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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환

시대 : 1920
인물 : 백기환(白基煥), 김승호(金承鎬), 오원선(吳元善), 이상룡(李相龍), 이근수(李根洙), 강성리(康聖利)
신분 :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 독립운동가

세부 사항

백기환(白基煥)은 1883년 7월 29일 평양시 신양리(新陽里) 50번지에서 났었다. 그는 1900년 평양숭실학교 2학년을 수업하고, 평양 군영(軍營)에서 1년 동안 하사관(下士官) 교육을 받고 나서 1904년에 미주에 건너가 캐나다 크리스트 대학 건축학과 3년을 마친 후, 귀국하여 함경 남·북도에서 선교사 및 건축 기술자로 15년간 근무했었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니 그는 만주로 건너가서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있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고 1920년 1월에 동지 정찬조·고창희 등과 상의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연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 평양 신양리 고창희 집에서 평양 수정(壽町) 사는 김승호(金承鎬) 및 항정(港町) 사는 오원선(吳元善)에게 독립운동 자금으로 각 1천 원(圓)씩을 청구하는 서면을 만들어서 동년 5월 초순에 백기환 그가 직접 이를 가지고 오원선 집에 가서 이를 그에게 수교한 다음 김승호에게 가는 서면을 전하여 달라고 부탁하고 자금을 내도록 권유했다.
한편 백기환·정찬조·고창희 등은 유하현(柳河縣) 대황구(大荒溝)에서 이상룡(李相龍)이 조직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요원 이근수(李根洙)의 권유로 평양 이향리(履鄕里)에 사는 강성리(康聖利)와 같이 폭발물을 사용하여 평양에 있는 평남 도청 및 평양경찰서 등을 폭파하고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우고 공동으로 실행 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동지 정찬조는 이 때 폭파에 사용할 목적으로 강성리가 보관중이던 폭발물(다이나마이트) 1개를 받은 후 평양 순영리(巡營里) 41번지 백기환 집으로 가지고 와서 백기환과 함께 그 일부분에 대한 위력을 시험해보고 그것을 그 집 헛간 천정에 감추어 두었다가 쓰도록 보관하기로 했다.
그리곤 백기환은 동지 정찬조·고창희·이학근·김기일 등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연하기 위하여 1920년 5월 8일 밤 평양 죽전리(竹典里) 김남호(金南鎬) 집에 갔으나 대문이 잠겨졌으므로 이를 열고자 이학근이 담에 올라가서 그 집에 들어가려 할 즈음에 통행인이 있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한편으로 정찬조, 이근수, 강성리, 고창희, 이학근 등과 합력해서 임시정부와 연락하면서 ??독립신문(獨立新聞)??과 선전 문서 등을 각처에 배부하고 독립 사상 고취에 전력하였다.
백기환은 동월 10일 고창희 집에서 여러 동지들과 미리 계획한 도청·경찰서 등 폭파 방법을 밀의하던 중 일경의 기습으로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평양경찰서에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그 해 10월 27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10년의 언도를 받고 불복 공소하였으나 기각당하고, 평양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21년 11월 26일 서울 형무소로 이감되었고, 그 뒤 징역6년 9개월로 감형되어 복역하다가 만기(滿期) 6개월을 앞두고 1927년 4월 13일 가출옥으로 옥문을 나왔다. 백기환은 또 1944년 대동군(大同郡) 남곳면(南串面) 두단리(斗團里) 사건으로 붙잡힐 위기에 있었으나, 재빨리 피신하여 화를 면했다. 이때의 혐의는 평양신사(平壤神社)에 불질러 태우고 일본 군사 시설을 파괴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1945년 2월에는 일본군의 군사시설을 파괴하려고 모의하였다가 발각되어 피신하였는데, 이렇게 백기환과 같이 중국이나, 만주 등지에서 국내로 잡입해 파괴 공작을 해온 독립운동가들은 당시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국권을 침탈당한 한국인에게 상당한 면에서 독립의식을 고취와 국가의식 함양에 영향을 주었다고 판단된다.

참고 문헌

《每日申報》, 1920. 5. 19.
《독립운동사 제7권 : 의열투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