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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장의 활터

활터구조

사정에는 官設射亭과 民間射亭이 있다. 고려 선종 8년(1091) 戶部南廊에 사장이 설치되어 군졸과 일반 백성들이 習射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이 국가가 도성 내 활터를 설립한 시초이다.

조선 태조는 서울을 한양으로 옮기고 도성 동편에 敎場인 훈련원을 설립하였다. 태종은 이곳에 射廳을 세우고 무과의 시험장소로 정하였으며, 동시에 무인과 군졸이 습사할 수 있게 하여 최초의 관설사장이 되었다. 궁중의 관설사장으로는 창경궁 후원의 春塘臺 1) 를 들 수 있는데, 이곳에서 閱武 2) 와 試射를 행하거나 또는 왕이 직접 親射하였다.

효종 때는 昌慶宮內司僕에 사정을 특설하여 內乘 3) )과 別軍職 등의 관리가 습사하도록 하였고, 1868년(고종 5) 경복궁 내에 景武臺를 설치하여 文武科試와 열무를 행하였다.

지방의 사장으로는 營·州·府·牧의 소재지에 將臺·鍊武臺·觀德亭 등의 관설사정이 있어 練兵講武 이외 장교와 軍民이 습사를 행하였다.

민간사정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 때 백성들의 尙武心을 진작시키기 위하여 경복궁 東墻 안에 五雲亭을 세우고 이것을 개방하여 백성들의 습사를 장려한 것이 그 시초이고, 그 뒤 인조·효종·현종 때 무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여러 곳에 세워졌다.

그 중 도성 내외에 있는 사정에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上村(서울 성내의 북서쪽 지역)의 백白虎亭, 下村(동남쪽 지역)의 石虎亭, 서대문 밖의 盧知射亭, 그리고 江郊(한강주위 지역)의 楓碧亭 등이 있었다. 이 네 개의 사정 이외 도성 내의 南村에는 上仙臺·三門橋·細松亭·倭將臺·靑龍亭·揖拜堂이 있었고, 북촌에는 一可亭·興武亭·翠雲亭이 있었다.

그리고 上村에 있었던 백호정의 뒤를 이은 민간사정으로 風嘯亭·登龍亭·登科亭·雲龍亭·雙碧亭·大松亭·同樂亭이 있었는데 쌍벽정과 동락정을 제외한 5개 사정을 上村 五亭라 하였고, 下村 四亭로는 석호정·左龍亭·華龍亭·梨花亭이 있었다.

이 밖에 東村(동소문내)에는 栗木亭·思泮亭이 있었는데, 모두 도성 안에 있었던 사정이다. 도성 밖 민간사정으로는 동대문 밖의 暎楓亭, 新門 밖의 西虎亭, 西小門 밖의 兌虎亭, 남대문 밖의 靑鶴亭, 水口門 밖의 舞鶴亭, 彰義門 밖의 月川亭 등 많은 사정들이 있었다.

모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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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었던 객관(客館)으로, 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1407년(태종 7) 송도(松都)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건립하여 이름을 모화루(慕華樓)라 하였다. 모화루 앞에는 영은문(迎恩門)을 세우고 남쪽에 못을 파 연꽃을 심었다.

1429년(세종 11) 규모를 확장하여 개수하고 모화관이라 개칭하였다. 중국 사신이 올 때는 2품 이상인 원접사(遠接使)를 의주에 보내고, 선위사 또한 2품 이상인 자로 도중 5개처에 보내어 맞게 하고 활쏘기 등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서울에 도착하면 이 모화관에 드는데, 이 때 조선의 왕세자는 그의 앞에 나아가 재배의 예를 행하고 백관도 재배의 예를 행한다. 이 때 백관은 반을 나누어 사신이 도착하기 전에 관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또,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백관이 품계의 정종(正從)의 위치를 달리하여 두 줄로 섰다가 일제히 재배례를 행하였다. 그 뒤 청일전쟁 이후 모화관은 폐지되고, 1896년 서재필(徐載弼) 등이 독립협회를 세우고 그 모화관을 사무실로 쓰는 한편,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이라 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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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군사의 시재(試才), 무예의 훈련 및 병서(兵書)의 습독(習讀)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설립과정을 보면, 고려 시대에는 군사의 훈련이나 취재(取才 : 재주를 시험해 사람을 뽑는 것)를 맡았던 별도의 기관은 보이지 않으며 병조·선군(選軍) 또는 2군 6위 자체에서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던 것 같다. 그러나 1390년(공양왕 2)에 처음으로 무과가 설치되면서 무반에 취재 및 훈련 체계의 필요성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392년(태조 1) 7월에 조선이 건국되어 새 관제를 반포할 때 훈련관(訓鍊觀)이 설치되었다.

이 때의 규정에 따르면 훈련관은 무예를 훈련하고, 병서와 전진(戰陣)을 교습시키는 일을 맡았다. 관원으로는 사(使, 정3품) 1인, 군자좨주(軍諮祭酒, 종3품) 2인, 사마(司馬, 종4품) 4인, 사직(司直, 종5품) 4인, 부사직(副司直, 종6품) 4인, 참군(參軍, 종7품) 4인, 녹사(錄事, 정8품) 6인이었다. 그 가운데 사직과 부사직을 제외하고는 다른 관직과 겸직하였다.

그 뒤 훈련관은 1394년에 중군군후소(中軍軍候所)를 흡수했고, 1405년(태종 5)에는 병조의 속아문(屬衙門)으로 되고, 계속해 정비되어 마침내 1466년(세조 12)에는 훈련원으로 개칭하면서 제도적 기틀을 정돈하기에 이르렀다.

훈련원의 임무는 크게 시취(試取)와 연무(鍊武) 두 가지였다. 시취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무과(武科)를 주관하는 일로, 초시(初試)는 한성에서 원시(院試)를 관장해 70인을, 각 도에서 병마절도사 책임 아래 120인을 뽑았다. 이들 190인을 병조와 훈련원에서 함께 주관해 복시(覆試)를 통해 28인을 선발하고, 이들은 최종적으로 전시(殿試)를 보아 등수가 정해졌다. 그런데 매년 봄·가을에 실시되는 도시(都試)의 경우, 중앙에서는 병조와 훈련원의 당상관이 시취의 일을 담당하였다. 그 밖에 내금위(內禁衛)·별시위(別侍衛)·친군위(親軍衛) 등의 시취도 훈련원이 주관하고 있었다.

한편, 연무는 병서들을 습독하는 걸 포함해 훈련원이 군사력의 유지·발전을 위해 주력하는 일이었는데, 중앙에서 매달 두 번씩 실시되는 습진(習陣)에 훈련원이 간여했으며, 특히 봄과 가을에 실시되는 겸사복(兼司僕)·내금위·충의위·족친위·장용위(壯勇衛)의 병기 검열은 훈련원에서 주관하였다. 그 밖에 구체적인 전술의 연구와 교습도 이루어졌다.
이후 훈련원은 조선 후기인 1795년(정조 19)에 첨정 1인, 판관 2인, 주부 8인이 증설되고, 첨정·판관·주부 가운데 1인을 문관으로 임명하도록 하면서 약간의 변모를 하였다. 그 뒤 1884년(고종 21)에는 중국 우창칭(吳長慶)의 공적을 추모하는 오장무공사(吳壯武公祠)가 훈련원에 세워진 바 있으며, 1907년에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의 체결에 따라 폐지되고 군대 해산이 이루어짐으로써 없어지게 되었는데, 이 때 일본에 항거하는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던 일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득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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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3년에 활쏘는 정자로서 처음 지어졌고, 이듬해 정조가 이곳에서 활을 쏘아 4발을 모두 적중시켜 득중정이라는 편액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다 득중정은 정조 18년 가을에 노래당 뒤쪽으로 옮겨짓고 임금의 편액도 내어 걸었다.

정조실록에는 “수원의 동헌을 壯南軒이라 이름짓고, 내사를 福內堂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사정은 득중정이라고 이름지었는데, 모두 임금의 글씨로 현판을 썼다.” 원천자료로는 得中亭御射圖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