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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준희

시대 : 1920
인물 : 윤준희(尹俊熙), 한상호(韓相浩), 임국정(林國楨), 최이붕(崔以鵬), 박웅세(朴雄世), 김준(金俊), 엄인섭(
신분 :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단원

시대적 배경

윤준희가 활동한 시기는 1920년 1월로 전해인 1919년은 3·1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당시 일제는 식민통치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기초단계로서, 입법·사법·행정·군사 등 일체의 권력을 가진 조선총독이 강력한 헌병·경찰력을 배경으로 무단 강압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결사·집회를 금지시키고 한글신문을 폐간시켰으며 관리나 교원까지 제복을 입고 칼을 차게 하였다. 범죄즉결례·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 등을 공포, 재판을 거치지 않고 헌병경찰이 즉결처분을 할 수 있게 하여 많은 한국인을 탄압하고 애국지사를 모조리 투옥하였다. 경제적으로는 한국을 식량·원료 공급 및 상품의 독점시장으로 개편하기 시작, 철도·항만·도로·통신 등 기초적 건설사업에 착수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여 많은 토지들이 일본인과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에 넘어갔으며, 그 결과 한국 농민 대부분이 소작농으로 전락, 기존사회가 급속히 해체되는 과정을 밟았다. 이러한 급격한 개혁과 토지 상실로 민족의 원한과 반항심은 더욱 커져, 각처에서 애국지사들이 국권회복을 부르짖었고, 해외로 망명하여 외교적 수단과 무력항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3·1운동은 1894년 동학혁명 이후 전통적 자주이념에 따라 성숙·발전되어 온 민족주의 민중구국운동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한편, 3·1운동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그해 2월 8일 동경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이며, 국제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듬해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T.W.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은 것도 원인이 되었다. 이후, 항일 무장독립운동이 이전보다 더더욱 활발하게 전개된다.

세부 사항

윤준희(尹俊熙)는 1892년 12월 26일 함북 회령군(會寧郡) 보을면(甫乙面) 남산동(南山洞)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한문 수학을 하고 있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니 조국독립운동에 공헌하려는 큰 뜻을 품고 두만강을 건너 만주 간도(間島)로 가서 이상설(李相卨)이 설립 경영하던 서전서숙(瑞甸書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용정(龍井)에 있던 영신학교(永新學校) 교원으로 봉직하였으며, 진작 한상호(韓相浩)·임국정(林國楨)·최이붕(崔以鵬) 등 동지들과 철혈광복단이라는 행동 단체를 조직하고 당시 남민에 본거를 두고 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입했다. 그리하여, 북로 군정서의 특파대장(特派隊長)의 임명을 받고 전기 동지들과 더불어 간도 와룡동(臥龍洞) 김하석(金河錫)의 집에서 군자금 모연(募捐) 방책을 상의했다. 그때 김하석의 말이 조선은행(朝鮮銀行) 회령지점(會寧支店)에서 동 은행용정출장소(出張所)로 수시 송금하는 터이니 그 날짜와 시간을 탐지해서 행동하면 좋을 것이라 하였다. 이에 동지들은 그 송금하는 일시(日時)를 알아내서 그것을 습격·탈취하여 군자금으로 충당하게 하자고, 일결하고 당시 조선은행 회령 지점원인 전홍섭(全弘燮)을 포섭하여 동지 가입을 시키는 한편, 박웅세(朴雄世)·김준(金俊) 등을 새로 동지로 얻었다.
그리고, 기회가 도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 전홍섭으로부터 1920년 1월 4.5일 경 돈 15만 원을 용정으로 송금할 예정이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동년 1월 4일 윤준희는 김준·박웅세와 함께 1조(組)가 되어 각기 권총과 마승(麻繩)·철봉 등을 갖고 먼저 떠나고, 한상호·최이붕·임국정 등은 또 다른 1조가 되어 역시 무기를 휴대하고 거사 예정 장소인 용정촌 쪽으로 2리쯤 떨어진 화룡현(和龍縣) 동양리(東陽里) 큰길가 버드나무 숲에서 매복 대기하고 있었다.
한편, 윤준희 팀은 그 곳에서 회령 쪽으로 은행 돈 수송대(輸送隊)가 오는가 안 오는가를 정찰(偵察)하며 길을 가던 도중 앞에서 무장한 일경 3명(그 중 1명은 조선인)이 2필의 말 잔등에 현금을 싣고 마부(馬夫)을 재촉하면서 오는 것과 마주쳤다. 이에 준희와 박웅세·김준 등은 권총을 10여 발 연사하여 일본인 순사 장우가상차(長友嘉相次)와 진길풍(陳吉豊)을 사살하고, 그들이 지니고 가던 현금을 탈취했다. 그 돈은 5원(圓)권 10만 원과 10 원권 5만 원 합계 15만 원의 거금이었다.
준희는 최이붕과 같이 이튿날(1월 5일) 의란구(依?溝) 유락구(有樂溝)에 이르러 김하석과 만나고 동월 9일 임 국정이 도착하자, 동월 10일 그 돈을 가지고 각처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 신한촌(新韓村)으로 들어가서 체코슬로바키아 제(製)인 무기를 다량 구입하여 북로 군정서에 제공했다. 북로군정서에서는 그 때까지 목총(木銃)을 갖고 군사 훈련을 하던 터인데, 이 무기를 공급받아 소속 부대가 신무기로 장비(裝備)를 고쳐 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후일 저 유명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대첩(大捷)을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윤 의사 등의 기사가 있은 뒤에 용정의 일본 영사경찰에서는 중국 경찰과 합동으로 수사와 체포를 자행했다. 명당현(明黨峴)에서 조영(趙英)·유인학(兪仁學), 와룡동(臥龍洞)에서 최병국(崔炳國)·최이붕의 누이 동생 소영자(小英子) 외 농민 2명이 체포되었고, 국민회(國民會) 동부회장(東部會長) 양도헌(梁道憲)의 집은 수차 수색을 당하였고, 그의 아내는 몹시 매를 맞았다. 그 때 일본경찰은 이 거사가 대한청년회(大韓靑年會)의 소행인 줄 알고 이것을 기화로 하여 독립군 대수색을 하려고 이상과 같이 광분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최의사 일행의 행적을 따라 가서 그이들이 쉬고간 평강보강(平岡堡江)의 우리 교포 농민 수십 명을 체포하고, 다른 수색대는 혹은 길가에서 혹은 고개위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검문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총을 쏘며 명동학교(明東學校) 소재지인 장자촌(長者村)을 수색하였고, 또 어떤 날 새벽에는 중국 경찰 50여 인과 일본경찰 40여 명이 구창동중학교(舊昌東中學校) 소재지인 와룡동에 와서 사면을 포위하고 1백여 민가(民家) 전부를 수색하기도 했다. 1월 16일 일본경찰은 그곳에 있는 김순문(金舜文)의 집에 침입하여 그의 모친 63세의 노파와 그의 조카딸 일곱 살된 어린이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순문의 있는 곳을 대라고 협박하였으나, 끝까지 항변하니 할 수 없이 돌아가는 등 만행도 저질렀다. 무릇 이런 식으로 혼춘(琿春) 양수침자(楊水砧子)에서는 오가는 사람들을 무고히 구타하고 몸을 수색하였으므로 한동안 중·노령(中露領) 국경 지대의 교통이 두절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1920년 12월에 일본경찰의 주구(走狗) 엄인섭(嚴仁燮)의 밀고로 윤준희·한상호·임 국정 등 세 의사는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헌병경찰에게 체포되고 최이붕은 탈주하였다. 이 당시는 일본군이 소위 시베리아 출병을 하고 있던 때이므로 일본의 헌병경찰이 노령에도 있었던 것이며, 최이붕도 일단 잡혔다가 탈출 도주했던 것이다. 윤준희·한상호·임국정 등은 일본헌병대에서 모진 악형을 당하다가 청진(淸津)으로 압송되어 청진 지방 법원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상고(上告)하였으나 거기서도 기각되었으므로, 1921년 8월 25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대(絞首臺)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때 윤준희는 방년 30세였고, 임국정은 27세, 한상호는 23세였다. 이들은 모두 꽃다운 청춘으로 조국 독립을 위하여 차라리 기쁘게 산화(散華)했던 것이다.
그런데,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탈주한 최이붕은 동지들이 재판을 받으며 서대문 감옥에 갇혀 있을 적에 그들을 구출하고자 온갖 위험한 괴로움을 무릅쓰고 국내에서 숨어 들어와서 백방으로 탈옥시킬 공작을 하였으나, 원체 경계가 삼엄하고 단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뜻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눈물을 머금고 다시 간도로 돌아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임국정은 함남 함흥시(咸興市) 남문리(南門里)에서 1895년 3월 25일 출생이었다. 그는 1919년 3.1운동 후 만주 간도로 건너가서 윤준희 등과 동지가 되어 철혈광복단을 조직하고 본 거사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한상호는 1899년 함북 경성(鏡城) 출생으로 간도에서 성장, 그 곳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졸업하고 와룡소학교(臥龍小學校) 교원이다가 철혈광복단에 가입하여 이 거사에 참여했던 것이다. 조선은행 회령 지점원이던 전흥섭은 이 사건의 종범(從犯)으로 처벌을 받았다.

참고 문헌

《독립운동사 제7권 : 의열투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