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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점매복전

시대 : 1939
인물 :
신분 :

세부 사항

특설부대는 항일연군 토벌중 승리를 거둔 것만은 아니었다. 초창기에 대패를 당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사가점 매복전’이다.
1939년 8월 23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3방면군은 위증민의 지휘 아래 대사하 집단부락을 불시에 습격하였다. 급보를 받은 명월구의 일본군 수비대는 대장 궁본(宮本)이하 80명을, 특설부대는 교육대 반장 오상현 이하 20명정도 등 도합 100여명 지원군을 급파했다. 그러나 대사하에 도착한 때는 벌써 항일연군은 철거를 했고 대사하 일본경찰서의 일본군과 무장자위단은 전멸을 당한 뒤였다. 이튿날 지원군은 일본군의 시체와 가족을 싣고 명월구로 돌아가던 길에 사가점(지금의 안도현 영경향류수촌)에서 항일연군의 매복에 부닥쳤다. 불의에 습격을 당한 토벌대는 4명의 특설부대원 외에 전부 죽었다. 이 전투를 항일운동사에서 ‘사가점 매복전’이라고 부른다. 그 전투에서 제3방면군의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크고 전과가 가장 휘황한 전투였으며, 특설부대의 입장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참패로 기록되고 있다. 만주국 국무원에서는 사가점 전투에서 죽은 16명 특설부대원의 장례식을 명월구 학교 예당에서 치렀으며, 참패를 당한 지점에 ‘16용사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만주국 국무원에서는 전사자 중 반장 오상현한테는 경훈장, 남일록 등 15명에게는 주국장을 발급하였고, 생존자 중 끝까지 저항하였던 현학춘한테는 3급 무공장을 수여하였다. 성장으로 재임 중 이범익은 장백산맥 일대에서 공산게릴라의 위협으로부터 한인동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성당국이 독자적인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실현되지 않았으나, 그뒤 1939년 10월에 관동군예하 제2 독립수비대장 노조에(野副昌德)육군소장이 이끄는 게릴라 토벌대는 유격구 내의 근거지를 샅샅이 추적하기 시작하여 1년반만에 이른바 동북항일련군을 섬멸하게 된다. 이때 가까스로 만주국경선을 넘어 소련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한 일부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있던 소련 극동군 정보기관인 오케얀스카야의 야영학교에 수용되었던 것으로 알겨지고 있다.

참고 문헌

류연산,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 2004.
남창룡, 《만주제국 조선인》, 신세림,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