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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하

시대 : 1928
인물 : 조명하(趙明河;1905.4.8~1928.10.10)
신분 : 민간인

세부 사항

조명하는 1905년 5월 11일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장천리 (松禾郡 下里面 長泉里) 310번지에서 아버지 조용우 (趙鏞禹)와 어머니 배장년(裵長年) 사이의 4남 1녀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6세때부터 한학(漢學)을 3년간 수학하였고, 이어서 풍천(風川)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수학한 후 송화(松禾)보통학교로 편입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그가 송화보통학교로 편입하던 해인 1919년 침략자 일제에 대항하여 전한민족(全韓民族)이 총궐기한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조국광복을 위해 평화적으로 시위를 전개하는 한민족을 향해 일제는 총탈로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를 지켜본 어린 조명하는 조국에 대해서 눈을 떴고, 이 한목숨을 기필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바치리라 결심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조명하는 집안의 가세 때문에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친척이 경영하는 한약방에 취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계속 영어ㆍ불어ㆍ독일어ㆍ일어 등을 공부하였다. 그가 외국어를 공부한 이유는 국제 정세에 대한 눈을 뜨고, 장차 국내에서 보다는 국외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활동하겠다는 의도 때문이었다. 약 5년여 동안의 한약방근무 와 독학을 하던 조명하는 1926년 3월 황해도 신천군청의 지방서기로 취직한 것 또한 침략자 일제를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의 기관에 들어가 정확하게 그들을 파악하고 독립운동을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가 군청에 취직한지 약 3개월 만에 한국내에는 순종의 인산일을 맞아 또다시 전민족이 궐기하는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지켜본 조명하는 조국 독립에 대한 더욱 강한 열망이 생겨났고, 마침내 국내에서의 모든 인연을 끊고 일본으로 건너갈 결심을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로 처자가 있는 몸이었다. 그는 그의 결심이 흐트러질 것을 염려하여 아들조차도 만나지 않은 채 1926년 10월 조국을 떠났다.
일본에 도착한 조명하는 이름을 명하풍웅이라 위장하여 일인(日人)행세를 하며 일본인들에게 접근하였다. 그는 일본 대판에 정착하여 일단 전기회사 직원, 안달메리야스 상점원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대판상공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타도 대상인 일제를 잘 파악하기 위하여 독립운동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하여 조명하는 이같이 밤낮으로 그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내에서 그의 뜻을 실현시킬 마땅한 기회가 오지 않았다. 이에 조명하는 중국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 을 결심하고 우선 중국과 가까운 대만으로 건너갔다.
1927년 11월 대만에 도착한 조명하는 대중시영정(臺中市榮町)의 일인이 경영하는 찻집의 기사로 취직하였다. 그는 대만에서도 명하풍웅이란 일본이름을 써서 계속 일인 행세를 하였다. 그리고 대만인(臺灣人) 장천제(張天弟)로부터 의거에 쓸 검도(劍刀)를 구입하여 검술을 연마하고, 기회가 닿으면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칼날에 독극물을 발라놓았다. 이와 같이 모든 준비를 하면서 조명하는 대한만국 임시정부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1928년 5월 대만에 주둔 중인 일본 군대를 검열하기 위해 일왕 유인(裕仁)의 장인이며, 군사참의관(軍事參議官)까지 역임한 왕족 구이궁(久邇宮) 대장이 육군특별검열사(陸軍特別檢閱使)로 파견되어 온다는 사실이 대만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를 본 조명하는 드디어 때가 왔음을 예감하였다. 따라서 그는 임시정부행을 잠시 보류하고 의거 대상으로 구이궁을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조명하는 구이궁의 대만 일정 중, 5월 13일에는 대중시(臺中市)의 일본군 분둔(日本軍 分屯) 제 3대대의 검열을 한 후, 14일에 기차편으로 대중역(臺中驛)을 출발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는 14일을 의거 예정일로 잡고, 구이궁이 지나갈 길을 사전 답사하였다. 그리고 의거 전날인 5월 13일에는 거사에 사용할 검도를 숫돌에 갈아 날을 세우고, 독극물을 발라 모든 준비를 마쳤다.
5월 14일 아침 일찍 조명하는 검도를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집을 나섰다. 그리고 의거 지역으로 사전에 예정해 놓았던 대중시 대정정(大正町)의 도서관 앞으로 가서 경비병과 환영 인파 속에 끼여 구이궁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오전 9시 50분, 여러 대의 차량에 수행원을 태우고 선두 무개차(無蓋車)에 탄 구이궁이 조명하의 앞에 도착하였다. 순간 조명하는 재빨리 구이궁이 탄 무개차의 뒤쪽에 올라 그를 질렀다. 그러나 차에 걸쳐진 휘장이 방해가 되어 첫 번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조명하는 위험을 감지하고 속력을 내기 시작한 무개차를 향해 재차 힘껏 독검을 던졌다. 순간적으로 위험을 직감한 구이궁이 앞으로 엎드려 피하자 조명하가 던진 칼은 그의 어깨를 스쳐 상처를 입힌 후 운전수의 등에 박혔다.
의거 후 조명하는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후 태연히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리고 조명하의 독검을 맞은 구이궁은 현장에서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독극물의 여독으로 8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피체된 조명하는 그 해 7월 18일에 대만 고등법원에서 황실위해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어 24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國家報勳處,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第8卷, 1990.
《高等警察要史》.
《騎驢隨筆》.
《武裝獨立運動秘史》.
《벽옹 김창숙일대기》.
국회도서관,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文一民, 《韓國獨立運動史》.
金承學, 《韓國獨立史》下卷.
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
國家報勳處, 《獨立運動史資料集》.
《東亞日報》, 1928. 7. 19, 10.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