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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단의 의친왕탈출사건

시대 : 1919
인물 :
신분 :

시대적 배경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1일, 민족을 대표하는 기구이자, 독립운동을 이끌어 갈 최고기관으로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그러나 상해와 국내는 너무 멀었고, 정부와 국민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임시정부에게는 일제 치하의 국민들에게 임정의 존재를 알리고, 유기적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3·1운동이 그 열매를 맺지 못함을 통분하던 지사들 가운데 한 사람인 전협(全協)과 최익환(崔益煥)은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4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의친왕(義親王) 이강 공(李剛公, 고종의 다섯째 아들)을 고문으로 김가진(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여 1919년 4월 조선민족대동단을 비밀리에 발족시킴에 성공했다.
김가진은 1897년 5월 22일 황해도 재판소 판사, 충청남도 재판소 판사를 거쳐 법부협판(차관),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하고 한일합방 당시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고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을 맡았던 것을 두고 항상 수치스럽게 여기던 중 새로운 독립운동의 길에 참여하고자 70노구를 이끌고 대동단의 지휘봉을 맡게 되었다. 비밀리에 건립된 대동단은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그 존재가 일제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었다. 그리하여 국내의 여건이 악화되자 김가진, 전협 등 간부들은 대동단 본부의 상해이전을 결정하였다. 대동단 본부이전은 김가진을 비롯한 핵심간부들의 해외망명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즉, 총재 김가진 등 “일부 중요간부를 해외로 분파하야” 국내에 남아있는 간부들과 내외 호응하여 제2회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대대적으로 전개하자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상해의 임정 또한 조선 왕가의 왕자 이강과 대신 출신의 김가진과 같은 유력자가 국내를 탈출하여 상해 임정에 참여한다면 임시정부의 위상을 한껏 높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들의 상해 망명을 적극 추진하였다. 즉 김가진 의친왕 이강 상해탈출은 대동단이 국내에 처한 상황과 임정이 존재를 대내외에 알릴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이 들어맞아 치밀하게 추진된 계획이었다.

세부 사항

김가진에 이어 추진한 것이 의친왕 탈출이었다. 상해로 망명한 김가진은 자신이 칠십이 넘은 노구로 좀 더 활동적이고 더 비중있는 의친왕 이강이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다면 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용모가 준수하고 두뇌가 명석하여 촉망받는 왕자였으나 경술국치 이후 망국의 한을 달래며 한량으로 지내고 있었다. 김가진은 의친왕 이강과 사돈 관계로 돈독한 사이였다. 김가진은 이종욱을 통해 의친왕의 서울 탈출을 타진하였다. 이종욱은 다시 서울로 와서 의친왕의 측근을 만난 결과 의친왕이 '탈출을 위해선 20만원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종욱은 대동단 단장 전협을 만나 의친왕의 서울 탈출 계획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전협은 이 제안을 기꺼이 환영하고 대동단이 그 임무를 맡겠다고 했다.
이리하여 대동단은 상해임시정부의 특파원 이종욱의 제안으로 의친왕을 상해로 탈출시키기 위한 공작을 추진하여 1919년 11월 10일 드디어 의친왕 등 5명의 일행이 변장을 하고 수색역에서 안동행 열차를 탔다. 그러나 이때 의친왕의 행방불명 사실을 탐지한 일경이 국경지대에 비상령을 내렸다. 의친왕은 불행하게도 신의주를 출발하여 안동역에 도달할 무렵 일경에 적발되어 일행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 사건 역시 일제를 경악시켰다. 식민지 조선국의 왕자가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면 국내외에 임정의 위상은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친왕 탈출사건은 수포로 돌아가고, 대동단은 거의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대동단 연구자인 신복룡에 의하면 ‘대동단 연루자로서 일제에 체포되지 않은 사람은 오직 세 사람’으로 이종욱, 나창헌, 김중옥이라 한다. 이종욱은 ‘승려로 본시 대동단원이 아니고 상해임시정부의 연통제 요원으로 임정과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연락을 책임지고 있었던 인물로 의친왕탈출사건 직전 상해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체포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망명이 좌절된 후, 의친왕은 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가 상해에서 발행되는 중국신문인 ‘민국일보(民國日報)’의 1919년 12월 4일자에 ‘한국 태자의 일본에 대한 반감[韓太子對日之反感]’이란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이 편지에서 의친왕은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한 친왕(親王)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한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며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참고 문헌

신복룡, 《대동단실기》, 선인, 2003.
장석흥, 〈조선민족대동단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