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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렬

시대 : 1920
인물 : 여행렬(呂行烈), 정찬조(鄭燦朝), 백기환(白基煥), 홍석운(洪錫雲), 이기영(李起榮),김송혁(金松爀), 한준
신분 : 항일구국단(抗日救國團) 단원

세부 사항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이 평화적 투쟁에서 직접 행동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활동하던 사람 중의 한 명이 여행렬이다. 이 당시는 무장 독립운동의 초창기적 시기로 평가되기도 하는데, 제2의 수도(首都)라고 할 수 있는 평양 시내, 그것도 백주 대로상에서 일본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고 하는 측면에서 당시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여행렬은 1892년 10월 17일 평남 중화군(中和郡) 풍동면(楓洞面) 풍정리(豊井里)에서 출생했었다. 그 아버지 여순근(呂淳根)은 1899年(高宗 光武 3年)에 한국무관학교(韓國武官學校)를 졸업하고 참위(參尉) 임관되었다가 1902년에 부위(副尉)에 승진되었는데, 1907년 일제와의 소위 정미조약(丁未條約)에 의하여 군대 해산이 되니 그는 분함을 참지 못해, 일본군과 끝까지 항전하다가 다시 강원도로 가서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항전을 계속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아들 행렬은 1909년 서울 YMCA 영어 학교를 졸업하고 가만히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1919년 3.1운동 직후 만주 관전현(寬甸縣)에 있던 상해임정 독판(督辦)의 지시를 받고 석판 기술자(石板技術者) 강춘성(姜春成)과 또 동지 김상만(金相萬)·주석환(朱錫煥)·표영준(表永俊)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서 아버지 순근과 김승만을 만나보고 임시정부와의 연락 방법 및 국내에서 활동할 방략을 세우고 귀국했다. 그리고 다시 상해까지 다녀와서 홍석운(洪錫雲)·이기영(李起榮)·김송혁(金松爀)·한준관(韓俊觀)·김예진(金禮鎭)·한성로(韓聖魯)·문빈(文斌)·이춘삼(李春三) 등과 더불어 항일구국단(抗日救國團)을 조직하고, 행렬은 그 단체 총무(總務)가 되어 지도와 기획(企劃)의 책임을 맡고 활동했다.
우선 1919년 11월에 만주로부터 돌아오는 표영준·유성삼의 편으로 권총이 반입되었고 주석환·김상만으로부터 폭탄을 입수했다. 그리고 1920년 3월 임시정부에서 특파되어 국내에 들어온 김석황(金錫璜)을 평양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만나 협의하고, 결사의 용단을 조직하고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지부장을 선임하니, 그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서울 지부장 황중극(黃仲極), 평원군(平原郡) 한천(漢川) 지부장 최윤팔(崔允八), 중화군(中和郡) 지부장 임세환(林世煥), 순천군(順天郡) 지부장 노기순(盧基淳), 성천군(順天郡) 지부장 한준항(韓俊恒), 수안군(遂安郡) 지부장 허성섭(許成燮), 강동군(江東郡) 지부장 이수영(李秀英), 삼등(三登) 지부장 백인덕(白仁德), 그리고, 군자금을 모집해 김석황을 통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한편 무기구입에 힘을 썼다. 그러다가 동년 5월 의용단 본부인 전기 기홀 병원에서 지부장 및 간부회를 열고 무장 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단원을 편대(編隊)하는 동시에 무기를 배부했다. 그러자, 동년 8월 3일 만주로부터 동지들이 추가 입국하니 그들과 합력하여 평남 도청을 비롯하여 평양경찰서 등 기관을 일시에 폭파하기 위한 행동을 개시하였다.
여행렬은 표영준과 함께 그날 밤 9시 30분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고 평양성(城) 서북쪽인 칠성문(七星門)으로 나아가다가 일본인 순사(巡査) 횡산구차(橫山駒次)에게 불심 검문을 받게 되니, 여·표 두 동지는 권총을 발사하여 그에게 중상을 입혀 5일 뒤에 절명하게 했다. 두 사람은 또한 8월 20일 하오 6시경 평남도 경찰 지부장이 탄 자동차가 부벽루 밑 청류벽(淸流壁) 가도를 달리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총격하여 운전수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리고 동월 22일 민양기(閔良基)의 안내로 대동강 하류를 지나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으로 가던 도중 평양서 20리 쯤 떨어진 노상에서 일본인 순사 삼본(森本)을 사살하였다 그 뒤, 행렬은 평남중화경찰서에 잡혀서 평양경찰서로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1920년 12월 17일 평양지방법원에서 8년의 징역언도를 받고 평양복심법원에 공소(控訴)했었으나 기각당하고 평양 감옥에서 복역 중 서울 형무소로 이감되어, 만 6년 6개월 만인 1927년 8월 22일에 출옥하였다.
행렬은 출옥한 그 해 9월에 다시 만주 길림성 길림시(吉林市)로 건너가서 부친 여순근과 이청천(李靑天)·허영백(許英伯)등을 만나 보고 상해로 가던 도중, 산동성(山東省) 연태시(煙坮市) 정양가(正陽街)에서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어 일본영사관에 인계되고 거기서 국내로 압송되어 거주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가만있지 않았다. 1945년 2월 평양 신사(平壤神社) 방화와 군사 시설 파괴 혐의로 평남 경찰부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또,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여행렬과 공동 작전한 동지 표영준은 1896년 평남 강동군(江東郡) 삼등면(三登面) 자양리(紫陽里) 출생으로 행동 후 잠시 기홀 병원에 은신하고 있더니, 동년 8월 22일 일경에게 포위당하여 체포되고, 동년 12월 17일 여 행렬과 함께 평양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無期懲役) 언도를 받고 불복 공소하였으나 역시 기각판결로 평양 감옥에서 복역했다. 그리고, 위의 항일구국단 단원 명단에 나오는 문빈(文斌)은 여행렬과 같은 고향인 중화군 동부(東部) 사람으로 여행렬·표영준 등이 평양 시내에서 활동하는 것과 전후하여 중화군 서부(西部)의 부호집을 찾아 다니며 군자금을 모연하다가 일본경찰과 조우(遭遇), 총격전을 벌인 끝에 뒷발굼치에 총상(銃傷)을 입고 체포되어 중화군 해압면(海鴨面) 요포리(謠浦里) 경찰관 주재소(駐在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가 그날 밤에 탈출하였다고 한다.

참고 문헌

《독립운동사》 제7권 : 의열투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