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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주

시대 : 1926
인물 : 나석주(羅錫疇;1892~1926.12.28)
신분 : 의열단원

시대적 배경

3·1운동이후 독립운동가들은 장기적인 독립 전쟁 대신 소수의 결사를 조직해 암살, 파괴활동을 벌여 한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해 항일민중폭동을 일으키자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 9일에 만주 길림성에 있는 한 중국인 농부의 집에서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결성했다. 성립 당시의 의열단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권준, 서상락의 13명으로 추정하며, 1925년경에는 70명 정도였다. 단장격인 의백에는 김원봉이 추대되었다.
의열단은 결성 직후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희생하기로 한다.' 등의 공약 10조를 발표했는데, 과격한 투쟁, 엄격한 행동지침과 희생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암살 대상인 '7가살'을 정했는데 이는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 인사였다. 그리고 파괴 대상인 '5파괴'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과 그에 관련된 시설을 지목했다. 그리고 암살과 파괴 계획을 실천하고자 폭탄 제조기술을 익혔다.
1920년에 근거지를 베이징으로 옮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중심 노선에 반대하던 한국인의 지원을 받았다. 의열단은 초기에, 부산 경찰서 폭탄투척 의거(박재혁, 1920년 9월 14일), 밀양 경찰서 폭탄투척 의거(최수봉, 1920년 12월 27일),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김익상, 1921년 9월 12일),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 저격 의거(오성륜, 김익상, 이종암, 1922년 3월 28일),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효제동 의거(김상옥, 1923년 1월 12~22일), 도교 궁성 폭탄투척 의거(김지섭, 1924년 1월 5일),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나석주, 1926년 12월 28일) 등을 단행했다. 1923년에는 김원봉의 부탁을 받은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이라는 의열단 선언문을 썼다.
1926년을 전후하여 의열단은 활동 방향을 전환하고자 했다. 그 동안의 활동이 일본의 권력 핵심부에 타격을 가하고 큰 충격을 주었으나, 단원들의 희생도 많았다는 반성이 내부에서 나왔다. 그리고 지금까지와 같은 암살, 폭력을 통한 충격요법으로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반성하고, 전 민중을 기반으로 하는 무장투쟁을 꾀했다. 이를 위해 민족협동전선의 구축, 통일적인 독립당의 환성, 그리고 세계 혁명과의 연결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의 원조를 받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한편, 민족 세력의 대동 단결을 위해 다른 민족 단체와 함께 한국대일전선연맹을 발족시켰고, 이를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발전시켰다. 조선민족혁명당의 결성으로 의열단은 사실상 해체되었지만, 의열단의 투쟁이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세부 사항

나석주는 황해도 재령(載寧)사람으로 재령 명신학교(明新學校) 2학년을 수료하고 농사일을 하다가 23세 때 만주로 건너가서 4년간 군사훈련을 받고 27세때에 귀국하여 황해도 겸이포(兼二浦)에서 표면상 점포를 경영하면서 이면으로는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상해의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결사대를 조직하여 한대홍(韓大弘)과 같이 평산군(平山郡) 상월면(上月面) 주재소 일경과 상월면장을 사살하였고 다시 안악군(安岳郡) 친일파(親日派) 부호를 사살한 후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1920년 9월 22일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약하다가 하남성(河南省) 감단군관학교(邯鄲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있으면서 보안육군강무당(保安陸軍講武堂)에 적을 주었으나 이때 봉직전(奉直戰) 관계로 퇴학하였다.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 그는 1926년 4월 천진(天津)으로 가서 김창숙(金昌淑)과 상면하여 김창숙으로부터 조국의 강토와 경제를 착취하는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와 조선은행(朝鮮銀行)?식산은행(殖産銀行) 등을 폭파하여 학정에 시달리는 동포를 구해 달라는 권고를 받고 이를 실해하기로 결심하였다.
동년 12월 26일 그는 종국인 노동자로 가장하고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여 지부이통환공사의 역부로 가칭하고 천진(天津)에서 상선 융극호(戎克號)에 편승하여 위해위(威海衛)를 거쳐 이튿날 27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는 28일 오후 중국청년으로 변장하고 동척(東拓)으로 가서 회사의 상황을 정찰한 다음 그 길로 남대문통에 있는 식산은행(殖産銀行) 일반 통용문으로 들어가 대부계 철책 앞에 폭탄 한 개를 던졌다. 다시 오후 2시 동척(東拓)으로 가서 수위실 책상에서 무언가 쓰고 있던 조선부업협회(朝鮮副業協會) 잡지기가 고목길강(高木吉江)을 사살하고 2층으로 올라가다가 총소리를 듣고 놀라 따라 올라오던 사원 무지광(武智光)을 쏘아 쓰러뜨리고 토지개량부(土地改良部) 기술과장실로 들어가 차석 대삼태사랑(大森太四郞)과 과장 능유풍(綾由豊) 등을 저격한 후 폭탄 한 개를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그는 다시 층계를 내려와 문밖으로 나가 조선철도회사(朝鮮鐵道會社)로 들어갔다. 정문에 들어서자 회사 수위 송본필일(松本筆一)과 마침 이곳에 왔던 천진당(天眞堂) 점원 김정열(金井悅)을 쏜 후 황금정(黃金町) 길거리로 발길을 옮길 때 경기도 경찰부(京畿道警察部) 경부 전전유차(田畑唯次)를 만나 그를 사살하였다. 황급히 출동한 경찰대와 기마대의 추격을 받은 그는 최후를 각오하고 권총 세발을 자신의 가슴에 쏘고 쓰러졌다. 일경은 그를 총독부 병원에 입원시켜 응급치료를 받게 하였는데 약간 정신이 되살아나는 듯하였다. 이때 일경이 그의 이름을 묻자 “나석주”라 대답하고 “김창숙(金昌淑)과 밀의하였다.”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일경은 폭탄 두 개, 스페인제 10연발 권총 1정, 탄환 66발을 그 자리에서 압수하였다. 1927년 5월에 동지 이화익(李化翼)이 북경에서 피체되어 신의주(新義州)로 압송되자 비로소 그의 의거가 자세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동월 31일에 그의 장남 응섭(應燮)이 백운학(白雲鶴)으로 변성명한 후 감시망을 뚫고 상해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자 상해의 동지들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그의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國家報勳處,《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第8卷, 1990.
《高等警察要史》.
《騎驢隨筆》.
《武裝獨立運動秘史》.
《벽옹 김창숙일대기》.
국회도서관,《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文一民,《韓國獨立運動史》.
金承學,《韓國獨立史》下卷.
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
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資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