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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시대 : 1932
인물 : 이봉창(李奉昌:1900~1932.10.10)
신분 : 한인애국단원

시대적 배경

일제는 1930년대에 와서 경제·정치·군사적인 요인들이 복합되어 만주와 중국으로 침략을 확대하게 되었다. 일본경제의 불황은 1926년부터 심각하게 나타나 다음 해에는 대부분의 은행이 도산하고, 국제적 불경기의 충격과 결합되어 1930년 초부터 심각한 공황으로 치달았다. 러·일 전쟁 이후부터 성장해 온 군부는 해외에 대한 군사적 팽창 즉 침략과 국내에서의 엄격한 통제경제체제가 이로부터 탈출하는 길이라고 믿게 되었고, 실업자가 200만을 넘어서고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이 크게 일어나서 정치문제로 발전하게 됨으로써 군부로 하여금 만주·몽고의 침략을 주장하는 구실을 주게 되었다. 마침내 소작쟁의 등에 허덕이던 농촌 청년들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의 중국은 장개석이 손문의 유지를 이어받아 북벌을 거의 완성시키고 있었다. 그러자 일제는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려고 1928년 산동에 군대를 진주시켜 '제남사건'을 일으켰으나, 장개석은 일제에게 대항하지 않고 우선 북벌을 계속했다. 이에 따라 그 대상이던 북경정부의 장작림이 만주로 철수하는데, 일제는 그의 반일적 태도를 염려하여 그가 탄 열차를 폭파하여 살해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장학량은 장개석과 결속하여 보다 강력하게 반일정책을 모색하니 일제는 문관이나 군부할 것 없이 만주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3·1운동 후 만주에 그 기반을 둔 한국독립군이 간단없이 한·중 국경선 부근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어 일제의 한국지배가 흔들리고 있었다. 또 만주에서는 일제가 가상의 적으로 간주하던 소련이 세력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중 ·소가 공동관리하던 중동철도를 1929년에 국민정부가 국유화를 선언하자 소련은 극동군 전병력을 국경에 집결시키고 '하바로프스크 협정' 에 의하여 이를 환원시켰다. 요컨대 일제는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여 만주에서 확보한 강제적 이익을 확대·영구화하고, 한국독립군 활동의 근절, 소련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만주침략을 계획하였다.
일제는 이제 그 구실만 남겨놓고 있었는데, 만보산사건·중촌 대위 피살사건·유조구철도폭파사건 등에서 그 흉계가 나타났다. 만보산사건은 1931년 4월에 일어난 한·중 농민 간의 사소한 수로싸움이었던 것인데, 일제가 이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양국 민족사이의 충돌로 확대시키고, 중·일 양국관헌의 대립으로 유도해 만주침략의 구실을 삼는 동시에 한국인과 중국인을 대립시켜 재만한국독립군을 고립시키려는 것이었다. 즉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반중감정으로 쏠리게 하여 공동의 적인 일제에 대한 한·중 양국민의 연대의식을 약화시키는 한편, 한국인을 만주침략에 가담시키기 위해서 만보산 사건을 최대로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1931년 6월에 일제 육군참모본부 소속 중촌진태랑 대위가 소련에 대한 작전계획을 위해 흥안령 방면에 파견되었다가 중국군에게 피살된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中村이 군사 정보활동을 한 것은 감춰두고 만몽침략의 기운을 조성하는 구실로 삼기 위해 중국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중국은 9월 상순 경에야 이 사실을 시인하고 외교 교섭에 의해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일제는 이 사건을 크게 과장하여 자국민의 민심을 선동·자극하는 한편, 육군의 정예인 제 2사단을 관동군의 주력으로 대체하는 등 침략 작전상의 준비를 마쳤다. 마침내 1931년 9월 18일에는 관동군이 봉천 교외의 유조구 부근 만철 선로의 일부를 자기들 손으로 폭파하고 이것을 중국측에서 폭파했다고 트집 잡아 즉시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일제가 '만주사변'이라 부르는 9·18사건인데, 1937년 중일전쟁과 연결되어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15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제는 표면상 전선을 확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1932년 1월에 금주, 2월에 하얼빈을 점령하니, 4개월 반만에 만주의 주요 도시와 철도 연선이 관동군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만주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일제는 곧 괴뢰 '만주국' 건설을 위한 공작을 진행하였다. 전쟁초기부터 법제와 금융에 관한 연구를 전문가에게 맡기는 등 각본에 따라 1932년 3월 1일에 '만주국'의 건국을 선언하게 되었다. 3월 9일에는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만주국의 집정에 취임함으로써 일제의 만주침략은 일단락되었다. 이어서 일제는 만주를 단시일 내에 석권한 여위(餘威)를 빌어 일거에 중국의 심장부를 침공하여 소위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이것은 만주침략에 대한 국제여론이 나쁘고, 중국의 학생·노동자·민중들의 민족주의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만주국' 건설을 감추고자 했던 것으로, 말하자면 '만주국' 건설운동의 양동작전이었던 것이다.
1932년 1월 무렵의 상해에서는 일제의 만주침략을 규탄하는 시민대회가 열리고 중·日人 간의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는 가운데 1월 8일에 이봉창의 동경의거가 일어나자 중국의 신문들은 이를 두둔하는 기사를 싣는 등 반일감정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중국인 무뢰한을 매수하여 일인 탁발승을 살해하게 함으로써 중 · 일인 간의 반감을 심화시켰다. 촌정창송찬 상해총영사는 24시간 기한부로 상해시 당국에 대하여 시장의 진사와 가해자의 처벌과 피해자의 배상을 요구하였다. 중국측은 할 수 없이 모두 승낙하였으나, 이미 계획된 도발은 중국이 어떠한 양보를 한다고 해도 저지할 수 없었다.
중국은 공산군 40만이 남경을 위협하고 있었고 각지에 군벌이 잔존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중앙군이 투입되지 못하고, 본래 광동파 지방군이었던 채정해가 지휘하는 제 19로군과 장치중이 지휘하는 중앙군 제 5군 만이 참전하고 있었다. 제 19로군은 내전 경험을 쌓은 정예군으로 1931년 가을 상해 부근에 배치되면서부터 상해 시민의 항일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히 싸워 일제의 작전에 차질을 주었다. 그러나 일 육군이 대거 증파되어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중국군의 배후에 상륙하게 되자 중국군은 지탱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즉각 전투중지를 명하고 정전회담을 시작했으나, 난항을 거듭한 끝에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성공한 후에야 일군이 사변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결정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상해사변은 일제가 만주점령의 몇 배나 되는 손해를 입으면서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큰 실패로 끝났다. 이는 중국 민중과 제 19로군의 치열한 저항의 결과였다. 그러나 일제는 3월 1일에 당초의 목적인 '만주국'의 성립을 선포하여 기정사실화하였다.

세부 사항

이봉창은 서울사람으로 10살에 용산의 사립 문창학교(文昌學校)에 입학하였으며 4년 후 졸업하여 일본인 경영의 제과점 종업원으로 있다가 19세 때 남만철도회사(南滿鐵道會社) 용산정거장에 운전견습생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는 1931년 1월 중순, 독립운동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은 일본말 섞인 한국말을 하며, 임시정부를 일제가 부르던 식으로 가정부(假政府)라고 하는 그를 수상히 여겨 문밖으로 내쫓으려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구(金九)는 일단 사무원인 김동우(金東宇)에게 그가 묶을 여관을 잡아 주라고 일렀다.
며칠 후 그는 직원들과 함께 술과 국수를 사다가 같이 먹으면서 취중에 “일본 임금을 찔러 죽이기는 아주 쉬운 일인데 당신네 독립운동자는 왜 이 일을 못하시오”하고 질책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었던 직원이 “그다지 쉬운 일이라면 그대는 왜 일본 임금을 죽이지 못하였는가?”하고 의아해 하였다. 이에 이봉창은 “작년에 일본 천황이 능행(陵行)하는 것을 길가에 엎드려 보았는데, 그때 내 손에 폭탄 한 개만 쥐어 있었다면 틀림없이 단숨에 죽여 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탄을 하였소”라고 말하였다. 그의 이 말은 당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심하던 한인애국단의 김구 단장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얼마 뒤 그는 김구를 만나 자신이 상해에 온 이유가 일왕 암살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으며 김구 단장도 그의 진심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이때 김구 단장을 감복시킨 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인생관이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뜨거운 동지애로 의기투합하였고 그의 일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일왕폭살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는 김구와 약 1년의 준비기간을 두고 자금과 폭탄은 김구가 준비하기로 하였으며, 자신은 준비기간 동안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김구를 만나 거사를 계획ㆍ준비하였다.
1931년 12월, 그와 김구가 약속한 지 1년이 거의 다 되어 미주 동포사회에서 거사에 필요한 자금이 도착하였고, 일왕을 폭살시키는데 필요한 폭탄도 준비되었다. 폭탄은 두 개였는데, 한 개는 김홍일(金弘壹)을 시켜 상해 병공창(兵工廠)에서, 또 한 개는 김현(金鉉)을 하남성(河南省) 유치(柳峙) 장군에게 보내어 구해온 것으로 한개는 일황의 처단용이었고, 하나는 이봉창의 자결용이었던 것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김구는 1931년 12월 6일 프랑스 조계의 임시정부 판공서에서 개최된 국무원회의에 이 거사 준비계획을 정식 상정하였다. 일부 인사들은 성공 가능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 하였으나, 김구 선생의 강렬한 의지가 작용되어 거사의 계획은 승인되었다. 마침내 12월 12일, 프랑스 조계 중흥여사(中興旅舍)로 이봉창의사를 초치하고, 마지막 거사 계획을 완료하였다.
1931년 12월 13일, 그는 김구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함으로써 결의를 다졌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그 이튿날 그의 장거를 위한 송별회가 있었으며 기념 촬영이 있었다. 이때 김구는 비장감에 젖어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는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라고 하여 김구를 위로하였다. 1931년 12월 17일 김구 단장의 전송을 받으면서 목하창장(木下昌藏)이라는 일본인 몸으로 가장하고 동경으로 출발하였다. 영천환(永川丸) 선편으로 신호(神戶)를 거쳐 동경(東京)에 도착한 그는 미장옥(尾張屋)여관에 묵으면서 일왕의 일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러던 중 12월 말경 그는 이듬해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동경 교외에 있는 대대목(大大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입수하여 그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상해의 김구 단장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전보를 보내어 거사날을 알렸다. 1932년 1월 8일 그는 앵전문(櫻田門)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 행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행렬이 나타나자 때를 놓치지 않고 군중 속에서 몸을 일으켜 일왕을 향하여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수류탄은 일본 궁내대신(宮內大臣)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하여 일장기기수(日章旗旗手)와 근위병(近衛兵)이 탄 말 두 필만을 거꾸러뜨리고 말았다. 그는 현장에서 피체되었고, 같은 해 9월 30일 동경 대심원(大審院)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시곡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비록 그가 일왕 유인을 폭살시키는데 실패는 하였지만, 그의 장거는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다.

참고 문헌

國家報勳處,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第8卷, 1990.
《高等警察要史》.
《騎驢隨筆》.
《武裝獨立運動秘史》.
《벽옹 김창숙일대기》.
《朝鮮民族運動年鑑》.
국회도서관,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文一民, 《韓國獨立運動史》.
金承學, 《韓國獨立史》下卷.
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
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資料集》.
《東亞日報》, 1928. 7. 19, 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