 그와 같도다, 아-皇天(황천)아 어찌해 아무 표시도 없는가」라 하였고, 陁羅尼(다라니)에는 「南無亡國刹尼那帝(나무망국찰니나제) 判尼判尼蘇判尼于于三阿干(판니판니소판니우우삼아간) 鳧伊娑婆訶(부이사바하)」라 하였다. 解說者(해설자)가 말하기를 「刹尼那帝(찰니나제)」는 女主(여주)를 指稱(지칭)한 것이고 「判尼判尼蘇判尼(판니판니소판니)」는 두 蘇判(소판)을 말한 것이니, 蘇判(소판)은 職名(직명)으로, 于于三阿干(우우삼아간)이었고 「鳧伊(부이)」는 鳧好(부호)를 말함이다. 이 王(왕) 때의 阿湌(아찬) 良貝(양패)는 王(왕)의 季子(계자)이었는데, 唐(당)에 奉使(봉사)하려 할 때 百濟(백제)【後百濟(후백제)】의 海賊(해적)이 津島(진도)에서 가로막는다 함을 듣고 弓士(궁사) 五十人(50인)을 뽑아서 따르게 하였다. 배가 鵠島(곡도)【鄕言(향언)에는 骨大島(골대도)라 한다】에 이르렀을 때에 風浪(풍랑)이 크게 일어나 十餘日(10여일)동안 묵게 되었다. 公【良貝(양패)】이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占(점)을 치니, 가로되 섬에 神池(신지)가 있으니 제사지내면 좋겠다 하였다. 이에 못 위에서 祭典(제전)을 차려 놓으니 池水(지수)가 한길 以上(이상)이나 용솟음쳤었다. 그날 밤 꿈에 (한) 老人(노인)이 나타나 公(공)에게 이르기를 활을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에 머물러 두게 하면 順風(순풍)을 얻으리라 하였다. 公(공)이 꿈을 깨어 左右(좌우)에게 물어 가로되 누구를 머물러 두게 하면 좋을까 하니, 衆人(중인)이 가로되 木簡(목간) 五十片(오십편)에 우리들의 이름을 (各各:각각) 써서 물에 넣어 제비를 뽑자 하였다. 公(공)이 그대로 하였다. 군사 居陁知(거타지)란 자의 이름이 물에 잠기었으므로 이에 그 사람을 머물러 두매 順風(순풍)이 갑자기 일어나 배는 遲滯(지체)없이 달아났다. 居陁(거타)는 수심에 쌓여 섬 위에 서 있었더니 忽然(홀연)히 한 老人(노인)이 못에서 나와 말하되 나는 西海若(서해약)인데 해가 뜰 때에는 매양 한 중이 하늘에서 내려와 陁羅尼(다라니)를 외우면서 세 번 이 못을 돈다. 그러면 나의 夫婦(부부)와 子孫(자손)이 모두 물 위에 뜨게 된다. 중은 내 子孫(자손)의 肝腸(간장)을 다 빼어 먹고 오직 내 夫婦(부부)와 딸 하나만 남겨 놓았다. 來日(내일) 아침에도 또 반드시 올 것이니, 請(청)컨대 그대는 활로 쏘아달라고 하였다. 居陁(거타)-가로되 활쏘는 것은 나의 所長(소장)이니 하라는 대로 하겠다 하였다. 老人(노인)이 致謝(치사)하고 물속으로 들어가고 居陁(거타)는 숨어서 기다리었다. 이튿날 東(동)쪽에서 해가 뜨자, 과연 중이 와서 前(전)과 같이 呪文(주문)을 외우며 老龍(노룡)의 肝(간)을 取(취)하려 하였다. 그때 居陁(거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이 곧 老狐(노호)로 變(변)하여 땅에 떨어져 죽었다. 이에 老人(노인)이 나와 감사하여 가로되 公(공)의 恩澤(은택)으로 나의 性命(성명)을 保全(보전)하였으니, 나의 딸로 아내를 삼아달라고 하였다. 居陁(거타)가 가로되 주시는 것을 저버리지 아니함은 진짓 願(원)하는 바이라 하였다. 老人(노인)이 그 딸을 한가지【一枝:일지】 꽃으로 變作(변작)하여 품 속에 넣어주고 또 두 龍(용)을 命(명)하여 居陁(거타)를 받들고 使船(사선)을 쫓아가 그 배를 護衛(호위)하여 唐土(당토)에 도착하였다. 唐人(당인)이 新羅船(신라선)에 두 龍(용)이 있어 그것을 받들고 있음을 보고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新羅(신라)의 使者(사자)가 반드시 非常(비상)한 사람일 것이라 하고 잔치를 베풀새 여러 신하의 윗자리에 앉히고 厚(후)히 金帛(금백)을 주었다. 故國(고국)에 돌아오자 居陁(거타)는 꽃가지를 내어 女子(여자)로 變(변)하게 하여 同居(동거)하였다.

시나리오

1. 신라 진성여왕의 집무실

여왕 : 아찬 양패는 들으시오. 나의 양자인 그대를 특별히 신임하여 당나라 사신으로 보내 니, 경은 가서 맡은 바 임무를 잘 수행하고 오길 바라오.
양패 : 마마. 소신을 그토록 신임해주시니 황공하옵니다. 반드시 맡은 바 사명을 훌륭히 수 행하고 돌아오겠나이다.
여왕 : 그런데 내 듣자하니, 당나라로 가는 바닷길에 백제의 해적들이 수시로 출몰한다 하니, 경은 해적을 무찌를 궁사들을 선발해서 데려가도록 하오.
양패 :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신들, 진성여왕, 아찬 양패를 골고루 비추는 가운데.

내레이션 : 때는 신라 51대 진성여왕 시절. 여왕이 임금된지 몇 해 만에 유모 부호부인과 여왕의 남편 위홍 잡간 등이 여왕의 총애를 업고 권세를 잡아 정사를 휘둘렀다.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신라 각지에 도적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 또 바닷길에는 백제 출신의 해적들이 수시로 출몰했다.

2. 궁사들의 연습장

과녁이 세워져 있고, 궁사들이 활시위를 당겨 활쏘기를 연습하고 있다.
궁사들의 긴장된 눈빛, 팽팽한 활 시위.
이중 형형한 눈빛의 거타지의 모습도 보인다.
날아가 과녁들을 맞추는 화살들. 거타지의 과녁은 명중이다.
양패가 시종을 데리고 연습장에 나타나 궁사들의 연습 광경을 지켜본다.
양패,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무관 : 여기서 훈련받고 있는 궁사들은 신라 전역에서 가장 빼어난 활솜씨를 가지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모두들 과녁에 명중시키지 않았습니까?
양패 : 참으로 솜씨가 훌륭하오. 여왕마마의 분부를 받자와 당나라 사신으로 가는 길에 호위를 맡을 궁사 50명을 뽑으러 왔소. 해적들을 상대해야 하니, 활 솜씨가 가장 출중한 궁사들을 특별히 선발해 주시오.
무관 : 알겠습니다. 아찬 나으리.

구진천

구진천 (무인) : 천보노의 발명 - 自作射, 遠射

신라 문무왕 때의 궁수로서, 습사하면서 승전의 방법을 고심하던 중 원사가 가능한 천보노를 발명하여 활 제작에 획을 그은 인물이다. 옹골찬 모습과 정밀한 손재주는 그의 예리한 눈빛과 작은 손에서 드러나며, 천보노에 대한 비법을 알려달라는 당주의 요구와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그의 용기는 큰 코와 귀, 넓은 이마에서 엿볼 수 있다. 의젓하고 참을성이 많은 그의 성품에 의해 천보노의 발명과 비법의 기밀 유지가 가능했음에 틀림없다.

원천자료

『삼국사기』권제 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44)
○ 九年, 春正月, 以信惠法師爲政官大書省, 唐僧法安來傳天子命, 求磁石, 二月二十一日, 大王會군臣, 下敎, 往者, 新羅隔於兩國, 北伐西侵, 暫無寧歲, 戰士曝骨積於原野, 身首分於庭界, 先王愍百姓之殘害, 忘千乘之貴重, 越海入朝, 請兵絳闕, 本欲平定兩國, 永無戰鬪, 雪累代之深수, 全百姓之殘命, 百濟雖平, 高句麗未滅, 寡人承克定之遺業, 終已成之先志, 今兩敵旣平, 四隅靜泰, 臨陣立功者, 병已酬賞, 戰死幽魂者, 追以冥資, 但囹圄之中, 不被泣辜之恩, 枷쇄之苦, 未蒙更新之澤, 言念此事, 寢食未安, 可赦國內, 自總章二年二月二十一日昧爽, 已前, 犯五逆罪死已下, 今見囚禁者, 罪無小大, 悉皆放出, 其前赦已後, 犯罪奪爵者, 병令依舊, 盜賊人但放其身 更無財物可還者, 不在徵限, 其百姓貧寒 取他穀米者, 在不熟之地者, 子母俱不須還, 若在熟處者, 至今年收熟, 只還其本, 其子不須還, □□[今月]三十日爲限, 所司奉行
夏五月, 泉井比列忽各連等三郡民饑, 發倉賑恤, 遣祇珍山級찬等, 入唐獻磁石二箱, 又遣欽純角干良圖波珍찬, 入唐謝罪, 冬, 唐使到, 傳詔, 與弩師仇珍川沙찬廻, 命造木弩, 放箭三十步, 帝問曰, 聞在爾國, 造弩射一千步, 今전三十步何也, 對曰, 材不良也, 若取材本國, 則可以作之, 天子降使求之, 卽遣福漢大奈麻, 獻木, 乃命改造, 射至六十步, 問其故, 答曰, 臣亦不能知其所以然, 殆木過海, 爲濕氣所侵者歟, 天子疑其故不爲, 겁之以重罪而終不盡呈其能, 頒馬거九, 一百七十四所, 屬所內二十二, 官十, 賜庾信太大角干六, 仁問太角干五, 角干七人各三, 伊찬五人各二, 蘇判四人各二, 波珍찬六人大阿찬十二人各一, 以下七十四所, 隨宜賜之
十年, 春正月 高宗許欽純還國, 留囚良圖, 終死于圓獄, 以王擅取百濟土地遺民, 皇帝責怒, 再留使者, 三月, 沙찬薛烏儒與

원문번역

○ 9년 정월에 信惠法師(신혜법사)로 政官大書省[정관대서성:僧職(승직)]을 삼았다.
唐僧(당승) 法安(법안)이 와서 천자의 명령으로 磁石(자석)을 구하였다. 2월 21일에 大王(대왕)이 군신을 모아 놓고 下敎(하교)하기를, "지난날에 新羅(신라)가 二國[이국:高句麗(고구려)·百濟(백제)]과 절교하여 北伐西侵(북벌서침)에 잠시도 편안할 때가 없으니, 전사들의 해골은 原野(원야)에 쌓여 있고 그들의 몸과 머리는 庭界(정계:먼 곳)에 분재하여 있다. 先王[선왕:武烈王(무열왕)]이 백성의 잔해를 민망히 여겨 千乘國[천승국:諸侯國(제후국)]의 귀중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건너 中國(중국)에 가서 兵(병)을 帝闕(제궐)에 청하였던 것은, 본래 (그 본의가) 二國(이국)을 평정하여 길이 싸움을 없애고 누대의 깊은 원수를 갚고 백성의 殘命(잔명)을 보전하려 함이었다. (그 때) 百濟(백제)는 평정하였으나 高句麗(고구려)는 아직 멸치 못한 채로 있었는데, 내가 그(先王(선왕)의) 克定(극정)하신 유업을 이어 기성의 先志(선지)를 마쳤다. 지금 두 적이 平定(평정)되고 사방이 안정하니, (앞서) 적진에 공을 세운 자에게는 이미 다 賞(상)을 주었고, 전사한 혼령에게는 冥資(명자:死者(사자)의 이바지)로써 추증하였다. 그러나 (저) 감옥 속에서는 (아직) 泣辜(읍고)의 恩(은)을 입지 못하고, 枷솨(가솨)의 고통을 받는 자가 아직 갱신의 惠澤(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이를 생각할 때 침식이 편안치 못하니, 국내의 죄수를 특사하여 總章(총장) 2년 2월 21일(즉 下敎(하교) 당일) 未明(미명) 이전에 五逆(오역)·死罪(사죄) 이하를 범한 자로 방금 갇혀 있는 자는 죄의 大小(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놓아 주고, 앞서 대사 이후에 죄를 범하여 관작을 피탈한 자는 다 복구케 하고, 도적죄인은 단지 그 몸만을 석방하니 [盜物(도물)을] 변상할 재산이 도무지 없는 자는 징수할 한에 있지 아니하며(즉 물리지 아니할 것이며), 또 (가세가) 빈한하여 남의 미곡을 취하여 먹은 자로 농작이 부실한 곳에 있는 자는 元(원)·利(이)를 갚지 아니해도 좋고, 만일 농작이 잘 되는 곳에 있는 자는 금년 추수 때에 단지 그 본곡만 갚고 이식은 물지 말 것이니, (금월) 30일을 기한으로 하여 所司(소사)는 [이상 敎命(교명)을] 봉행하라" 하였다.
5월에 泉井[천정:지금의 德源(덕원)]·比[비[列忽(열홀)]:지금의 安邊(안변)]·各連[각연:지금의 淮陽(회양)] 등 3군에 기근이 있어, [王(왕)은] 창름을 열고 구휼하였다.
級飡(급찬) 祇珍山(기진산) 등을 당에 보내어 자석 두 상자를 바치고, 또 角干(각간) 欽純(흠순)과 波珍飡(파진찬) 良圖(양도)를 당에 보내 사죄하였다.
겨울에 당의 사신이 와서 詔書(조서)를 전하고 弩師[노사:쇠뇌의 名手(명수)] 仇珍川(구진천) 沙飡(사찬)을 데리고 가서, 帝命(제명)으로 木弩(목노)를 만들게 하여 쏘아보니 30보밖에 가지 아니하였다. 唐帝[당제:高宗(고종)]가 묻기를 "너의 나라에서 만든 쇠뇌는 1,000보를 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겨우 30보밖에 가지 아니하니 무슨 까닭이냐"고 하였다. [仇珍川(구진천)이] 대답하기를, "재료가 좋지 못한 때문이니, (만일) 목재를 본국에서 가져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였다. 天子[천자:唐主(당주)]가 사신을 보내어 목재를 구하니, [王(왕)은] 곧 大奈馬(대내마) 福漢(복한)을 보내어 나무를 바쳤다. [唐主(당주)가] 다시 만들게 하여 쏘아보니 60보에 이르고 말았다. (또) 그 까닭을 물으니, [仇珍川(구진천)이] 대답하기를, "臣(신)도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겠으나, 아마 그 목재가 바다를 거쳐 올 때 습기를 머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였다. 天子(천자)는 그가 일부러 하지 않는 줄로 의심하여 중죄로써 위협하였으나, 마침내 그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였다.
[王(왕)이] 마거(말 외양간) 凡(범) 174소[所(소)]를 나누어주되, 屬所(속소) 안에 22소, 官[관:宮(궁)]에 10소, 太大角干(태대각간) 庾信(유신)에게 6소, 太角干(태각간) 仁問(인문)에게 5소, 角干(각간) 7명에게 각 3소씩, 供[공:伊(이)]찬 5명에게 각 2소씩, 蘇判[소판:잡飡(잡찬)] 4명에게 각 2소씩, 波珍飡(파진찬) 6명과 大阿飡(대아찬) 12 명에게 각 1소를 주고, 나머지 74소도 적당히 나누어 주었다.
10년 정월에 唐高宗(당고종)이 (앞서 謝罪使(사죄사)로 갔던) 欽純(흠순)에게 환국을 허락하고, 良圖(양도)는 감옥에 가두더니 마침내 원옥[圓形(원형)의 獄(옥)]에서 죽었다. (이는)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유민을 약취했기 때문에 唐帝(당제)가 노하여 재차 使者(사자)를 머물게 한 것이다.
3월에 사찬 薛烏儒(설오유)가 고구려 太延武(태[大兄高(대형고)]연무)와 더불어 각각 정병 1만 명을 이끌고 鴨록江(압록강)을 건너 屋骨(옥골)[缺字(결자)]에 이르니, 靺鞨(말갈) 군사가 먼저 皆敦壤(개돈양)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4월 4일에 이[靺鞨(말갈)]와 마주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기고 참획함이 이루 셀 수 없었으며, 당의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가 白城(백성)을 보전하였다.
6월에 高句麗(고구려) 水臨城(수림성) 사람 年岑(연[牟(모)]잠) 大兄[대형:高句麗(고구려) 官名(관명)]이 유민을 수습하여 窮牟城(궁모성)으로부터 浿江(패강: 지금의 大同江(대동강)) 남쪽에 이르러 당의 관리와 승려 法安(법안) 등을 죽이고 新羅(신라)로 향하여 西海(서해: 黃海(황해)) 史冶島(사야도)에 이르러 고구려 大臣(대신) 淵淨土(연정토)의 아들 安勝(안승)을 만나 漢城(한성: 廣州(광주))으로 맞아들여 임금을 삼고 小兄[소형:高句麗(고구려) 官名(관명)] 多式(다식) 등을 (신라의 서울에) 보내어 애절히 말하기를,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게 하는 것은 천하의 公義(공의)이므로 오직 大國[대국:新羅(신라)]을 바랄 뿐입니다. 우리 나라의 先王(선왕)은 도를 잃어 멸망하였으므로, 지금 臣(신) 등이 본국 貴族(귀족)의 安勝(안승)을 얻어 받들어 임금을 삼았으니 (貴國(귀국)의) 藩屛(번병)이 되어 영세토록 충성를 다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왕은 그를 나라 서쪽 金馬渚[금마저:益山(익산)]에 살게 하였다.
漢祇部(한기부: 國都(국도) 六部(6부) 중 하나)의 여자가 한꺼번에 3남 1녀를 낳으니, [王(왕)이] 조 200석을 하사하였다.
7월에 왕이 百濟(백제)의 잔당이 배반할 것을 의심하여, 大阿飡(대아찬) 儒敦(유돈)을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니, 듣지 않고 司馬稱녜軍(사마칭녜군):百濟人(백제인)]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다.
왕이 우리를 도모하려 함을 알고 稱軍(칭녜군)을 머물러 두어 보내지 아니하고, 군사를 움직여 백제를 토벌하였다. 그리하여 品日(품일)·文忠(문충)·衆臣(중신)·義官(의관)·天官(천관) 등은 63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 인민을 내지(新羅(신라)]로 옮기고, 天存(천존)·竹旨(죽지) 등은 7성을 빼앗고 2,000명의 목을 베었으며, 軍官(군관)·文穎(문영)은 12성을 빼앗고 狄兵[적병:唐軍(당군)에 속한 蕃兵(번병)]을 쳐서 7,000명의 목을 베고 전마와 병기를 얻음이 매우 많았다.
왕이 (戰地(전지)에서) 돌아올 때, 衆臣(중신)·義官(의관)·達官(달관)·興元(흥원) 등이 (이 戰役(전역)에 있어) □□[王興(왕흥)] 寺營(사영)에 퇴각한 일이 있었으므로 그 죄가 당연히 사형에 처할 것이나 特赦(특사)하여 면직만 시켰다. 倉吉于□一(창길우[缺字(결자)]일)에게 각각 級飡(급찬)의 位(위)를 주고 粗(조)를 내리되 차등을 두었다.
[王(왕)이] 사찬 須彌山(수미산)을 보내어 안승을 봉하여 고구려왕을 삼았다. 그 冊命文(책명문)에 이르기를 "咸亨(함형) 元年(원년)[唐高宗(당고종) 年號(연호)] 歲次(세차) 庚午(경오) 8월 1일 辛丑[신축:日辰(일진)]에 신라왕은 고구려 嗣子(사자) 안승에게 冊命(책명)을 보낸다. 公(공)의 太祖(태조) 中牟王(중모왕)이 (일찍이) 德(덕)을 比(北)山[비(북)산:北方(북방)]에 쌓고 功(공)을 南海[남해:南方(남방)]에 세워, 그 威風(위풍)은 靑丘(청구)에 떨치고 仁敎(인교)는 玄도(현도)에 덮였으며, (그 후) 자손이 相承(상승)하고 本支[본지:本孫支孫(본손, 지손)]가 不絶(부절)하여, 개척한 땅이 천리나 되고 歷年(역년)이 거의 800년이 되려 하더니, 男建(남건)·男産(남산) 형제에 이르러 蕭墻(소장)에서 禍(화)가 일어나고 骨肉(골육) 사이에 不和(불화)가 생기어, 집과 나라가 파멸되고 宗廟(종묘)와 社稷(사직)이 없어지고, 生人(생인)들이 波蕩[파탕:動擾(동요)]하여 마음을 붙일 곳이 없을새, 公(공)은 山野(산야)로 危難(위난)을 피하다가 隣國(인국: 新羅(신라))으로 외로운 몸을 던져 오니, 그 流離辛苦(유리신고)는 (마치) 晉文公(진문공)의 事迹(사적)과 같고 亡國(망국)을 다시 일으킴은 衛侯(위후)의 事實(사실)과 비슷하다. 무릇 백성은 임금이 없어서는 아니되고, 하늘은 반드시 (사람을) 돌보아 命(명)함이 있는 것이다. 先王[선왕:寶臧王(보장왕)]의 正嗣(정사)로는 오직 公(공)이 있을 뿐이요, 제사를 맡을 이도 公(공)이 아니고 누구이랴. 삼가 사신 一吉飡(일길찬) 金須彌山(김수미산) 등을 보내어 策[책:封冊書(봉책서)]을 펴서 公(공)으로 高句麗王(고구려왕)을 삼으니, 公(공)은 마땅히 遺民(유민)을 撫集(무집)하고, 舊緖(구서)를 繼興(계흥)하여 길이 인國(인국)이 되어 형제와 같이 밀접히 할지어다. 공경하고 공경하라. 겸하여 粳米(갱미:멥쌀) 2,000석과 甲具馬(갑구마:武裝(무장)한 말) 1匹(필)과, 綾織(능직) 5필, 絹織(견직)·細布(세포) 각 10필, 綿(면) 15稱(칭: 백 근)을 보내니 왕은 領受(영수)하라" 하였다.
12월에 土星(토성)이 달을 범하고,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中侍(중시) 智鏡(지경)이 퇴관하였다.
왜국이 국호를 고쳐 日本(일본)이라 自言(자언)하였는데 (그 나라가) 해 나오는 곳에 가까운 까닭으로 그와 같이 이름지은 것이라 한다.
漢城州摠管(한성주총관) 藪世(수세)가 백제(□□□)를 약취하여 [本國(본국)을 배반하고] 그 곳으로 가려다가 일이 발각되니 [王(왕)이] 大阿飡(대아찬) 眞珠(진주)를 보내어 藪世(수세)를 죽였다[註(주) 缺字(결자) 未詳(미상)]. [是歲(시세)]

시나리오

등장인물
구진천 : 신라의 궁수, 천보노 제작자 노모: 구진천의 어머니
김유신 : 신라의 장군 문무왕 : 삼국통일을 이루는 신라왕
당황제 : 당 고종 소정방 : 당나라 장군으로 신라군과 함께 평양성 함락
사신 : 당나라 사신

1. 평원 (여름)
시야가 툭 트인 평원.
구진천이 멀리 활시위를 당긴다. 긴장한 표정.
화살이 날아가더니, 나무 위에 매달린 사과를 관통한다.
구진천, 달려가서 사과를 줍는다. 그리고 자신이 쏘던 곳까지 걸음을 세어본다.

구진천 : (걸으며) 음, 화살이 겨우 오십보 밖에 못 나가는구나.


구진천, 굳은 표정으로 주변에 쌓아놓은 나무 무더기에서 나무 하나를 들고 칼로 깎기 시작한다.

2. 평원-저녁
노모가 구진천을 찾으러 온다. 여전히 활을 만드는데 열중하고 있는 구진천.
여러 두께, 여러 형태의 활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노모 : 진천아. 저녁 식사 때가 되었는데도 집에 내려오질 않아서 걱정이 되어 찾아왔구나.
구진천 : 어, 어머님! 벌써 식사 때가 됐습니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노모 : 여태껏 무얼 만들고 있는 게냐?
구진천 : 활을 만들고 있습니다.
노모 : 활이라니? 넌 원래 활을 잘 만들지 않느냐? 집에서도 할 수 있는 걸 여기서....
구진천 : 새로운 활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오십보, 백보까지 밖에 못 나가는 활이 아니라 천 보 정도 멀리 날아가서 맞추는 그런 힘센 활을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노모 : 천 보? 그렇게 멀리 나가는 활을 어떻게 만든단 말이냐? 넌 원래 눈썰미와 손재주가 뛰어나 온갖 것을 잘 만들곤 했다만 천 보 나가는 활은 무리일 것 같구나.
구진천 : 꼭 만들고 말 겁니다. 그래야만 고구려의 차디찬 땅 아래 묻혀 있는 형님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거에요.
노모 : (눈물 그렁) 휴.....전쟁이 언제나 끝날지.....걱정이구나. 또 전쟁이 일어나면 너도 다시 전쟁터에 나가야 할 터인데.....
구진천 :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 건 사내대장부의 명예입니다. 하지만, 형님이 고구려군의 화살에 맞아 목숨을 거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전 결심했어요. 아주 멀리 나가는 활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들겠다고. 그런 활이 있다면, 멀리서도 적을 쏘아 거꾸러뜨릴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 신라군의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잖겠습니까?

고이왕

고이왕 (왕) : 마한 정벌 - 命中, 狩獵射

고이왕은 백제의 제8대왕으로, 3년 겨울 10월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할 때 사슴 40여 마리를 잡을 정도로 활을 잘 쏘았으며, 7년 가을 7월에 석천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할 때 날아오르는 기러기 두 마리를 명중시킬 만큼 사예가 뛰어난 인물이다. 언제나 신하들과 백성들을 헤아리는 아량을 잃지 않았으며 그러한 넓은 마음씨는 얼굴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입가에 띤 가벼운 미소와 느리지만 위엄 있는 몸짓, 지그시 떴다 감는 눈에서 바다 같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원천자료

『삼국사기』권제 24, 백제본기 제2, 고이왕
○ 古이王, 蓋婁王之第二子也, 仇首王在位二十一年薨, 長子沙伴嗣位, 而幼少不能爲政, 肖古王母弟古이卽位
三年, 冬十月, 王獵西海大島, 手射四十鹿
五年, 春正月, 祭天地, 用鼓吹, 二月, 田於釜山, 五旬乃返, 夏四月, 震王宮門柱, 黃龍自其門飛出
六年, 春正月, 不雨, 至夏五月乃雨
七年, 遣兵侵新羅, 夏四月, 拜眞忠爲左將, 委以內外兵馬事, 秋七月, 大閱於石川, 雙안起於川上, 王射之皆中
九年, 春二月, 命國人, 開稻田於南澤, 夏四月, 以叔父質爲右輔, 質性忠毅, 謀事無失, 秋七月, 出西門觀射
十年, 春正月, 設大壇, 祀天地山川
十三年, 夏大旱, 無麥, 秋八月, 魏幽州刺史毋丘儉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十四年, 春正月, 祭天地於南壇, 二月, 拜眞忠爲右輔, 眞勿爲左將, 委以兵馬事
十五年, 春夏旱, 冬, 民饑, 發倉賑恤, 又復一年租調
十六年, 春正月甲午, 太白襲月
二十二年, 秋九月, 出師侵新羅, 與羅兵戰於槐谷西, 敗之, 殺其將翊宗, 冬十月, 遣兵攻新羅烽山城, 不克
二十四年, 春正月, 大旱, 樹木皆枯
二十五年, 春, 靺鞨長羅渴獻良馬十匹, 王優勞使者以還之
二十六年, 秋九月, 靑紫雲起宮東, 如樓閣
二十七年, 春正月, 置內臣佐平, 掌宣納事, 內頭佐平, 掌庫藏事, 內法佐平, 掌禮儀事, 衛士佐平, 掌宿衛兵事, 朝廷佐平, 掌刑獄事, 兵官佐平, 掌外兵馬事, 又置達率恩率德率한率奈率及將德施德固德季德對德文督武督佐軍振武克虞, 六佐平병一品, 達率二品, 恩率三品, 德率四品, 한率五品, 奈率六品, 將德七品, 施德八品, 固德九品, 季德十品, 對德十一品, 文督十二品, 武督十三品, 佐軍十四品, 振武十五品, 克虞十六品, 二月, 下令六品已上服紫, 以銀花飾冠, 十一品已上服緋, 十六品已上服靑, 三月, 以王弟優壽爲內臣佐平
二十八年, 春正月初吉, 王服紫大袖袍靑錦袴金花飾烏羅冠素皮帶烏韋履, 坐南堂聽事, 二月, 拜眞可爲內頭佐平, 優豆爲內法佐平, 高壽爲衛士佐平, 昆奴爲朝廷佐平, 惟己爲兵官佐平, 三月, 遣使新羅請和, 不從
二十九年, 春正月, 下令, 凡官人受財及盜者, 三倍徵贓, 禁錮終身
三十三年, 秋八月, 遣兵攻新羅烽山城, 城主直宣率壯士二百人, 出擊敗之
三十六年, 秋九月, 星패于紫宮
三十九年, 冬十一月, 遣兵侵新羅
四十五年, 冬十月, 出兵攻新羅, 圍槐谷城
五十年, 秋九月, 遣兵侵新羅邊境
五十三年, 春正月, 遣使新羅請和, 冬十一月, 王薨

원문번역

○ 古이王(고이왕)은 蓋婁王(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다. 仇首王(구수왕)이 在位(재위) 21년에 돌아가자 長子(장자) 沙伴(사반)이 位(위)를 계승하였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가 없으므로, 肖古王(초고왕)의 母弟(모제)인 古?(고이)가 즉위하였다.
3년 10월에 왕이 西海(서해)의 大島[대도:江華島(강화도) ]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쏘았다.
5년 정월에 天地(천지)에 제사지내는 데 鼓吹(고취:북과 피리)를 사용하였다.
2월에는 釜山[부산:振威(진위)]에서 사냥하고 五旬(오순:50일)만에 돌아왔다.
4월에 王宮(왕궁) 門柱(문주)에 落雷(낙뢰)가 있더니 黃龍(황룡)이 그 문에서 날아 나왔다.
6년 정월(부터) 비가 오지 않다가 5월에 가서야 비가 왔다.
7년에 군사를 보내어 新羅(신라)를 침범하였다.
4월에 眞忠(진충)을 左將(좌장)으로 삼아 내외의 兵馬事(병마사)를 맡겼다.
7월에 石川(석천:위치 미상)에서 군사를 大閱(대열)하였는데, 한 쌍의 기러기가 川上(천상)에서 날아 오르므로 왕이 쏘아 모두 맞히었다.
9년 2월에 나라 사람에게 명하여 南澤(남택)에다 논[稻田(도전)]을 개척하도록 하였다.
4월에 叔父(숙부) 質(질)을 右輔(우보)로 삼았는데, 質(질)은 성품이 忠毅(충의)롭고 謀事(모사)에 실수함이 없었다.
7월에는 西門(서문)을 나가 활 쏘는 것을 觀覽(관람)하였다.
10년 정월에 大壇(대단)을 베풀고 天地山川(천지산천)에 祭祀(제사)지냈다.
13년 여름에 크게 가물어서 보리가 여물지 않았다.
8월에 魏(위)의 幽州刺史(유주자사) 관丘儉(관구검)이 樂浪太守(낙랑태수) 劉茂(유무)와 朔(帶)方太守(삭(대)방태수)王(弓)遵(왕(궁)준)이 高句麗(고구려)를 치므로 왕은 그 틈을 타서 左將(좌장) 眞忠(진충)을 보내어 樂浪(낙랑)의 邊民(변민)을 쳐 빼앗았다. [劉(유)] 茂(무)가 듣고 怒(노)하니 왕이 침범할까 두려워하여 民口(민구)를 돌려주었다.
14년 정월에 南壇(남단)에서 天地(천지)에 祭祀(제사)지냈다.
2월에 眞忠(진충)을 拜(배)하여 右輔(우보)로 삼고, 眞勿(진물)을 左將(좌장)으로 삼아 兵馬事(병마사)를 맡겼다.
15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겨울에 人民(인민)이 굶주리므로 창름을 열어 賑恤(진휼)하고, 또 1년간의 租[조:地稅(지세)]와 調[조:戶稅(호세)]를 면제해 주었다.
16년 정월 甲午(갑오)에 太白[태백:金星(금성)]이 달[月(월)]을 범하였다.
22년 9월에 군사를 내어 新羅(신라)를 侵攻(침공)하여, 新羅兵(신라병)과 槐谷[괴곡:槐山(괴산)] 서쪽에서 싸워 이를 패배시키고, 그 將帥(장수) 翊宗(익종)을 죽였다.
10월에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烽山城[봉산성:榮州(영주)]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4년 정월에 크게 가물어 樹木(수목)이 모두 말랐다.
25년 봄에 靺鞨(말갈)의 長(장:두목) 羅渴(나갈)이 良馬(양마) 10필을 바쳤다. 왕이 使者(사자)를 후히 위로하여 돌려 보냈다.
26년 9월에 宮城(궁성) 동쪽에 靑紫色(청자색)의 구름이 일어났는데 마치 樓閣(누각)과 같았다.
27년 정월에 內臣佐平(내신좌평)을 두어 宣納(선납: 王命出納(왕명출납))에 관한 일을 맡고, 內頭佐平(내두좌평)은 庫藏[고장:財政(재정)]에 관한 일을 맡고, 內法佐平(내법좌평)은 禮儀[예의:禮式(예식)]에 관한 일을 맡고, 衛士佐平(위사좌평)은 宿衛兵[숙위병:親衛兵(친위병)]에 관한 일을 맡고, 朝廷佐平(조정좌평)은 刑獄[형옥:司法(사법)]에 관한 일을 맡고, 兵官佐平(병관좌평)은 外方(외방)의 兵馬[병마:軍事(군사)]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또 達率(달솔)·恩率(은솔)·德率(덕솔)·한率(한솔)·柰率(내솔) 및 將德(장덕)·施德(시덕)·固德(고덕)·季德(계덕)·對德(대덕)·文督(문독)·武督(무독)·佐軍(좌군)·振武(진무)·克虞(극우)를 두었다.
6佐平(좌평)은 모두 1品(품)이요, 達率(달솔)은 2품, 恩率(은솔)은 3품, 德率(덕솔)은 4품, 한率(한솔)은 5품, 柰率(내솔)은 6품, 將德(장덕)은 7품, 施德(시덕)은 8품, 固德(고덕)은 9품, 季德(계덕)은 10품, 對德(대덕)은 11품, 文督(문독)은 12품, 武督(무독)은 13품, 佐軍(좌군)은 14품, 振武(진무)는 15품, 克虞(극우)는 16품이었다.
2월에 令(영)을 내려 6品(품) 이상은 紫色(자색)을 입고, 銀花(은화)로써 冠(관)을 장식하며, 11품 이상은 緋色(비색)을 입고, 16품 이상은 靑色(청색)을 입게 하였다.
3월에 王弟(왕제) 優壽(우수)로 內臣佐平(내신좌평)을 삼았다.
28년 정월 初吉(초길)에 왕이 紫帶袖袍(자대수포)와 靑錦袴(청금과)·金花飾烏羅冠(금화식오라관)·素皮帶(소피대)·烏韋履(오위리)를 신고 南堂(남당)에 앉아 政事(정사)를 보았다.
2월에 眞可(진가)를 拜(배)하여 內頭佐平(내두좌평:財政(재정)을 掌(장)함)을 삼고, 優豆(우두)로 內法佐平[내법좌평:儀禮(의례)를 掌(장)함]을 삼고, 高壽(고수)로 衛士佐平[위사좌평:宿衛兵(숙위병)을 掌(장)함]을 삼고, 昆奴(곤노)로 朝廷佐平[조정좌평:刑獄(형옥)을 掌(장)함]을 삼고, 惟己(유기)로 兵官佐平[병관좌평:外方(외방)의 兵馬事(병마사)를 맡음]을 삼았다.
3월에 사신을 新羅(신라)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29년 정월에 令(영)을 내려, 무릇 官人(관인)으로 財物(재물)을 받은 자와, 도적질한 자는 臟物(장물)의 3倍(배)를 징수하고, 終身禁錮(종신금고)케 하였다.
33년 8월에 군사를 보내어 新羅(신라)의 烽山城[봉산성:榮州(영주)]을 공격하니, 城主(성주) 直宣(직선)이 壯士(장사) 200명을 거느리고 출격하여 我軍(아군)을 파하였다.
36년 9월에 패星[패성:彗星(혜성)]이 紫宮(자궁)에 나타났다.
39년 11월에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침범하였다.
45년 10월에 군사를 보내어 신라를 쳐서 槐谷城[괴곡성:槐山(괴산)]을 포위하였다.
(47년)
50년 9월에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53년 정월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11월에 왕이 돌아갔다.

시나리오

1. 궁궐

고이왕의 즉위식. 문무 백관이 도열해 있고,
악사들의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고이왕이 왕관을 받들어 쓴다.

내레이션 : 백제의 고이왕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다. 구수왕이 재위 21년에 돌아가자 장자사반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가 없으므로 초고왕의 어머니의 동생인 고이가 즉위하였다.

2. 강화도 산 속

고이왕 일행이 말을 타고 활을 쏘면서 사냥을 하고 있다.
몰이꾼들에 쫓긴 사슴들이 맹렬하게 도망간다. 이를 본 고이왕, 말을 달리면서 화살을 날 린다. 핑핑 날아가 꽂히는 화살, 사슴들이 쓰러진다.

3. 산 일각

고이왕 일행이 모두 모여서 사냥한 짐승들을 헤아려 보고 있다.

신하 : 대왕마마. 정말 대단하십니다. 사슴을 모두 마흔 마리나 잡으시다니요. 우리 백제에서마마의 활쏘기 실력을 능가할 자는 아무도 없나이다.
고이왕 : 하하하.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 보다 더 상쾌한 일은 없소. 국사에 지쳤던 심 신이,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고 나면 마치 봄 나무에 물이 오르듯 싱싱해지는 듯 하오.
신하 : 마마. 소신은 활 쏘기가 능숙하지 못한 터라 사냥을 마치고 나면 오히려 몸이 더 천 근만근 무거워지는 듯하옵니다. 오늘도 열심히 말을 달리고 화살을 날렸으나 기껏사슴 2마리, 꿩 1마리 밖에 못 잡았나이다.
고이왕 : 하하. 경은 활쏘기 연습에 매진하시오. 이 세상에 노력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게 어디 있겠소? 사냥을 하고 나면 천근만근 더 무거워진다니, 가뜩이나 무거운 몸을 어찌 움직이시려오? 사냥을 못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구려. 그처럼 몸이 무거워 서야 어디 천하의 명마인들 제 속력을 낼 수 있겠소?

다른 신하들, 모두 웃어댄다. 뚱뚱한 신하, 민망해서 고개를 움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