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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륜

시대 : 1929
인물 : 오성륜, 김익상, 강건호
신분 :

시대적 배경

조선의열단은 1919년 11월 9일 만주 길림성 포호문 밖에서 조국 광복을 폭력투쟁으로 이룩하자는 기치 밑에 김원봉ㆍ양건호ㆍ박봉근ㆍ김옥ㆍ윤세주ㆍ한봉인ㆍ서상락ㆍ권준ㆍ신철휴ㆍ곽재기ㆍ강세우ㆍ이성우ㆍ배동선 등 13명에 의하여 결성되었으며,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중에서 일제로 하여금 가장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하였다. 의열단은 “정의되는 일을 맹열히 한다”는 의열을 따서 적극적인 투쟁방법을 표방하고 공약 10조와 투쟁목표를 설정하였는데 그들은 ‘구수왜노’ ‘광복조국’ ‘타도계급’ ‘평균담권’을 내세우고 조선총독부ㆍ동양척식회사ㆍ매일신보사ㆍ경찰서ㆍ고관ㆍ군수뇌ㆍ대만총독ㆍ매국노ㆍ친일거두ㆍ밀정ㆍ반민족적 토호ㆍ비열자를 투쟁대상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의열단의 정신은 단장 김원봉의 말에서 충분히 뒷받침되는데 그는 “조국광복에 대한 항일투쟁은 정규군이나 외교선전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오직 결사의 지사와 폭탄의 위력에 의존할 수밖에 방도가 없으므로 동경과 서울에서 5~6대의 총독을 무찌르고 암살을 매년 몇 차례 한다면 일본인 스스로가 조선통치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 의열단은 북경으로 본부를 옮기고 상해방면의 급진적인 독립운동자를 규합하여 1924년 경에는 70여명으로 단세가 확장되었으며 3.1운동 후 가장 활발하게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활동하였으며 또한 목표의식이 뚜렷한 공작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ㅔ>의열단의 제 1차 공작은 투쟁방향에서 명시된 바와 같이 국내에서의 일제 주요기관 폭파와 요인암살공작으로 공작수행을 위하여 1920년 3월 곽재기ㆍ이성우 등이 주동이 되어 주동이 되어 폭탄을 국내까지 반입하는데 있어 폭탄과 무기를 고량가마속에 넣어 다른 고량가마와 함께 반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그 후 거사를 위하여 서울로 옮기면서 공작대상을 염탐하던 중 탐지되어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제 2차 공작은 그 실패에 굴하지 않고 1920년 초 미국의원단이 일본을 방문함을 기회로 동경에서 일본인을 가장하여 반미 전단살포와 폭탄투척으로 외교적으로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공작사명을 띠고 박재혁이 침투하였으나 이미 같은 공작을 추진한 다른 단체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일본신문에 보도됨으로써 부득이 계획을 변경하여 그해 9월 14일 일제 침략의 문호인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해 중국 고서적상을 가장하여 접근 폭파하였다. 제3차 공작은 그해 12월 27일 최수봉이 밀양경찰서 조회시간을 이용하여 폭판을 투척하는 등 계속적인 공작을 추진하였는데 4차 공작부터는 그 규모가 커지면서 침략의 총본산인 조선총독부를 대상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겠다.

세부 사항

의열단은 여러 차례의 공작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한데 대하여 공작전반을 재검토하게 되었으며, 보다 광범위하고 다각적인 공작수행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중요한 정보 하나를 입수하게 되었다. 그것은 일본 군벌의 거물인 육군대장 전중의일(田中義一)이 친선방문이라는 명분하에 필리핀을 거쳐 중국 상해에 들렀다가 만주를 거쳐 조선으로 간다는 내용이었다.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의열단에서는 곧 암살계획을 수립하고 행동대원으로 김익상ㆍ오성륜ㆍ강건호 3명을 선발하였다. 의열단으로서는 다각도로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그가 과연 중국으로 온다면 상해를 반드시 거쳐갈 것인가를 또한 신중히 검토하고 상해에 사륙할 때에는 김익상이 담당할 것이며, 여기서 실패하면 오성륜이 남경에서, 그마저 실해하게 되면 강건호가 천진에서 연쇄적으로 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던 중 전중의일(田中義一)은 3월 26일 상해로 온다는 것이 확실하게 되자 공작계획은 다시 검토되고 상해에서의 거사성공을 다짐하였다.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기로 하고 상해부두에서 성공 못하면 그날밤으로 예정되어 있는 일본영사관 파티에서 결행키로 했다. 상해부두에서는 전중이 배에서 내릴 때, 자동차로 갈 때, 그리고 자동차를 탈 때 이렇게 3선으로 나누고 제 1선은 사격의 명수인 오성륜이 권총으로, 제 3선은 오건호가 폭탄으로 저격하는 공작방법을 택했다. 1922년 3월 29일 상해 황포탄부두는 일찍부터 많은 인파와 차량으로 붐볐다. 오후 2시 40분경 청양호는 드디어 부두에 닿았다. 먼저 영국의장대 군악연주가 있은 다음 전중은 신사복 차림으로 트랩에 나섰다. 그 때 영국 여성 2, 3명이 서 있는 것을 본 전중은 먼저 그들을 트랩서 내려가게 한 다음 부두에 상륙하였으며 신문기자들을 맞이할 때 오성륜이 그를 향해 권총 7발을 연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앞을 걸어가던 영국인 톰슨부인에 명중하여 비명과 함께 쓰러지자 바로 그 뒤에서 수행하던 영사관주재 무관 奈良(내량)대위가 “각하 위험합니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 찰나 제 2선을 맡았던 김익상이 군중을 헤치며 나와 그를 향햐 권총을 발사하였다. 탄환은 내량대위의 고함소리에 몸을 움츠린 전중의 모자를 꿰뚫었다. 다음 순간 김익상은 권총을 왼손으로 바꾸어 쥐고 바른손으로 폭탄을 꺼내들고 안전장치를 풀려고 전주에다 손잡이를 힘껏 내리친 다음 전중을 향해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불발이었다. 그의 다급한 동작으로 인해 안전장치가 완전히 풀리지 않아 폭발하지 않았다. 전중은 급히 세관청사 안으로 뛰어 들어가 거기서 자동차를 타고 도망하였다. 이 때 두 사람은 곧 바로 일제의 추격을 받았는데, 강건호는 군중 속으로 섞여 들어 체포되지 않았지만, 김익상과 오성륜은 안타깝게 체포되었다. 그 후 오성륜은 경찰서에서 탈출하였으며, 김익상은 끝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21년을 복역하고 풀려났지만 암살되고 말았다.

참고 문헌

《高等警察要史》.
《騎驢隨筆》.
《梅泉野錄》.
《武裝獨立運動秘史》.
《朝鮮民族運動年鑑》.
국회도서관,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文一民, 《韓國獨立運動史》.
金承學, 《韓國獨立史》下卷.
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
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資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