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편강렬

시대 : 1908
인물 : 편강렬(片康烈), 편상훈(片相薰), 편부열(片富烈), 이강년(李康年), 김경배(金庚培), 김태규(金泰奎), 조종
신분 : 의성단(義成團) 단장

시대적 배경

편강렬이 독립운동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했던 시기는 의성단을 조직했던 1923년이다. 이 때부터 임정과의 연락을 취하며, 군자금 모집과 파괴 공작 활동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개괄해보면 다음과 같다. 당시 1919년의 3·1운동으로 위기를 느낀 일본이 이전의 무단정치 대신 문화정치를 표방, 민족분열정책을 전개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한국경제를 완전히 일본경제에 종속시키려 하였다. 1919년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일선융화(日鮮融和)·일시동인(一視同仁)이라는 구호 아래 문화정책을 내세워 정책의 변화를 선언하였다. 조선총독부 관제를 개편, 제도상으로는 문관총독의 임명을 허용하였고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변경, 그 사무집행권을 도지사에게 넘겨 지방분권적 자치제도를 표방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조선인 관리 임용의 범위를 확대하는 동시에 관리·교원의 착검(着劍)과 제복을 폐지하였다. 또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간행을 허가하는 등 약간의 언론자유를 허용하였으나 검열은 더욱 강화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수탈체제를 확립시켜 산미증산계획을 수립, 일본 내의 식량문제를 한국에서의 식량착취로 해결하려 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계획은 실패하였으나 미곡을 수탈당한 한국인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만주(滿洲)로부터 잡곡을 들여와 충당해야만 했기 때문에 많은 농민들은 화전민이나 노동자가 되거나 이주의 길을 떠났다.
이러한 압제 속에서도 소작쟁의·노동쟁의·학생운동·사상운동 등 항일운동은 계속되었으며, 1927년 민족주의자의 총합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됨으로써 항일운동의 단계를 더욱 높였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는 3·1운동 이후 최대의 만세운동인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해외에서는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국권회복을 위해 나섰고 만주·시베리아 일대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본격적인 항일무장운동을 벌였다.

세부 사항

편강렬(片康烈)은 1892년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봉서면(鳳西面) 현죽리(玄竹里) 목동(牧洞)에서 편상훈(片相薰)의 셋째 아들로 출생했었다. 그의 선대는 경북 김천(金泉)에서 세거하다가 조부 때에 황해도에 옮겨와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호를 애사(愛史)라고 했다. 그는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소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강제로 체결되니 이에 분개하여 당시 아직 연소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있다가 그가 아직 16세에 지나지 못할 때에 전국 각지에서 토왜복권(討倭復權)을 외치며 의병(義兵)운동이 일어나자, 강열은 자기의 포부를 중형인 부열(富烈)에게 말한 후 당시 남쪽에서 의병 대장으로 이름이 있던 이강년(李康年)을 찾아갔다. 이 강년은 그의 연소 하나 비범 출중함을 간파하고 소집장(召集將) 겸(兼) 선봉장(先鋒將)으로 그를 기용하여 일선에서 활약하게 했다.
그 이듬해인 1908년 그가 17세였던 가을, 서울에서 일본군과 한 번 싸울 것을 결심하고 자원하여 의병을 인솔하고 동해안을 돌아 강릉(江陵)을 거쳐 경기도 양주(楊州)에 당도하자, 일본군의 대부대를 만나 3일 동안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참패하고 말았다. 그는 몸의 몇 군데에 적탄을 맞고 태백산(太白山) 본진에 돌아가서 재기의 날을 기다리던 중 이듬해 봄에 이 소식을 들은 백형 수열(壽烈)이 찾아와서 강원으로 귀가하였다.
그뒤 그는 평양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중에도 지하 운동에 정진하고 있다가 1910년 일제 경찰이 날조했던 그 소위 105인 사건에 연좌되어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겪고 출옥한 뒤에도 영남(嶺南) 일대의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회(光復會)에 가담하고 도처에서 결사대와 선전반을 조직, 맹렬한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니 그는 해서(海西)일대에서 대한민국정부의 지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의 친제인 덕렬(德烈)을 상해에 파견하여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활동을 계속하던 중, 구월산(九月山) 주비사건(籌備事件)에 관련되어 1년 2개월의 징역판결을 받고 해주(海州)감옥에서 복역했다. 출옥 후 그는 상경하여 국내 각지의 일제 시설을 파괴할 것을 계획하고 재만 각 단체와 연락을 취하고자, 김경배(金庚培)·김태규(金泰奎)·조종호(趙鍾鎬)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갔다. 봉천성(奉天省)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加子)에서 양기탁(梁起鐸)·남정(南正) 등과 의성단(義成團)이라는 행동 단체를 조직하고 그 단장에 피선되었다.
의성단의 정확한 결성 연도는 1923년 10월이었다 한다. 그는 북경(北京)에서 상해 임정 방면의 활동 상황을 전해 듣고, 우리의 독립은 반드시 무력 투쟁을 갖고서만 전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굳히고 만주에 돌아와 이 단체를 결성하였던 것이라 한다.
의성단의 활동 중심지는 길림과 장춘(長春=뒤의 소위 만주국 수도 ‘신경’)이었다. 편강열은 단원 수백 명을 포섭하여 훈련하고 적 기관 파괴와 적의 주구배(走狗輩) 토벌 등 맹활동을 전개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장춘의 일본영사관(領事?)을 습격하여 7시간에 걸치는 교전 끝에 적 60여 명의 사상자(死傷者)를 내었던 사건과, 봉천의 만철병원(滿鐵病院)을 습격하여 다대한 전과(戰果)를 거두었던 사건이었다. 당시 총독부에서도 크게 당황하여 재만(在滿) 일제 경찰력과 밀정(密偵)들을 총동원하고, 또 총독부 사무관(事務官)이던 홍모(洪某)를 특파하여 편강렬을 잡고자하였으나, 의성단에서는 일본영사관 담벽에 “아사홍생 아생홍사(我死洪生 我生洪死)”라는 벽보를 새벽에 붙여 “홍가와 나와 죽기 아니면 살기 내기다”하는 식으로 야유하니 일제도 간담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편강렬은 지략(智略)이 비범하고 대담 무쌍(大膽無雙)하여 일제 군경이 그를 잡으려고 10여 차나 그를 포위하고 그물을 덮어 씌웠으나 그 때마다 모면하곤 했다. 그의 행동은 늘 대담했다. 24년 3월에는 박일훈(朴日勳) 등 10여 명 단원들을 이끌고 장춘 성내로 들어가 군자금을 거두기에 성공하여 일제를 또 다시 경동시켰다. 그 후에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통의부·구국단(救國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등과 상호 연락하여 더욱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남북 만주 전 지역에 흩어져 있는 각종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여 좀 더 강력한 전선을 형성하려고 불멸 불휴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가 불행히도 1924년 8월 적경(敵警)에게 체포되었다. 그것은 일제 주구 김성곤(金成坤)의 밀고 탓이라 하여 편강렬이 체포되자, 당시 이범석(李範奭)은 비분함을 참을 수 없어 당장 그 자리에서 그 자를 처단 사살하였다 한다.
아무튼 편강렬은 신의주로 압송, 징역7년 언도를 받고,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척수염(脊髓炎)으로 보석(保釋), 선천 의동병원(義東病院, 미국 선교회 경영)에 입원 가료하였으나 별로 효과가 없으므로 친지들이 시설이 구비된 일본인 천엽 병원(千葉病院)에 옮기기를 적극 권고하였으나, 죽어도 왜놈에게서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절하니 할 수 없이 길림으로 가던 도중, 안동현 적십자 병원에서, “나 죽거든 유골을 만주 땅에 묻어 줄 것이요,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고국으로 이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한 많은 세상을 표연히 떠나니 향년 37세였고, 때는 1928년 12월 6일이었다. 정부는 그를 대통령장으로 서훈하였다.

참고 문헌

《독립운동사 제7권 : 의열투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