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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의여걸

시대 : 1933
인물 :
신분 : 독립군

세부 사항

우리 조선민족역사에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독립을 실현하기위하여 수많은 여성들이 용감히 싸웠고 수많은 여열사들이 아까운 목숨을 바쳤다.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정부의 건국훈장과 대통령장을 받은 사람가운데 여자로서는 남자현(南慈賢) 한분밖에 없다. 남자현은 하르빈에서도 반일독립운동을 하였고 하르빈에서 일제의 감옥생활을 하다가 순국하여 하르빈조선인 묘지에 안장되였으니 그는 영광스러운 역사의 한페지를 하르빈에 남겨놓았다. 여류독립운동가 남자현은 경상북도 영양군 석포면 출신이다. 19세에 결혼하여 6년이 지난후 남편 김영주가 의병으로 나가 싸우다 희생되었다. 남자현은 3대독자인 유복자를 정성껏 기르고 시부모를 봉양하여 효부로 이름이 높았다. 1919년 남자현은 3.1독립운동에 참가한후 9일 중국동북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활약하니 서로군정서의 유일한 여대원이였다. 그는 각 독립운동단체와 군사기관, 농촌을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동만일대 10여처에 여자교육회를 조직하여 여성계몽과 해방운동에 성심을 다하였다.
1920년 10월 남자현은 유명한 청산리전투에 참가했다. 조선독립군은 일본군 가노오련대장 이하 관병 1000여명을 사상하고 수백자루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대승리를 하고 철퇴하게 되자 남자현은 부대에서 떨어져 부상병들을 구원하기에 힘써 독립군의 자애로운 어머니 역할을 했다. 하여 사람들은 남자현을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했다. 1925년에는 이청산, 채찬 등 동지들과 함께 조선의 일본총독 사이토를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서울에 들어갔다가 계획이 실패하고 중국동북으로 돌아왔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동삼, 안창호를 위수로 한 47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중국경찰에 잡히게 되자 남자현은 감옥까지 따라가서 지성으로 옥바라지를 하였으며 그들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남자현은 1929년 북만으로 이동하여 독립운동가 김동삼이 독립운동의 기지로 개척한 아성현 취원창을 거점으로 하르빈에서 반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10월 만주독립운동의 거두로 불리우는 김동삼이 하르빈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남강의 주가에 있는 일본총령사관 지하실감옥에 투옥되었다. 남자현은 김동삼의 친척으로 가장하고 일본총영사관에 자주 드나들면서 감옥에 갇힌 여러 동지들에게 중요한 연락을 취해주었다. 그는 김동삼과 같이 체포된 이원일이 조선 신의주감옥으로 호송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호송될 때 탈환을 계획하였으나 시일이 촉박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1932년 5월 9일 국제연맹이사회에서 소위 ‘만주국문제’를 조사하기 위하여 영국인 ‘리튼’을 위수로 한 ‘국제연맹조사단’(일명 리튼조사단이라고도 함) 이 하르빈에 도착했다. 이 조사단은 도리중앙대가에 있는 마디얼호텔에 들었다. 일제는 세계여론을 기편하기 위하여 집집이 바깥에는 만주국국기를 걸고 집안에는 황제 부의의 사진을 걸게끔 강요하여 하르빈시민들이 만주국을 옹호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노라 애썼다. 만주국과 일제침략을 반대하는 ‘협의분자’를 체포하여 송화강건너 송포집중영에 가두었다. 조사단이 하르빈에 머무른 14일간 중국인 5명, 러시아인 2명, 조선인 1명(성명은 김곡)이 조사단에 편지를 넘기려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총살당하였다. 이렇게 심엄한 경계속에서도 남자현은 왼손 무명지 두마디를 잘라서 흰수건에 ‘한국독립원’이란 다섯글자의 혈서를 써서 자른 손가락을 싸가지고 조사단에게 보내기에 성공하였다. 이로서 조선인의 독립정신을 국제련맹에 호소하였으며 불타는 그의 애국심을 보여주었다.
1933년 봄 남자현은 오는 3월 1일에 위만주국 수도 신경에서(지금의 장춘)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대회를 성대히 치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이 기회에 만주국일본정권대사 무등신의를 격살할것을 계획하였다. 남자현은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동지들과 연락을 맺고 2월 27일 하르빈에서 중국할머니로 변장하고 권총과 폭탄을 운반하다가 당시 하르빈시 도외정양가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나이 62세 환갑이 지난 남자현은 하르빈주재 일본총영사관 지하실감옥에 구금되여 여섯달동안 계속되는 혹형을 받았다. 그해 8월 6일부터 일제의 폭행에 항거하는 단식항쟁을 시작하였다. 그후 15일만에 혹형과 단식으로 체력이 쇠약할대로 쇠약해진 남자현은 사경에 이르자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리라’라는 말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순국하였다. 그의 시체는 하르빈남강 러시아공동묘지(지금의 문화공원) 서쪽에 있는 조선묘지에 안장되었다. 유감스럽게도 1958년 하르빈시 도시건설의 ‘대약진’년대에 시내에 있던 중국인과 외국인묘지가 전부 황산묘지로 옮기게 되어 원래의 조선인묘지도 없어지는 바람에 남자현의 묘도 ‘주인이 없는 묘’라고 하여 평지로 만들어 없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