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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시대 : 1920
인물 : 박재혁(朴載赫) 1895~1921. 3. 12
신분 : 독립운동가

세부 사항

부산진보통학교(釜山鎭普通學校)와 부산공립상업학교(釜山公立商業學校, 현 부산상업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했다. 그는 부산공립상업학교 입학 동기생인 최천택(崔天澤)과 교유하면서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국내연락처가 될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여 일찍부터 반일사상을 키워 나갔다.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박재혁은 부산에 본사를 둔 조선와사전기회사에 잠시 취직한 뒤 경북 왜관을 왕래하면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상업에 종사하면서 7백원의 자금을 모아 상해를 거쳐 싱가포르에 건너가 남양무역회사에 잠시 근무하였다. 박재혁은 상해 출입을 여러 차례 하다가 그곳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났고 1920년 4월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이 때부터 박의사는 고향인 부산에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독립투쟁을 벌여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김원봉의 권유가 있자 곧장 부산으로 돌아가 거사를 실행하기로 했다.
박재혁은 김원봉으로부터 군자금 300백원을 얻어 가지 고서(古書) 상인으로 변장한 뒤 고서꾸러미에 독일제 폭탄을 감추고 일본 장기(長崎)를 거쳐 1920년 8월 13일 부산으로 돌아왔다. 당시 부산은 동남아의 관문이며 일본, 상해 등지의 출입구여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어서 변장한 박재혁은 무사히 일본 관헌의 경계망을 거쳐 부산에 올 수 있었다. 부산에 온 박재혁은 오랜 친우였던 동지 최천택을 만나 거사 1주일 전 동안 동래와 해운대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거사 계획을 숙고한 뒤 거사장소를 부산경찰서로 정했다. 최천택은 박재혁과 구세단의 창단동지이자 부산공립상업학교 동기생으로서 부산·경남지역 3·1운동을 모의하면서 일찍부터 항일독립운동에 매진해온 인물이었다. 그 후에도 그는 관동대지진으로 재일한인들이 일인들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못이겨, “지진 만세”를 부르며 축배를 들었는데 이 일이 일경에 알려져 피체되었고, 한편 신간회 부산지회 설립시 격문 살포문제로도 피체되는 등 일경으로부터 부산지역에서 가장 위험한 배일인물로 찍혀 피신생활을 해야만 했다. 박재혁은 이러한 최천택의 인물됨을 상업학교시절부터 익히 알고 있은 터라 쉽게 자신의 거사계획을 상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용두산(지금의 용두산공원)에 올라가 기념촬영을 하면서 우의를 다지고 거사지로 정한 부산경찰서를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당시 일제 총독부의 부산경찰서는 오늘날 부산시청 맞은 편 광복동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부산데파트 일대에 있었다. 이 때문에 용두산에서 내려다보면 그 주변을 잘 파악할 수 있었다. 박재혁은 용두산공원에서 최천택과 거사를 준비하면서 잠시나마 거사 실행에 대한 부담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늙으신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생각을 가다듬고 보다 큰 의를 위해 뜻을 굳게 먹고 1920년 9월 14일에 거사를 실행에 옮기기로 작정하였다. 거사 당일 9월 14일에는 아침부터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박재혁은 좌천동에 있는 오택(吳澤)의 집에 가 상해에서 가져와 맡겨 두었던 폭탄을 찾았다. 박재혁과 오탁은 현재 부산진역 앞에 있는 정공단에 올라가 죽음을 맹세하는 고유를 올리고 거사에 앞서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오탁과 헤어진 박재혁은 중국인 고서적 상인으로 변장하여 부산진에서 전차를 타고 부산역에 내려 부산경찰서로 향했다. 손에는 고서적 밑에 폭탄을 넣은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박재혁은 공무가 있는 것처럼 경찰서로 들어가 경찰서장에 대한 면회를 신청하였다. 당시 부산경찰서 서장은 교본수평(橋本秀平)이었는데 그는 당시 경남·북 경무부 관내에서 수석서장의 지위에 있은 인물이었다. 교본수평 서장으로 인도된 박재혁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다. 박재혁은 마주하는 교본(橋本)에 대해 ‘나는 상해에서 왔다. 네가 우리 동포를 잡아 우리의 계획을 깨트린 까닭에 나는 오늘 너를 죽이는 것이다’라고 유창한 일본어로 크게 꾸짖고 즉시 폭탄을 마루에 쳐서 터트렸다. 곧 폭음과 함께 흰 연기가 방에 가득 차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고 사무실 유리창은 모두 박살나고 말았다. 교본(橋本)은 폭음과 함께 중상을 입어 피투성이가 되고 경찰서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박재혁도 폭탄의 파편이 오른 쪽 무릎뼈를 쳐 중상을 당해 도망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잡히고 말았다.
이 무렵 최천택은 부산경찰서 인근 용두산에서 초조하게 박재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박재혁이 폭탄을 던진 뒤 경찰서가 소란한 틈을 타 뛰어나오면 그가 추격하는 일경을 가로막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장실에서 폭음이 들린 뒤 10여 분이 지나도 박재혁이 나오지 않자 최천택은 거사가 실패했음을 알고 사후수습을 위해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일경에 의해 피체된 박재혁은 곧 응급조치를 위해 부립(府立)병원으로 옮겨져 간단한 치료를 받았다. 일경의 취조를 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박재혁은 일경의 취조에 불응하여 함구하였다. 이후 일경은 부산지역내 대대적인 관련자 색출에 나섰다. 먼저 일경은 박재혁과 친우인 최천택을 자택에서 검거하였고 박재혁과 같은 부산공립상업학교생인 오택을 비롯한 김영주, 박창수, 오재영을 검거하였다. 동시에 일경은 초량 부산진 일대 한국인 청년 200여 명과 당시 경찰서를 지나던 행인, 상인 등 수 십명의 젊은이들도 마구 붙잡아 갔다. 박재혁은 상처가 아물자 부산지방법원에서 공판을 받고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검사가 불복 공소하여 1921년 2월 14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사형으로 언도되었고, 박재혁은 이에 불복하여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3월 31일 결국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대구형무소에서 수감된 그는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몹시 신음하다가 폐병까지 생겨 고통이 심하므로 “왜적(倭賊)의 손에 욕보지 않고 내손으로 죽자”하고 단식으로 최후까지 일제에 항거하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1921년 5월 1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의 시신은 부산 좌천동에 있는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1969년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國家報勳處,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第8卷, 1990, pp.165~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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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會圖書館,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p488.
文一民, 《韓國獨立運動史》, pp214?362?459.
金承學, 《韓國獨立史》下卷,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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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8卷, p711.
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資料集》11卷, PP112~114?202~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