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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

시대 : 246
인물 : 유유, 밀우(密友), 동천왕(東川王), 왕기(王?), 관구검(?丘儉)
신분 : 고구려 무사로서 사신을 가장, 적장을 살해

시대적 배경

요동지역에 세력을 두고 있던 공손씨(公孫氏) 세력이 238년 붕괴된 이후 고구려는 조위(曹魏)와 경계를 접하게 되었고, 곧이어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244년 가을 조위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의 지휘 아래 1만여 명의 군대로 침공해 왔던 것이다. 이것은 조위가 공손씨 정벌에 나선 이래 추진해온 동방(東方) 경략의 일환이었다. 조위는 삼국(조위, 孫吳, 蜀漢) 간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가 되는 요동과 한반도를 확실히 장악해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고구려 동천왕은 보기병(步騎兵) 2만을 동원하여 조위군에 맞섰고, 적군 3000 여 명을 죽이는 등 승리를 눈 앞에 둔 듯 보였다. 그러나 막다른 곳에 몰린 위군의 방진(方陣)을 상대로 하여 무리한 공세가 전개되었고, 결국에는 공세에 나섰던 고구려군이 도리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동천왕은 위군의 추격을 받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승세를 탄 조위군이 뒤쫓아 오자, 동천왕은 수도 국내성(國內城; 현재의 집안)을 포기하고 탈출하였고, 남겨진 성은 조위군에 함락되었다.
동천왕이 피신하여 항전을 계속하자, 관구검은 휘하의 현도태수 왕기에게 동천왕 추격을 맡겼다. 고구려에게 재기의 틈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동방세계에 대한 조위의 지배력이 확고해지는데 고구려의 존재는 걸림돌이었고, 그런 만큼 조위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의 근거지는 물론이고 후일을 도모할 토대마저 제거되어야만 하였다. 왕기군의 추격으로 여러 차례 위기를 겪은 동천왕 일행은 강계(江界)에서 낭림산맥을 넘어 함흥(咸興) 일대의 옥저지방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군이 옥저지방까지 추격해 오자, 동천왕 일행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관구검군에게 크게 패하여 전력의 상당수를 잃었을 뿐 아니라 이어진 위군의 추격으로 고구려는 재기를 도모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관구검군과의 전투 이래 왕의 곁을 지켜왔던 유유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다. 스스로 자객이 되어 적장을 제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세부 사항

결사대가 조직되고, 사력을 다한 고구려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조위군은 추격을 단념하지 않았다. 동천왕 일행이 옥저를 떠나 이러저리 샛길을 돌아서 남옥저까지 피신하였지만, 위군의 추격이 그 뒤를 밟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왕은 계책이 막연하고 형세가 곤란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고 이때의 어려운 처지를 전한다. 더 이상 피신할 곳도 없고 얼마 남지 않은 병력으로는 적군을 막아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나선 이가 유유였다. 그는 고구려의 5부 가운데 하나인 동부(東部)사람으로 아마도 고구려의 하급 귀족에 속한 무사였다고 보인다. 그가 말하기를 ‘형세가 매우 위급하니 그냥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교가 있사온데,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을 공궤하다가 틈을 보아 저들의 장수를 찔러죽이려 합니다. 신의 계책이 이루어진다면 왕께서는 그 틈을 타 승리를 거두소서’ 하였다. 그는 추격군의 장수를 제거하는 것으로 당장의 궁지에서 벗어날 방도를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만 하였다. 또한 목적을 숨기고 적장을 만나기 위해서는 거짓 항복을 진실인양 설득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서는 망설이지 않고 행동에 나설 수 있어야만 하였다. 유유는 위군의 진영에 들어가 거짓 항복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러 몸둘 곳이 없게 되어 장차 진영에 와서 항복을 청하고 처벌을 받고자 하여, 먼저 저를 보내 변변치 못한 물건으로나마 대접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이에 위군의 장수가 의심을 품지 않지 않자, 유유는 그에게 접근하여 음식 그릇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재빨리 빼내 적장의 가슴을 찔러 살해하였다. 그리고는 현장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순식간에 장수를 잃은 위군 진영은 소란스러워졌고, 유유의 거사를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군은 세 방향에서 적진에 돌입하였다. 결국 고구려군은 유유의 희생을 댓가로 적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고구려는 장래를 기약할 수 없던 절박한 처지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도로 귀환한 왕은 공로를 평가함에 있어 유유의 공을 제1등으로 삼고, 구사자(九使者)로 추증하였으며 그의 아들 다우(多優)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아, 유유의 공을 기렸다.

참고 문헌

《三國史記》》 45, 유유전.
《三國史記》》 17,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조.
《삼국지》 28, 관구검전.
國防軍史硏究所, 《韓民族戰爭通史-古代編-》, 1994.
尹龍九, 〈三韓의 對中交涉과 그 성격-曹魏의 東方經略과 관련하여-〉, 《國史館論叢》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