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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봉과 고인덕

시대 : 1920
인물 : 최수봉(崔壽鳳), 고인덕(高仁德), 송혜덕(宋惠德), 이장수(李章守), 한봉인(韓鳳仁), 이종암, 배중세
신분 : 독립운동가

시대적 배경

편강렬이 독립운동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했던 시기는 의성단을 조직했던 1923년이다. 이 때부터 임정과의 연락을 취하며, 군자금 모집과 파괴 공작 활동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개괄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1919년의 3·1운동으로 위기를 느낀 일본이 이전의 무단정치 대신 문화정치를 표방, 민족분열정책을 전개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한국경제를 완전히 일본경제에 종속시키려 하였다. 1919년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일선융화(日鮮融和)·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구호 아래 문화정책을 내세워 정책의 변화를 선언하였다. 조선총독부 관제를 개편, 제도상으로는 문관총독의 임명을 허용하였고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변경, 그 사무집행권을 도지사에게 넘겨 지방분권적 자치제도를 표방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조선인 관리 임용의 범위를 확대하는 동시에 관리·교원의 착검(着劍)과 제복을 폐지하였다. 또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간행을 허가하는 등 약간의 언론자유를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더욱 강화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수탈체제를 확립시켜 산미증산계획을 수립, 일본 내의 식량문제를 한국에서의 식량착취로 해결하려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계획은 실패하였으나 미곡을 수탈당한 한국인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만주(滿洲)로부터 잡곡을 들여와 충당해야만 했기 때문에 많은 농민들은 화전민이나 노동자가 되거나 이주의 길을 떠났다.
이러한 압제 속에서도 소작쟁의·노동쟁의·학생운동·사상운동 등 항일운동은 계속되었으며, 1927년 민족주의자의 총합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됨으로써 항일운동의 단계를 더욱 높였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는 3·1운동 이후 최대의 만세운동인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해외에서는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국권회복을 위해 나섰고 만주·시베리아 일대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본격적인 항일무장운동을 벌였다.

세부 사항

최수봉은 1894년 3월 3일 경남 밀양군(密陽郡) 상남면(上南面) 마산리(馬山里)에서 출생하였다. 호적상의 이름은 경학(敬鶴)이라 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27세 되던 해에 사립동화학교(私立東和學校)에 입학하여 전홍균(全鴻均) 밑에서 2년간 수학하고 나서 1912년에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에 입산, 명정학교(明正學校)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는 1913년에 평양숭실학교(平壤崇實學校)에 입학하여 3학년까지 수료했다. 그는 한일병탄이 되었을 때부터 조국 광복운동에 헌신할 결심을 한 항일 의식에 불타던 중, 남만주 지방으로 망명하여 봉천·안동 사이를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다가, 한 때 정주(定州)로 돌아와서 혹은 광산 노동에 종사하기도 하고 또 우편 집배인(郵便集配人)이 되어 일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노동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3.1운동이 일어난 1년 후 의열단원 고인덕(高仁德)으로부터 폭약과 폭탄과 제작기를 받아 산중에 들어가서 폭탄을 제조하여 동지 송혜덕(宋惠德)에게 맡겨두고 행동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편, 고인덕은 1887년 경남 밀양군 읍내(邑內) 2동(二洞)에서 출생하여 대구계성중학교(大邱啓星中學校)를 졸업하고, 1818년에 조국독립운동에 몸바쳐 일하려고 뜻을 결하고 분연히 만주로 건너갔다. 그리하여, 특히 3.1운동 이후에 길림과 상해 사이를 왕래하면서 활약하다가 외열단장 김원봉·이종삼 등과 모의하고 상해에서 입수한 폭약과 폭탄 제조기 등을 휴대하고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와서 전기 최수봉에게 그 자재(資材)들을 넘겨 주었던 것이다.
최수봉은 이리하여 준비된 폭탄을 갖고 1920년 12월 27일 밀양 경찰서장이 전 서원을 모아놓고 훈시한다는 정보를 듣고 이 기회를 놓칠세라 첫 번째 폭탄을 경찰서에 던졌다. 이에 경찰서 안이 일대 수라장을 이루었으나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느낀 그는 다시 제2탄을 던지고 서문(西門)을 향하여 도주했다. 그러나 일경의 추적이 너무나 급박하니 그들에게 잡히기 보다는 차라리 자살할 것을 결심하고 부근 민가에 뛰어들어 목을 칼로 찔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병원으로 끌려가 진찰한 결과 15센티 길이의 상처를 입었음이 밝혀졌다. 2주일간 치료한 다음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동년 12월에 열린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이 때 일본인 재판장이 “부산의 박재혁, 남대문 역두에서의 강우규가 모두 사형되었음을 네가 알 터인데 어찌하여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느냐”고 힐책하는 조로 소감을 물으니, 최수봉은 “내 목적을 달성하였으면 나는 내손으로 내 목숨을 끊으려 하였는데, 이제 너희들에게 잡혀 이 욕을 당하니 참말 통분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한다.
소위 검사 공소(檢事控訴)로 대구복심원 재판에서 1921년 4월 16일 사형이 언도되었고, 변호사에 의하여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동년 5월 23일 상고 기각(棄却)의 확정판결로 1921년 7월 8일 하오 3시 대구 감옥 교수대(絞首臺)에서 독립 만세를 높이 부르고 절명하였는데, 방년 28세였다. 그의 유해를 안장하고자 밀양 청년들 수명이 부의금(賻儀金)을 모아 운구(運柩)하려 하니 악독한 일본경찰은 이것마저 치안 방해라 하여 구속 송치했다. 할 수 없이 그가 자결하고자 민가에서 목을 찔렀을 때 입고 있던 피묻은 혈의(血衣)만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열사의 자취를 남기고 있다. 최수봉 거사의 경위가 밝혀져 고인덕도 연루자로 검거되어 징역3년 판결을 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년 6개월만에 소위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그는 해외의 동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할 겸 폭탄과 무기를 구입하려고 가산(家産) 전부를 팔아 3천 원(圓)을 마련해 가지고, 그 돈으로 특파원을 상해에 보냈다. 그리하여 1925년 11월 권총과 폭탄 등을 다량 준비하고 이종암·배중세·한봉인(韓鳳仁)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세상을 들었다 놓을 만큼 일대 장거(壯擧)를 계획하고 행동에 들어가려 할 즈음, 원통하게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이종암이 먼저 잡히고 고인덕도 연루자로 또 다시 검거됐다. 그 해 12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공판이 열리었다. 그러나 고인덕은 이 때에 심한 병을 앓고 있어서 재판정에 나오지 못하고 소위 분리심리(分離審理)를 하기로 재판부가 결정했다. 그는 감옥 병감(病監)에서 약병을 깨어 여러 번 자결하려고 목과 배를 찔렀으나 간수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926년 12월 21일 하오 8시 심장 질환으로 옥사 순국했다. 유해는 선산밑에 안장되었다.
경남 밀양군 읍내 1동 516번지에 원적을 두고 1896년 12월 19일에 출생한 이장수(李章守)는 최수봉 거사 때에 용의자(容疑者)로 피검되어 징역6개월의 형을 받았다 하나 자세한 것을 확인할 수는 없다.

참고 문헌

《독립운동사 제7권 : 의열투쟁사》
《기려수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