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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함유일

함유일 (무인) : 남루한 명궁 - 누더기 명궁, 命中

함유일은 청빈하고 공무에 충실한 무인으로, 밤낮으로 힘을 다하여 사사로운 일을 잊으며 습사를 했던 명궁이다. 집이 가난하여 늘 기운 옷과 뚫어진 신발을 신고 다녔지만 단정함을 잃지 않았다. 여러 장수와 병사들로부터 누더기기사라는 놀림을 받았지만,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청렴결백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옷의 기운 자국들은 훈장처럼 여겼고, 꿰맨 신발은 아름다운 문양이 들어간 것으로 생각하며, 사정에 올라 백발백중의 실력을 보란 듯이 발휘하여 매번 상을 휩쓸었다.

원천자료

『고려사』제99권, 열전 제12, 함유일
○ 咸有一恒陽人太祖功臣廣評侍郞規五世孫也父德候尙衣奉御同正有一早孤養於舅年十五至京父執宰相李俊陽憐而客之補吏部記官 仁宗十三年 西京反有一以胥吏從軍有功調爲選軍記事夙夜刻苦公耳忘私家貧常衣弊履穿時禁軍廚食不如式軍士議曰 若得弊衣記事必不如是 會兩府擧廉吏樞密使王충薦之上素聞名得之甚喜召入內侍勾當軍廚事 王嘗幸長源亭命近臣射有一中的受金帛不入於家盡賣之具軍廚什器後졸寶城廉勤有聲績毅宗朝復入內侍掌橋路都監.
有一嘗酷排巫覡以爲人神雜處人多疵려及爲都監凡京城巫家悉徙郊外民家所畜淫祀盡取而焚之諸山神祠無異跡者亦皆毁之 聞九龍山神最靈乃詣祠射神像旋風忽起闔門兩扇以防其矢又至龍首山祠試靈無驗焚之是夜王夢有神求救者翼日命有司復構其祠 轉監察御史出爲黃州判官屬郡鳳州有휴뢰岩淵世謂靈湫有一集郡人塡以穢物忽興雲暴雨雷電大作人皆驚부俄頃開霽悉出穢物置遠岸王聞之命近臣祭之始載祀典 又爲朔方道監倉使登州城隍神屢降於巫奇中國家禍福有一詣祠行國祭揖而不拜有司希旨劾罷之 明宗卽位召入內侍尋除兵部郞中時武夫執兵橫行街巷閒及見有一莫不倒兵而過遷累尙書左丞.
有良온令同正盧若純主事同正韓受圖詐爲有一及平章事李公升內侍郞將少監獨孤孝等書投忠州賊亡伊欲引與爲亂亡伊執其使送于安撫別監盧若순若충收械押還 王命承宣文章弼鞫之若純等曰 今弑君之賊當路爲大官吾輩不勝憤激欲引外賊與之誅剪顧吾輩名微恐或不從以有一公升等素有物望故詐爲其書耳 王聞而義之重房請治其罪皆겸配遠島若충以若純之兄亦坐黜中書門下又奏有一罪削內侍籍 九年 年踰七十乞退以工部尙書致仕十五年 卒年八十遺命薄葬.
有一平生衣用麻布器用陶瓦不事生産其妻謂之曰 諸兒欲及公生時頗立産業基址何不慮耶 答曰 予孤立無援勤儉守節以立門戶兒輩但當正直節儉以俟命耳何척척於貧구乎 子和曦淳淳登第以文章節行名於時.

원문번역

함유일은 항양(恒陽) 사람이며 태조의 공신인 광평 시랑 함규(規)의 5대손이다. 함규의 부친 함덕후(德侯)는 상의 봉어 동정(尙衣奉御同正)으로 있었다. 함유일은 서리(胥吏)로 종군하여 공이 있어 선 군기사(選軍記事)로 조동되어 밤낮으로 근고를 다하여 공사에 힘썼으며 자기의 일은 생각지도 않았다. 집이 빈한하여 항상 해진 옷을 입고 꿰인 신을 신었다. 당시에 금군(禁軍)들의 식사를 규정대로 주지 않았는데 군사들이 의논하기를 “만약 저 헌 옷 입은 기사(記事)가 식사를 맡는다면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 양부(兩府)에서 청렴한 아전을 추천하는 때이므로 추밀사 왕충(王沖)이 그를 추천하였다. 임금도 평소에 그의 이름을 듣고 있던 터이라 그를 얻은 것을 대단히 기뻐하며 내시(內侍)로서 불러들여 군위사(軍尉事)를 맡겼다. 왕이 일찍이 장원정(長源亭)에 놀러 가서 근신들에게 활을 쏘게 하였는데 함유일이 과녁을 맞히고 금과 비단을 상 받았다. 그러나 자기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모두 팔아서 군위(軍尉)에 쓸 즙기(什器)를 사는 데 썼다. 후에 보성(寶城) 원으로 가서도 청렴하고 근실하여 성적을 올렸다. 의종 때에 다시 내시로 들어가서 교로 도감(橋路都監)을 맡게 되었다. 함유일은 그 전부터 혹독하게 무당을 배척하였는데 그 까닭은 인간과 귀신이 함께 뒤섞이어 있으면 인간에게 재변이 많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도감이 된 후 서울에 있는 무당들이 모두 교외(시외)로 이사하였다. 그는 민가에 있는 음사(淫祀)를 모조리 없애고 불에 태워 버렸다. 그리고 각 처의 산신당(山神祠)들도 특이한 증험이 없는 것은 역시 파괴하여 버렸다. 구룡산(九龍山) 산신(神)이 가장 영검스럽다는 소문을 듣고 산신당으로 가서 귀신의 화상을 활로 쏘았더니 갑자기 선풍이 일어나고 두 짝 문이 닫히면서 화살을 막아 냈다. 또 한 번은 용수산 산신당에 가서 영험을 시험한 결과 신통치 않으므로 불태워 버렸더니 그 날 밤에 왕의 꿈에 신이 나타나 구원을 청하였으므로 이튿날 유사(有司)를 보내 산신당을 다시 세웠다. 후에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전직하였다가 황주 판관(黃州判官)으로 나가 있을 때에 관내에 속한 봉주(鳳州) 현에 휴류암연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영추(靈湫)라고 불렀다. 함유일이 고을 안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 못을 오물로 메꾸었더니 삽시간에 구름이 일어나고 폭우가 쏟아지며 뇌성 번개가 한바탕 치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 넘어졌다. 조금 지나 구름이 개인 후에 본즉 그곳에 메꾸었던 오물이 깨끗이 몰려 나와 먼 언덕 위에 쌓여 있었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근신(近臣)을 보내 제사 지내게 하고 휴류암추를 처음으로 사전(祀典)에 등록하였다. 또 한 번은 삭방도 감창사(朔方道監倉使)로 있을 때 등주 성황신(登州城隍神)이 여러 번 무당에게 내려 국가의 길흉과 화복을 신통히 알아 맞추었다. 함유일이 성황당으로 가서 국제(國祭)를 지낼 때 읍(揖)만 하고 절하지 않았더니 유사가 왕의 칭찬이나 받을까 생각하고 탄핵하였으므로 그는 파면당하였다. 명종이 왕위에 즉위한 후 그를 내시로 불러 들였다가 미구에 병부 낭중(兵部郞中)으로 임명하였다. 그때 무관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거리로 횡행하였는데 함유일을 보기만 하면 모두 무기를 감추고 지나갔다. 여러 번 승직하여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되었다. 양온령 동정 노약순(盧若純)과 동정 한수도(韓受圖)란 자들이 함유일과 평장사 이공승(平章事 李公升), 내시 낭장 소감(內侍 郞將少監) 독고효(獨孤孝) 등의 명의로 된 편지를 위조하여 충주(忠州)에 있는 반란적 망이(亡伊)에게 보내 그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런데 망이가 그들의 사환꾼을 붙잡아 안무 별감 노약충(按撫別監 盧若沖)에게로 이송하였으므로 노약충이 그 자에게 큰 칼을 씌워 서울로 압송하였다. 왕이 승선 문장필(承宣 文章弼)에게 지시하여 국문케 하였더니 노약순 등이 진술하기를 “이제 국왕을 살해한 적들이 집권하여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우리들이 분함을 참지 못하여 지방의 반란 적을 끌어 그들과 합력하여 적을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명이 없는 사람이라 혹시 복종하지 않을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러나 함유일과 이공승 같은 분은 전부터 명망이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위조 편지를 썼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함유일 등을 의롭게 생각하였다. 중방(重房)에서 그들의 처형을 청하여 죄인들의 이마에 모두 자자하여 먼 섬으로 귀양 보냈으며 노약충은 노약순의 형이므로 역시 철직되었다. 또 중서문하(中書門下)에서도 함유일의 죄과를 왕에게 보고하여 왔으므로 그를 내시의 적(籍)에서 제명하였다. 9년에 함유일의 나이 70이 넘었으므로 퇴직을 신청하여 공부 상서(工部尙書) 벼슬로써 치사하였다. 15년(1185년)에 향년 80세로 죽었는데 자기의 장례를 검박하게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 함유일은 평생에 베옷을 입고 식기는 오지 그릇을 사용하였고 자기 집 살림살이는 돌보지 않았다. 그의 처가 말하기를 “아이들은 당신이 생존하실 때에 살림 밑천이라도 장만하려고 하는데 왜 그런 일은 생각하지 않으시오?”하니 함유일이 대답하기를 “나는 평생에 나 홀로서 누구의 원조도 받지 못하였으며 다만 근검하고 지조를 지킴으로써 문호를 세웠다. 아이들도 그저 정직하고 절약하며 검박한 생활로써 운명을 기다릴 것이니 어찌 빈곤한 것을 걱정하는가?”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은 함화(咸和), 함희(咸曦), 함순(咸淳)이 있는데 함순은 문장과 지조로 당시에 이름이 있었다.

시나리오

등장인물
함유일 : 고려 무인, 누더기 명궁 아내 : 함유일의 아내
장수 : 고려 무인 왕 : 고려 왕, 의종
친구 : 함유일의 친구 장충 : 고려 추밀사
무당 부하
금군1, 2

1. 고려 거리
누더기 옷에 해진 신발을 신은 함유일이 활을 어깨에 메고 걸어간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장수가 웃음을 터트린다.

장수 : 아니, 함유일 기사 아니오? 하하하. 누더기 기사구만!
함유일 : 안녕하시오?
장수 : 그래, 아무리 가세가 빈한하기로 새옷 하나 없단 말이오? 그따위 누더기 옷으로 다니면, 백성들이 우리 무인을 뭘로 보겠소? 옷에서 품위와 인격이 나오는 법 아니오?
함유일 : 내 옷이 어떻다고 그러시오? 비록 새옷을 지을 형편이 못되어 헌옷을 입고 다니지만 깨끗하고 단정하게 차리고 다니는데 무슨 품위와 인격이 떨어진단 말이오?
장수 : 허, 참 꼭 막히긴. 이것 봐요. (속삭이는) 군사들의 식비나 군량미를 조금만 덜어내면 새옷에 새 신발에 무인의 품위를 지키고 다닐 수 있지 않겠소? 내 하도 딱해 보여서 요령을 일러주는 것이오.
함유일 : 아니, 나라에서 녹을 타 먹고 살면서 어찌 공금에 손을 댄단 말이오? 난 이 차림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으니 마음이 천하를 얻은 듯 자유롭다오.
장수 : 에잉! 혼자 잘난 척 하기는! 누더기 기사, 잘 가시오!

김윤후

김윤후 (무인) : 승려의 투혼 - 遠射

고종 때 사람으로 승려였으나 몽고군의 침입에 분노하고 사력을 다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처진 눈과 긴 눈썹, 승복 차림에서 발산되는 무장의 투혼은 몽고군을 격퇴시키기에 충분하며, 특히 파르라니 깎은 그의 머리는 승전에 대한 강한 다짐을 나타내는 듯하다. 또한 백발백중의 원사가 가능하게 했던 긴 팔과 굵은 다리의 힘은 기습하여 몽고의 장수 살례탑을 쏘아서 적이 스스로 물러나가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청렴결백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인민을 보듬는 애민 정신은 전장에서 장수와 병사를 독려하는 근본이라 하겠다.

원천자료

『고려사』제103권, 열전 제16, 김윤후
○ 金允侯高宗時人嘗爲僧住白峴院蒙古兵至允侯避亂于處仁城 蒙古元帥撒禮塔來攻城允侯射殺之 王嘉其功授上將軍允侯讓功于人曰 當戰時吾無弓箭豈敢虛受重賞 固辭不受乃改攝郞將 後爲忠州山城防護別監蒙古兵來圍州城凡七十餘日糧儲幾盡 允侯諭厲士卒曰 若能效力無貴賤悉除官爵 爾無不信 遂取官奴簿籍

원문번역

김윤후는 고종 때 사람으로서 일찍이 승려로 되어 백현원(白峴院)에 있었는데 몽고병이 오자 김윤후는 처인성(處仁城-용인)으로 피난 가서 있었다. 몽고 원수 살례탑이 그곳을 공격하여 왔을 때에 김윤후가 그를 격살하였다. 왕이 그의 공을 기특히 여겨 상장군의 직을 수여하였더니 김윤후가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전투할 때에 나는 활이나 화살도 갖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귀중한 상(賞)만 받겠느냐?”라고 하며 굳이 받지 않으므로 다시 섭 낭장(攝郎將) 벼슬로 고쳐 주었다. 후에 충주 산성(忠州山城) 방호 별감(防護別監)으로 임명되었는데 몽고 병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 공격한 지 무려 70여 일이 되어 성내에는 식량도 거의 다 먹었을 때었다. 김윤후가 병사들을 격려하여 말하기를 “누구든지 힘을 다 바쳐 싸우는 사람이라면 귀천의 차별이 없이 모두 벼슬과 작위를 주겠다. 너희들은 내 말을 의심하지 말라!”고 하고 드디어 관노(官奴)를 등록한 장부를 불에 태워 버렸으며 또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있는 힘을 다하여 적을 공격하였으므로 몽고 군의 기세가 적이 좌절되어 드디어 남으로 향하지 못하였다. 이런 공으로 김윤후는 감 문위 상장군(監門衛上將軍)으로 승진되고 기타 군공이 있은 사람들에게는 관노(官奴)와 백정(白丁)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에 따라서 차등 있게 관직을 주었다.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되었으나 당시 동북면(東北面)은 이미 몽고 병에게 함락되어 있었으므로 부임하지 않았다.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로 있다가 치사하였다.

시나리오

1. 절 대웅전 안.

승려 김윤후가 염불을 외며 부처님께 절하고 잇다.

2. 절 문앞

뛰쳐 들어오는 승려
다급하게 대웅전을 향해 뛰어간다. 멀리서 몽고군의 함성 들려온다.

3. 대웅전

승려 : 이보게! 지금 몽고군이 쳐들어오고 있네. 빨리 몸을 피해야만 하네! 산 아래 동네에 서 보니, 몽고군들의 잔학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네. 닥치는 대로 불태우고 아녀자를 죽이고....그놈들은 우리 승려도 가만 안놔둘 걸세.
윤후 : (탄식하며) 어허!......우리 고려의 강토가 어쩌다가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히게 되 었단 말인가.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하셨으나. 우리 백성이 잔학 한 몽고군에게 짓밟히고 죽음을 당하고 있으니, 소승, 가만히 절에 들어앉아 있을 수 없나이다. 부처님, 우리 고려를 지켜 주소서.

이춘

이춘 (종친) : 용을 쏘다 - 命中(龍)

이성계의 祖父인 이춘은 작고 마른 체구이지만, 대범하고 과묵하며 대의를 우선시하는 명궁이다. 화살집에서 살을 빼는 순간순간에도 분수와 도리를 생각하는 신중함과 함께 냉철한 판단력을 소유하였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도 넓고 깊은 인물이다. 인자한 모습과 용과의 대면에서도 떨지 않는 용기 그리고 여유 때문에, 활시위를 떠나 간 화살이 표적에 당도하기까지 웃을 것만 같다. 아니 표적을 명중시킨 후에도 화살촉은 해맑게 미소 지을 것만 같다.

원천자료

『태조실록』총서18
○ 度祖 夢有告之者曰: “我白龍也。 今在某處, 黑龍欲奪我居, 請公救之。” 度祖 覺以爲常而不異之。 又夢白龍復來懇請曰: “公何不以我言爲意?” 且告之日。 度祖 始異之, 至期, 帶弓矢왕觀之, 雲霧晦冥, 有白黑二龍, 方鬪淵中。 度祖 射黑龍, 一矢而斃, 沈于淵。 後夢白龍來謝曰: “公之大慶, 將在子孫。”

원문번역

도조의 꿈에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백룡(白龍)입니다. 지금 모처(某處)에 있는데, 흑룡(黑龍)이 나의 거처를 빼앗으려고 하니, 공(公)은 구원해 주십시오.” 하였다. 도조가 꿈을 깨고 난 후에 보통으로 여기고 이상히 생각하지 않았더니, 또 꿈에 백룡이 다시 나타나서 간절히 청하기를, “공은 어찌 내 말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면서, 또한 날짜까지 말하였다. 도조는 그제야 이를 이상히 여기고 기일이 되어 활과 화살을 가지고 가서 보니, 구름과 안개가 어둑컴컴한데, 백룡과 흑룡이 한창 못 가운데서 싸우고 있었다. 도조가 흑룡을 쏘니, 화살 한 개에 맞아 죽어 못에 잠기었다. 뒤에 꿈을 꾸니, 백룡이 와서 사례하기를, “공의 큰 경사(慶事)는 장차 자손에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시나리오

이 춘

1. 산 속(함경도)-겨울
이춘이 아들 자춘(소년)과 함께 말을 달리며 사냥하고 있다.
멧돼지를 쫓아 말을 달리며 옆으로 화살을 시위에 대어 쏜다. 화살이 날아가 멧돼지에 명 중한다.


이자춘 : 와! 멧돼지를 맞췄어요!
이춘 : 오늘 사냥은 아주 성과가 좋구나. 함경도 산은 산세가 깊어서 그런지 맹수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사냥할 만 하다.
하인 : 나리! 오늘 정말 많이 잡았는뎁쇼. 나리는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이니, 과연 천하의 명궁이십니다요!
이춘 : 사냥감들을 다 실어라. 그래, 숙소는 마련해 놓았느냐?
하인 : 그러믄요. 요 산 아래 약초 영감 집에서 묵어가도록 준비해놓았습니다요. 지금 내려 가면 아마 방이 절절 끓고 있을 겁니다요.


2. 산 아래 오두막 앞
이춘 일행이 당도한다. 오두막 주인이 기다리고 있다 절한다.


주인 : 나리. 누추하지만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들어가 쉬십시오. 곧 저녁을 해 올리겠 습니다.
이춘 : 고맙소.


3. 방 안
이부자리가 둘, 정갈하게 펴 있다.


이자춘 : 아버님. 피곤하시지요?
이춘 : 그래, 좀 피곤하구나. 너는 오늘 사냥을 직접 따라나와 보니 어떠냐?
이자춘 : 아버님 활 솜씨가 뛰어나단 말씀을 듣긴 했지만 직접 옆에서 보니, 정말 가슴이 다 떨렸습니다. 말 달리면서 옆으로 쏘고, 뒤로 돌려서 쏘고, 어떻게 하면 소자도 그 런 뛰어난 활 솜씨를 가질 수 있을까요?
이춘 : 하하하. 활솜씨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질 리가 있느냐. 그저 부단한 연습밖에 없느 니라. 말과 내 몸이 한몸처럼 되어 같이 호흡하며 달리고, 마음을 집중하여 마음의 눈으로 보면 쏘아야 할 곳으로 화살이 정확히 날아가는 거다.
이자춘 : 소자도 앞으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열심히 단련하겠어요.
이춘 : 그래야지. 자, 밤이 늦었다. 불을 끄거라.


이자춘, 호롱불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