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백운한

시대 : 1920
인물 : 백운한(白雲翰), 고진태(高鎭泰), 김인수(金仁洙), 김근하(金根河), 이명서(李明瑞), 함일(咸一), 김용국(
신분 :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단원

시대적 배경

백운한(白雲翰)이 활동한 시기는 1920년 10월로 전해인 1919년은 3·1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당시 일제는 식민통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기초단계로서, 입법·사법·행정·군사 등 일체의 권력을 가진 조선총독이 강력한 헌병·경찰력을 배경으로 무단 강압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결사·집회를 금지시키고 한글신문을 폐간시켰으며 관리나 교원까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하였다. 범죄즉결례·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 등을 공포, 재판을 거치지 않고 헌병경찰이 즉결처분을 할 수 있게 하여 많은 한국인을 탄압하고 애국지사를 모조리 투옥하였다. 경제적으로는 한국을 식량·원료 공급 및 상품의 독점시장으로 개편하기 시작, 철도·항만·도로·통신 등 기초적 건설사업에 착수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여 많은 토지들이 일본인과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에 넘어갔으며, 그 결과 한국 농민 대부분이 소작농으로 전락, 기존사회가 급속히 해체되는 과정을 밟았다. 이러한 급격한 개혁과 토지 상실로 민족의 원한과 반항심은 더욱 커져, 각처에서 애국지사들이 국권회복을 부르짖었고, 해외로 망명하여 외교적 수단과 무력항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3·1운동은 1894년 동학혁명 이후 전통적 자주이념에 따라 성숙·발전되어 온 민족주의 민중구국운동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한편, 3·1운동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그해 2월 8일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이며, 국제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듬해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T.W.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은 것도 원인이 되었다. 이후, 항일 무장독립운동이 이전보다 더더욱 활발하게 전개된다.

세부 사항

3.1운동의 격동이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부터 우리 독립운동에는 하나의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즉, 수세에서 공세, 평화적인 방법에서 직접 행동적인 것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0년 상반기로부터 국경 일대에 걸쳐 우리 무장 독립단들의 활동은 점점 활발해졌고, 이 일대는 마치 전시 상태 하에서와 같이 물정소연(物情騷然)해졌다.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소속 백운한(白雲翰)의 의거는 이러한 시기에 일어난 것이었다.
백운한은 1888년 평북 의주군(義州郡)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항상 조국 독립을 열망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봉기하자 고진태(高鎭泰)·김인수(金仁洙) 등과 같이 3월 31일 의주군 고령면(高靈面) 영산(永山) 장터에서 다수한 군중을 모아 만세 시위 투쟁을 주도하고 나서 곧 압록강을 건너 중국 관전현(寬甸顯) 납자구(拉子溝) 유양전(柳楊甸)에 거주를 두고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는 1920년 10월 김근하(金根河)·이명서(李明瑞)·함일(咸一) 등과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평양의 일제 시설을 파괴하고 평안 남·북도 각지를 왕래하며 군자금 모연과 친일파(親一派), 주구배(走狗輩) 들을 토벌했다. 또, 평북 의주군 가산면(加山面) 가송동(架松洞)에서 김용국(金用國)·김치규(金致奎) 등에게 군자금을 모연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자를 암살하고자 동년 12월 23일 평북 용천군(龍川郡) 읍동면(邑洞面) 성동리(城東里)에 거주하는 최시준(崔時俊)·최시걸(崔時傑) 형제의 집에 들어가서 시준을 쏘아 중상을 입히고 다시 시걸을 쏘아 죽인 후, 문밖으로 달아나는 최의 모친 유씨(柳氏)를 사살했다. 또한 그는 우승창(禹承昌)·주상옥(朱尙玉) 등과 함께 평북 선천군(宣川郡) 태산면장(台山面長) 김병준(金炳駿)과 동 면서기(面書記) 김은기(金殷基)도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자들이니 이들을 처단하고 공금을 군자금으로 몰수할 것을 결심한 후, 1920년 3월 15일 상오 10시 20분경 태산면 사무소에 이르러 면장 김병준과 서기 김은기에게 권총을 대고 한국 사람으로 조국의 독립을 반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공금 모은 것이 있으면 내놓으라고 호통쳤다. 저들은 할 수 없이 7백 49원 59전뿐이라고 실토하니 그것을 고두고, 면장과 서기는 면사무소 뜰 안에서 총살해 버렸다.
1920년 4월 백 의사는 다시 평양의 일제 기관을 습격하였는데, 일경은 그의 부인 차씨(車氏)를 경찰서에 구속해 놓고 남편의 거소를 대라하니 끝까지 모른다고 버티므로 그녀를 고문하여 죽게 했다. 백 의사는 독립단 본부로 돌아오던 길에 1921년 7월 관전현 상루구(上漏溝)에서 평북 경찰부 형사대에게 체포되어 동년 10월 2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평양복심법원(平壤覆審法院)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당하고 마침내 평양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는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동안 당시 조선 총독 재등실(齋藤實)에게 장문의 경고서(警告書)를 보내기도 하였다.

참고 문헌

경성고등법원 판결문(고 4),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소장, 《독립운동사 제7권 : 의열투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