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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시대 : 1932
인물 : 윤봉길(尹奉吉:1908.6.21~1932.12.19)
신분 : 한인애국단원

시대적 배경

일제는 1930년대에 와서 경제 · 정치 · 군사적인 요인들이 복합되어 만주와 중국으로 침략을 확대하게 되었다. 일본경제의 불황은 1926년부터 심각하게 나타나 다음 해에는 대부분의 은행이 도산하고, 국제적 불경기의 충격과 결합되어 1930년 초부터 심각한 공황으로 치달았다. 러·일 전쟁 이후부터 성장해 온 군부는 해외에 대한 군사적 팽창 즉 침략과 국내에서의 엄격한 통제경제체제가 이로부터 탈출하는 길이라고 믿게 되었고, 실업자가 200만을 넘어서고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이 크게 일어나서 정치문제로 발전하게 됨으로써 군부로 하여금 만주·몽고의 침략을 주장하는 구실을 주게 되었다. 마침내 소작쟁의 등에 허덕이던 농촌 청년들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의 중국은 장개석이 손문의 유지를 이어받아 북벌을 거의 완성시키고 있었다. 그러자 일제는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려고 1928년 산동에 군대를 진주시켜 '제남사건'을 일으켰으나, 장개석은 일제에게 대항하지 않고 우선 북벌을 계속했다. 이에 따라 그 대상이던 북경정부의 장작림이 만주로 철수하는데, 일제는 그의 반일적 태도를 염려하여 그가 탄 열차를 폭파하여 살해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張學良은 장개석과 결속하여 보다 강력하게 반일정책을 모색하니 日帝는 문관이나 군부할 것 없이 만주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3·1운동 후 만주에 그 기반을 둔 한국독립군이 간단 없이 한·중 국경선 부근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어 일제의 한국지배가 흔들리고 있었다. 또 만주에서는 일제가 가상의 적으로 간주하던 소련이 세력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중 ·소가 공동관리하던 중동철도를 1929년에 국민정부가 국유화를 선언하자 소련은 극동군 전병력을 국경에 집결시키고 '하바로프스크 협정' 에 의하여 이를 환원시켰다. 요컨대 일제는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여 만주에서 확보한 강제적 이익을 확대·영구화하고, 한국독립군 활동의 근절, 소련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만주침략을 계획하였다.
일제는 이제 그 구실만 남겨놓고 있었는데, 만보산사건·중촌 대위 피살사건·유조구철도폭파사건 등에서 그 흉계가 나타났다. 만보산사건은 1931년 4월에 일어난 한·중 농민 간의 사소한 수로싸움이었던 것인데, 일제가 이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양국 민족사이의 충돌로 확대시키고, 중·일 양국관헌의 대립으로 유도해 만주침략의 구실을 삼는 동시에 한국인과 중국인을 대립시켜 재만한국독립군을 고립시키려는 것이었다. 즉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반중감정으로 쏠리게 하여 공동의 적인 일제에 대한 한·중 양국민의 연대의식을 약화시키는 한편, 한국인을 만주침략에 가담시키기 위해서 만고산 사건을 최대로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1931년 6월에 일제 육군참모본부 소속 중촌진태랑 대위가 소련에 대한 작전계획을 위해 흥안령 방면에 파견되었다가 중국군에게 피살된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중촌이 군사 정보활동을 한 것은 감춰두고 만몽침략의 기운을 조성하는 구실로 삼기 위해 중국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중국은 9월 상순 경에야 이 사실을 시인하고 외교 교섭에 의해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일제는 이 사건을 크게 과장하여 자국민의 민심을 선동·자극하는 한편, 육군의 정예인 제 2사단을 관동군의 주력으로 대체하는 등 침략 작전상의 준비를 마쳤다. 마침내 1931년 9월 18일에는 관동군이 봉천 교외의 유조구 부근 만철 선로의 일부를 자기들 손으로 폭파하고 이것을 중국측에서 폭파했다고 트집 잡아 즉시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일제가 '만주사변'이라 부르는 9·18사건인데, 1937년 중일전쟁과 연결되어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15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제는 표면상 전선을 확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1932년 1월에 금주, 2월에 하얼빈을 점령하니, 4개월 반만에 만주의 주요 도시와 철도 연선이 관동군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만주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일제는 곧 괴뢰 '만주국' 건설을 위한 공작을 진행하였다. 전쟁초기부터 법제와 금융에 관한 연구를 전문가에게 맡기는 등 각본에 따라 1932년 3월 1일에 '만주국'의 건국을 선언하게 되었다. 3월 9일에는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만주국의 집정에 취임함으로써 일제의 만주침략은 일단락되었다.p>이어서 일제는 만주를 단시일 내에 석권한 여위(餘威)를 빌어 일거에 중국의 심장부를 침공하여 소위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이것은 만주침략에 대한 국제여론이 나쁘고, 중국의 학생·노동자·민중들의 민족주의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만주국' 건설을 감추고자 했던 것으로, 말하자면 '만주국' 건설운동의 양동작전이었던 것이다.
1932년 1월 무렵의 상해에서는 일제의 만주침략을 규탄하는 시민대회가 열리고 中·日人 간의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는 가운데 1월 8일에 이봉창의 동경의거가 일어나자 중국의 신문들은 이를 두둔하는 기사를 싣는 등 반일감정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중국인 무뢰한을 매수하여 일인 탁발승을 살해하게 함으로써 중 · 일인 간의 반감을 심화시켰다. 촌정창송찬 상해총영사는 24시간 기한부로 상해시 당국에 대하여 시장의 진사와 가해자의 처벌과 피해자의 배상을 요구하였다. 중국측은 할 수 없이 모두 승낙하였으나, 이미 계획된 도발은 중국이 어떠한 양보를 한다고 해도 저지할 수 없었다.
중국은 공산군 40만이 남경을 위협하고 있었고 각지에 군벌이 잔존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중앙군이 투입되지 못하고, 본래 광동파 지방군이었던 채정해가 지휘하는 제 19로군과 장치중이 지휘하는 중앙군 제 5군 만이 참전하고 있었다. 제 19로군은 내전 경험을 쌓은 정예군으로 1931년 가을 상해 부근에 배치되면서부터 상해 시민의 항일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히 싸워 일제의 작전에 차질을 주었다. 그러나 일 육군이 대거 증파되어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중국군의 배후에 상륙하게 되자 중국군은 지탱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즉각 전투중지를 명하고 정전회담을 시작했으나, 난항을 거듭한 끝에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성공한 후에야 일군이 사변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결정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상해사변은 일제가 만주점령의 몇 배나 되는 손해를 입으면서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큰 실패로 끝났다. 이는 중국 민중과 제 19로군의 치열한 저항의 결과였다. 그러나 일제는 3월 1일에 당초의 목적인 '만주국'의 성립을 선포하여 기정사실화하였다.

세부 사항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德山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인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日帝)의 식민지교육을 배척하여 학교를 자퇴하고, 사설서당인 오치서숙(烏致書塾)에 들어가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에게서 한학을 수학하면서 이때부터 그의 학업은 일취월장하였고 특히 시(詩)에는 발군이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23세가 되기까지 고향에서 애국적 농민운동에 앞장섰다. 1927년 그는 구매조합을 조직하여 농민의 경제자립을 추구하였으며 독서회(讀書會)를 통해서 문맹퇴치에 힘썼다. 또한 1928년 부흥야학원(富興夜學院)을 설립하여 농민의 자녀를 교육시켰고 월례강연회(月例講演會) 등을 열어 신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지어 허례허식을 지양하는 교육정신과 주체적 민족정신의 확립과 근검?절약 그리고 근로정신에 대한 그의 의식을 표출하였고,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1929년에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월진회를 통해서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배양, 그리고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등 농촌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다.
이후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전에는 일제의 압박으로 농촌운동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라는 일곱 글자의 유서를 남겨 놓은 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1년 5월 8일 상해에 도착한 그는 한인 동포 실업인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중국채품공사에 취직하여 말총모자 등을 만드는 직공으로 근무하며 한인공우친목회(韓人工友親睦會)를 조직해서 회장의 일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2년 이른 봄부터 그는 상해의 홍구(虹口) 일대에서 야채장사를 하며 일본군 관계의 정보를 탐지하던 중 박진의 소개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한인교포단장(韓人僑胞團長)인 백범(白凡) 김구(金九)를 만나게 되었다. 윤봉길을 본 백범은 “노소의 차이가 있을 뿐 민족 혁명 대업을 위한 다시없는 큰 동지를 얻었다” 하며 스스로 흡족해 하였다. 당시 김구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의혈투쟁을 계획하고, 그 첫 결실로서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으로 하여금 왜왕(倭王)을 폭사시키려 하였으나 불행히 성공치 못하였다. 하지만 이봉창의 의거는 중국내의 동포들과 독립운동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투쟁에 대한 열기가 식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게 되었다. 또한 윤봉길에게는 일제에 대해 새로운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김구를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토론하고 의열투쟁의 기회를 열망하는 상태에서 1932년 4월 29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상해사변으로 상해에 진주한 일본군은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의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며, 상해에 있는 일본 거류민은 도시락과 수통, 그리고 입장권만을 휴대하고 참가하라는 보도를 상해일일신문(上海日日新聞)에 보도하였다.
이에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잔칫날을 거사의 날로 잡았다.


그 이유는 그날의 전승경축식에는 상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총사령관 이하 군(軍)?정(政) 수뇌들이 그대로 이동하여 식장에 모일 것이며, 만약 그 원흉들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다면 이봉창의 동경의거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자긍심을 동료들에게 줄 수가 있을뿐더러 중국군이 막대한 희생을 내고도 이기지 못하였던 일본 침략군의 수뇌부를 폭파시키는 전과를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살신구국의 결심을 한 그는 의거 4일 전인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단원자격으로 김구 단장 앞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비장한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4월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에 가서 현지를 면밀히 조사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고, 특히 28일에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그곳에 머물러 준비하는 축하식장의 팻말을 보고 도륙의 대상인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해군 함대 사령과 노무라(野村吉三郞)의 설 자리와 그 주위에 모일 인물들까지 파악하였다. 4월 29일, 일찍 한 교포 집에서 한인애국단의 김구 단장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김구 단장으로부터 받아 어깨에 메고 손에 들었다. 이 준비된 폭탄은 김구 단장의 요청으로 중국 상해 병공창(兵工廠) 창장 송식표가 기사(技師) 왕백수(王伯修)를 시켜 비밀리에 제조한 것으로, 병공창의 병기주임(兵器主任)이었던 김홍일(金弘壹)장군의 주선으로 김구-윤봉길로 전달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홍구공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자신이 가진 새 시계를 김구 단장의 헌 것과 바꾸어 갖고 의거 준비금으로 받은 돈의 나머지를 김구 단장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윤봉길은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라는 김구 단장의 목메인 소리를 들으며 천하영웅의 모습으로 거사장을 향해 떠났다.
오전 7시 50분경, 그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 미리 작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러 투척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구공원에는 수만의 인파가 운집하였고, 중앙의 식단(式壇)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전면에는 일본 관민이 정연히 도열하였고, 그 앞에 일본 학생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일본 육?해군의 군대가 호위할 뿐 아니라, 그 뒤 수 미터의 간격을 두고 경비원이 이중 삼중으로 경계하고 그 뒤엔 일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식단 위에는 표적물인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이 중앙에 자리 잡았고, 그 좌우로 일제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주중공사(駐中公使) 시게미쓰(重光葵)?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貞次), 주중(駐中) 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민단 간부 도모노(友野盛) 등 상해사변의 원흉들이 죽음을 기다리며 착석해 있었다. 그는 미리 보아두었던 뒷 편의 군중 속에 들어가 투척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의거의 최후 준비를 하였다. 오전 11시 20분경, 기념식의 첫 순서인 관병식(觀兵式)을 끝내고 이어서 두 번째 순서인 축하식 순으로 접어들어 일본 국가가 제창되었고, 그것이 거의 끝날 무렵이 되었다. 드디어 11시 40분경, 운명의 시각이 되자 그는 도시락으로 된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메고 있던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의 덮개를 벗겨 가죽끈이 붙은 그대로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빼면서 앞사람을 헤치고 2미터 가량 전진하여 단상위로 투척하였다. 그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과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의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하여 일본 육군대장 시라가와(白川義則)는 전신에 24개 처의 파편을 맞아 신음하다 5월 24일 사망하였고, 제9사단장 육군총장 우에다(植田謙吉)는 다리를 절단하였으며, 해군총사령관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는 실명하였다. 또한 주중공사 시게미쓰는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었고, 거류민단장이며 상해 사변의 민간 원흉인 카와바다(河端貞次)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다. 이밖에도 단상에 있던 주중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와 민단 간부인 도모노(友野盛)도 각기 중상을 입었다. 그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게 피체되어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고 그해 5월 25일 일제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8일 일제 군헌의 엄중한 경계망속에 상해를 떠나 오오사카(大阪) 육군 위수(衛戍)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카나자와(金澤)교외의 미고우시(三小牛) 공병 작업장에서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였다.

참고 문헌

國家報勳處,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第8卷, 1990.
《高等警察要史》.
《騎驢隨筆》.
《武裝獨立運動秘史》.
《朝鮮民族運動年鑑》.
국회도서관,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文一民, 《韓國獨立運動史》.
金承學, 《韓國獨立史》下卷.
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
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資料集》
《東亞日報》, 1928. 7. 19, 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