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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과이춘부

시대 : 1437
인물 : 김길(金吉, 여연 거주자 )과 이춘부(李春富, 자성 거주자)
신분 : 평민

시대적 배경

세종 15년(1433) 이후로 여연·조명간·훈두(薰豆) 등처에 두 번이나 침략을 입은 것은, 우리의 포치(布置)가 지극하지 못함이 아니라 방어하는 군사가 부족한 때문이었다. 세종 19년 5월에 야인이 침략했을 때에는 신귀(申貴)의 용감한 활약에 힘입어 그들을 물리친 바 있었다. 세종을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전지(傳旨)하여 조정의 논의에 관계없이 승리할 좋은 계책을 즉시 계달할 것을 명하였다.

세부 사항

이때 여연의 김길(金吉)과 자성(慈城)의 이춘부(李春富) 등은 적기(賊騎) 3, 4백 명이 저쪽 가까운 곳에서 여러 날 돌아다닌 사실을 알렸다. 당시 홀라온 올적합(忽剌溫兀狄哈)이 알타리 올량합과 비록 같은 무리라고 하나, 본래 마음이 같지 아니하여 서로 틈이 있으며, 수십 일정(日程)의 밖에서 살고, 그 사이에는 각종 야인들이 섞여 살아서, 우리와 더불어 일찍이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도로의 요해(要害)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천 리의 험한 길을 넘으면서, 다른 여러 오랑캐에게 사로잡힘을 무릅쓰고서 우리 경계에까지 깊이 들어오는 데 대해서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만약 홀라온이 나왔을지라도 알타리가 이들을 위하여 길을 인도하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요로(要路)를 적확하게 알고 우리의 무방비(無防備)한 틈을 타서 습격하여, 사흘이나 오랜 날을 지내면서 거리낌 없이 도둑질을 함부로 자행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알타리가 올적합에게 강약(强弱)이 같지 아니하고 재주와 기술이 현격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여연의 군인 전의(全義)는 교전할 때에 알타리 심아랑합(沈阿郞哈)을 친히 보고 은혜를 저버리고 도둑질함을 꾸짖었고, 또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부인들이 도둑 송천부(宋天富)가 이춘부(李春富)를 원망하는 말을 친히 듣기도 하였다. 이것은 알타리가 인의가 부족하고 음흉하고 간사해서 매우 경계해야 할 대상임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송춘부(宋春富)는 집이 부유하여 상시로 그들과 내왕하면서 반드시 음식을 대접하였지만 외짝눈 이춘부(李春富)는 음식을 즐겨 대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자 적들은 이춘부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평안도 지자성군사(知慈城郡事) 유익명(兪益明)이 보군(步軍) 이춘부(李春富) 등 9인을 야인 지방에 보내어 정탐하였다가 8인은 붙잡히고 오직 춘부만 탈출해서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때를 즈음해서 세종은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다음과 같이 전지하였다. “전일에 아뢰기를, ‘정탐꾼은 비록 몸이 작은 총통(銃筒)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창졸간에 쉽게 쏘지 못하니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고 하였으나, 군기감에서 만든 세총통(細銃筒)으로 시험하니 지니기와 쏘기에 모두 편리하였다. 비록 정탐꾼이 쓰기에 합당하지 못할지라도 적과 서로 마주하여 싸울 적에는 말[馬] 위에서 많이 가지고 각자가 쏘면 매우 편리하고 유익하며, 위급할 즈음에는 어린이와 여자라도 가지고 쏠 수 있기 때문에, 이제 세총통 1백 50개와 피령전(皮翎箭) 1천 개, 철전(鐵箭) 1천 5백 개를 보내니, 마땅한 대로 쓰고, 피령전은 모방하여 만드는 것이 좋겠다.”

참고 문헌

《세종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