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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의

시대 : 1920
인물 : 박치의(朴治毅), 김성호(金聖灝), 박세건(朴世鍵), 백시찬(白時瓚), 백경옥(白敬玉),안병균(安秉鈞), 김석
신분 : 선천 신성중학교(宣川信聖中學校) 재학생

시대적 배경

박치의가 활동하던 시기는 3·1운동으로 위기를 느낀 일본이 이전의 무단정치 대신 문화정치를 표방, 민족분열정책을 전개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한국경제를 완전히 일본경제에 종속시키려 하였던 시기이다. 1919년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일선융화(日鮮融和)·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구호 아래 문화정책을 내세워 정책의 변화를 선언하였다. 조선총독부 관제를 개편, 제도상으로는 문관총독의 임명을 허용하였고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변경, 그 사무집행권을 도지사에게 넘겨 지방분권적 자치제도를 표방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조선인 관리 임용의 범위를 확대하는 동시에 관리·교원의 착검(着劍)과 제복을 폐지하였다. 또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간행을 허가하는 등 약간의 언론자유를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더욱 강화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수탈체제를 확립시켜 산미증산계획을 수립, 일본 내의 식량문제를 한국에서의 식량착취로 해결하려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계획은 실패하였으나 미곡을 수탈당한 한국인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만주(滿洲)로부터 잡곡을 들여와 충당해야만 했기 때문에 많은 농민들은 화전민이나 노동자가 되거나 이주의 길을 떠났다.
이러한 압제 속에서도 소작쟁의·노동쟁의·학생운동·사상운동 등 항일운동은 계속되었으며, 1927년 민족주의자의 총합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됨으로써 항일운동의 단계를 더욱 높였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는 3·1운동 이후 최대의 만세운동인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해외에서는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국권회복을 위해 나섰고 만주·시베리아 일대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본격적인 항일무장운동을 벌였다.

세부 사항

박치의(朴治毅)는 1904년 선천에서 출생하여 3.1운동 당년에는 16세의 소년으로 선천 신성중학교(宣川信聖中學校)에 재학했었다. 선천은 평양과 더불어 당시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리 만큼 기독교회가 먼저 보급된 도시였고, 또 신성중학교는 평양의 숭실학교(崇實學校)와 함께 미국장로교선교회(宣敎會)의 경영에 속하여 3월 1일에는 서울의 독립선언 선포식(宣布式)과 때를 같이 해서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가두에 진출, 일대 시위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선천의 시민 대중을 격동시켰던 것이다. 박치의는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또 그러한 교풍(校風) 분위기 가운데서 자라났었다. 그의 가정도 또한 독실한 예수교 집안이었다.
그런데, 박치의는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 일행이 한국을 통과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기회에 민족적 의사가 어떤 형태의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을까하고 적이 기대하는 심정이 되어 있던 참에, 광복군총영 결사대원 이학필·임용일·김용식 등 3인이 박을 찾아와서 이번 기회를 잃지 말고 미국 의원단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선천역과 선천경찰서 등에 폭탄을 던지고 만세 시위 투쟁을 또 한번 벌여서 세계 사람들과 미국 의원단에게 조선 사람의 독립 희망이 이와 같이 열렬하다 함을 널리 알리어 우리 독립의 목적을 성취함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있어야 하겠다 하니, 박치의는 이에 흔연 찬동하고 그 거사에 참가할 것을 응낙하였다. 이에 결사대원 이학필이 소용 무기를 반입차 압록강 건너 본영에 갔다가 8월 30일에 권총 1정과 소총(小銃) 1정, 그리고 폭탄 몇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의 귀환이 늦어진 것은 당시 일제도 미국 의원단이 내한하는 동안 무슨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므로 국경 관계 경비를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기를 휴대하고 그들 경계망을 무사히 뚫고 들어오기에 예상 이외의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하여간 무기를 반입하여 선천에 돌아오고 보니 미국 의원단은 벌써 선천을 통과하여 서울에 들렀다가 떠나간 뒤였다.
할 수 없이 박과 결사대원들은 다시 상의한 결과 1920년 9월 1일 결사대원 한 사람은 선천군청으로 가서 토지대장(土地臺帳)이 들어 있는 지적창고(地籍倉庫)에 투탄하였으나 불발되었고, 박치의는 이날 새벽 3시에 선천 경찰서로 가서 이학필은 밖에서 망을 보게 하고 그는 도화선에 불을 붙이어 경찰서 현관에 던졌다. 그것이 폭발하여 경찰서 문간 어구의 벽은 무참히 무너지고 유리창이 산산조각 깨여졌으며, 사방으로 흩어진 폭탄 조각과 폭탄을 쌌던 검은 베조각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 자리에는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외 몇 종류의 격문(檄文)이 또한 뿌려져 있었다.
그 최급 경고문의 내용은 ‘적국에 관리된 자에게 고함’이란 부제(副題)가 달리고 ‘우리는 천하의 대의(大義)와 국가의 위급을 들어서 제군에게 고하노라’고 머리에 쓴 후 ‘우리는 지금 국가의 위급을 위하여 죽기를 무릅쓰고 분투하거늘 너희는 원수의 매(鷹)와 개가 되어 도리어 같은 동포를 해하니 너희가 만일 지금에 그만두지 아니하고 그대로 있으면 사정 없는 벽력의 불이 너희의 머리 위에 떨어질 터이니 너희는 일찌기 주의하여 한편으로 너희 목숨을 보전하고 한편으로 너희 자손을 위해 속속히 사직하고 나오라’하였으며, 또 다른 한 종류는 ‘재산가의 의연(義捐)을 청함’이란 제목하에 ‘이제 우리는 국가를 위하여 죽기를 무릅쓰고 일을 하니, 너희는 한갖 금전을 지키는 수전노(守錢奴)가 되지 말고 각기 가진 바 재산에 응하여 정성껏 의연해서 우리 광복 대업을 원조하라’ 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속속거의(速速擧義)’라는 제목 하에 ‘우리는 이제 공동일치로 일어나서 서로 위급한 이 때에 일을 함께 할지요, 구차히 살기를 도모하여 금후에 앉아 죽게 하지 말라’고 고취한 것이었다. 그리고, 격문들 말미에는 ‘대한 민국 2년(大韓民國 2年)’이라는 날자와 ‘광복군총영’이라는 서명·날인이 들어 있었다.


사건 발생 후 일경은 전기 격문들 서명을 보고 광복군총영 결사대원들의 거사인 것을 즉시 판정하고 맹수사를 계속한 결과, 9월 7일까지에 박치의 이하 20수 명의 혐의자들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경찰 조사가 끝나자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일심 재판에서 다음과 같이 중형 판결을 받았다. 박치의 사형, 김성호(金聖灝) 징역15년, 박세건(朴世鍵)·백시찬(白時瓚) 각각 징역10년씩, 백경옥(白敬玉)·안병균(安秉鈞)·김석창(金錫昌) 각각 징역8년씩, 박승세(朴承洗)·박치조(朴致租=치의의 형)·박치상(朴致祥) 각각 징역5년, 김응식·김근하(金根河)·김복관(金福寬)·김학현(金學賢)·김성수(金成洙) 각각 징역3년씩, 박건채(朴健采) 징역2년 6개월, 문석우(文錫禹) 징역2년.
박치의는 2심에 공소하였으나 1921년 4월 12일 평양복심법원 재판정에서 다시 사형이 언도되니 그는 법정에서 돌연 일어나 두 손을 높이 쳐들고 하늘을 향하여 크게 울부짖어 ‘오! 하나님 감사하옵니다’고 감사 기도를 올려 방청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 뒤 그는 다시 상고하였으나 1921년 7월 2일 경성고등법원에서 기각 판결은 내리니 그는 평양 형무소 감방에서 조용히 형 집행의 날을 기다리며 성경 읽기와 기도로써 나날을 보내고 있다가 1921년 9월 30일 하오 2시 평양 감옥 교수대(絞首臺)에서 조금도 비감해 하는 기색도 없이 ‘나는 다만 조국을 위하여 죽을 따름이다’고 말하고 성경 구절을 외우며 찬송을 부른 후, 가장 높은 목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나서 치형(致刑)하여 목이 졸린 지 11분만에 절명 순국하니 그의 꽃다운 나이 18세였다.
그런데, 선천 거사 관련자들의 1심 판결 당시 연령을 보면 박치의가 18세였음을 비롯 이학필 25세, 임용일 23세, 김응식 25세 등 모두 20대 청년들임을 알 수 있겠고, 박치조가 치의의 친형이요, 박건채가 치의의 족질(族侄)이었다 하며 달리도 같은 박씨로 이름자 항열 같은 이들(예 : 박치상)이 있으니 그들 한 집안에서 여러 사람이 연좌 (連坐)됐었음을 알 수 있겠다. 그리고, 친형 박치조는 당시 예수교 장로(長老)였다 하며 박치의의 법정에서와 치형장에서의 언동으로 보아 그 집안의 기독교 독신 집안이 었음이 입증된다 하겠다.
선천 거사를 위하여 광복군총영에서 파견되어 왔던 임용일은 평북 철산군(鐵山郡) 출신이었다는 것 이외에 거사 후 어떻게 되었다는 기록을 도무지 찾아볼 수 없고, 김응식은 평북 의주군(義州郡) 출신이었다 함과 전기 제1심 판결 명단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징역3년형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뿐 그 뒤의 소식이 또한 묘연하다. 이학필은 평북 영변군 팔원면 명당리에서 1897년 3월 25일에 태어났었다. 어렸을 적 이름을 이필주라 하였고, 호적상 이학필, 외국에서는 김원대로 칭하였다 한다. 그는 선천 거사에서 일단 체포되었으나 경찰서 유치장에서 탈옥하여 만주로 건너가 중국과 미국 등지에 두루 다니다가 길림·흑룡강 방면에서 교포 교육 사업에 진력하였으며, 그는 또한 천도교인이었다 한다. 그러다가 장춘에서 일본군 장교 한 명 살해 사건으로 1934년 10월 14일 일경에게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 신의주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7년형을 받고 평양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1936년 7월 26일 옥사 순국하였다.

참고 문헌

《독립운동사 제7권 : 의열투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