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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훈

시대 : 1906
인물 : 한훈(韓焄), 한성교(韓省敎), 민종식(閔宗植), 이동휘(李東輝), 이시영(李始榮), 안창호(安昌浩), 신익희(
신분 : 광복군 결사대

시대적 배경

한훈은 1906년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해 그가 체포되었던 1920년대까지 강렬한 항일무장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일본은 1904년 한일의정서를 성립시켜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의 길을 열었으며 제1차한일협약으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시작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을사조약에 의한 외교권 박탈과 함께 통감부를 두어 한일합방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907년(순종 1)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는 한편, 한·일신진협약(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차관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실질적인 지배에 들어갔다. 다시 일제에 의하여 군대가 해산되고 기유각서(己酉覺書)를 통해 사법권을 박탈당했으며 마침내 1910년 8월 국권이 피탈되었다. 일제강점기는 시기에 따라 약간의 정책변화가 있었으나, 일관된 것은 효율적인 식민지통치를 위한 탄압, 영구예속화를 위한 민족고유성의 말살과 철저한 경제적 수탈이었다. 대체로 한훈이 활동했던 시기는 일제의 무단정치기(1910∼19), 문화정치기(19∼31) 사이이다.

세부 사항

한훈(韓焄)은 본명 우석(禹錫), 자(字)는 성초(聖初), 호(號)는 송촌(松村), 가명은 만우(萬宇)·동렬(東烈)·조주사(曺主事)·조선달(曺先達) 등이었고, 본관은 청주(淸州) 1890년 3일 27일 충남 청양군(靑陽郡) 사양면(斜陽面) 흥산리(興山里)에서 한성교(韓省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었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니, 당시 국내 외에 산재하던 자기 동지들인 광복단원(光復團員)들을 재규합하여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그 동지들의 파견함을 받아 직접 상해에 건너가서 임정측의 이동휘(李東輝)·이시영(李始榮)·안창호(安昌浩)·신익희(申翼熙) 등과 협의한 결과, 권총 40정(挺), 탄환 3백여 발, 폭탄 10개를 공급받아 백운학(白雲鶴)·김병순(金炳淳)·최기배(崔基培) 등에게 보관하게 하고, 김상옥(金相玉)·김동순(金東淳)·서대순(徐大順)·최석기(崔錫基)·김화룡(金華龍)·안홍한(安弘翰)·유인원(柳寅元)·이운기(李雲起) 등의 암살단과 합작해서 1920년 8월 24일 미국 국회의원단의 내한함을 계기로, 총독을 비롯한 일제 고관을 암살하고 중요 기관에 폭탄을 던져 우리 민족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다는 의사 표시를 행동으로써 표시할 계획을 세우고 극비밀리에 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 경찰의 미국의원단 내한에 대한 특별 경계, 그 예비검속으로 8월 22일 약속한 시간에 서울 동대문 밖 창신동(昌信洞)에서 김상옥이 지정한 장소까지 한훈이 무기를 운반해 가는 도중에 잡혔기 때문에 모든 계획이 와해되고 따라서 많은 암살단원들과 광복단원들이 체포, 투옥되었다.
한훈은 5척 단구(短驅)에 야윈 체격이었으나 넓은 양미간(兩眉間)과 형형한 안광(眼光)등 적을 잡아 삼키지 않고는 말지 아니하는 투사였다. 그는 여섯 살 적부터 한문을 수학하였고, 1906년에 청양 정산(定山) 칠갑산(七甲山)에서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전사한 의병이던 외숙(外叔) 성씨(成氏)의 유언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일제를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큰 뜻을 세웠다. 그리하여 의병이 되려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더니 때마침 합천(合川)에서 일본군에게 패전한 홍주(洪州) 의병장(義兵將) 민종식(閔宗植)이 보령(保寧)의 청라(靑羅)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재거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달려가서 그곳 의병단에 참가, 1906년 5월 19일 흥주성(城)을 함락시키고 의병 초모장(招募將)이 됐다. 그는 곧 활동을 개시, 각지에서 의병을 모아 들여 1천 수백 명의 대부대를 만들어 내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민종식이 통솔하는 이 의병단도 일본군 소좌(少佐) 전중신조(田中新助)를 지휘관으로 하는 일본군을 맞아 3일간의 혈전으로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무기의 부족과 훈련의 미숙으로 83명의 고귀한 희생과 1백 45명의 포로를 낸 채 패퇴하고 말았다.
그 뒤, 한훈은 윤이병(尹履炳)·나철(羅喆)·기산도(奇山度)·이상학(李相鶴) 등과 상의하고 5적(賊)을 주참(誅斬)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나철·기산도 등이 일경에 검거되었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계속 의병으로 정산·공주(公州) 등지에서 항쟁하다가 악질이던 직산 군수(稷山郡守) 모(某)를 살해하고 만주에 망명했다. 그러나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오고 일제 총독이 소위 무단 정치로써 우리 민족을 극도 압박하니 그는 다시 국내에서 항쟁을 계속하기 위하여 1911년에 귀국해 돌아왔다. 그리하여, 1912년 말에는 이기상(李起商)·유장렬(柳?烈)·최국일(崔國一)·남병렬(南炳烈)과 함께 앞선 1906년에 최익현(崔益鉉)과 같이 순창(淳昌)에서 거사하였다가 대마도(對馬島)에 유배(流配), 귀환한 전 낙안 군수(前樂安郡守) 임병찬(林炳瓚)이 조직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付)에 가담하고, 일본 총독 사내 정의(寺內正毅)에게 정권 반환 요구와 철병 요구서를 제출했다. 뒤에 임병찬이 체포되었음으로 다시 만주에 망명하였다.
1913년 그가 24세 때에 만주 길림(吉林)서 권총 3정을 구입하여 가지고 귀국, 풍기(豊基)서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유장렬·강병수(姜炳洙)·김병렬·정만교(鄭萬敎)·정운홍(鄭雲洪)·정진화(鄭鎭華)·황상규(黃尙奎)·이각(李覺) 등과 국권 회복을 위하여 비밀결사광복단을 조직하고 무기를 구입하고자 다시 훈춘동포대(琿春東包帶)에 갔다. 거기서 한창섭(韓昌燮)을 통하여 권총 3정을 구입해 가지고 귀국, 곽한일(郭漢一)·김재순(金在順)과 비밀히 모의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 침략의 원흉들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일경에게 탄로되어, 일시 몸을 피해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했다.
1915년에는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양제안(梁薺安)·권영만(權榮萬)·김한종(金漢鍾)·엄정섭(嚴正燮) 등과 협력하여 광복단을 광복회라 개칭하고 체제를 군대식으로 편성한 후, 박상진을 총사령(總司令)으로 추대하고 국내와 국외로 분리 활동하게 했다. 그리고 한훈은 유장렬·곽경렬(郭京烈) 등과 함께 전라도에서 박곡(朴谷)의 양재학(梁在學), 낙안군 벌교(筏橋)외 서도현(徐道賢) 등 친일파 수명을 사살하고 오성(烏城)의 일본헌병분견소(分遣所)를 습격하여 장총 1정과 권총 1정 및 군도 1개를 탈취하고 계속 일경과 그 주구(走狗) 숙청에 전력했다. 그리하여 금강산의 김동평(金東平)·윤용중(尹容重) 등과 악질 부일 분자(附日分子)들을 사살하고 다시 만주에 망명하였다. 그 사이에 광복 회원들은 이종국(李鍾國)의 밀고로, 총사령 박상진 이하 80여 명 동지들이 일경에 잡혀 박상진·김한종·채기중·김경태(金敬泰)·임세규(林世奎) 등이 사형을 받고 순국하였으며, 기타 많은 회원들이 옥고를 겪었다.
3.1운동 이전에 벌써 이상과 같이 혁혁한 투쟁 경력을 가진 한훈, 그는 김상옥과의 관련으로 1920년 8월 22일 검거되어 재판에서 징역 8년 언도를 받았었는데, 재감 중에 전일의 의병 관계 등 사건이 탄로되어 서대문 형무소를 비롯, 광주(光州)·전주(全州)·대전(大田)·신의주 등 여러 곳 감옥을 전전하며 총계 23 년의 중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역시 과거의 악질 친일부호(親日富豪)를 살해한 사건으로 혹심한 고문과 악형 때문에 중병을 얻으니, 살아서 출옥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죽기를 결심, 신의주형무소에서 27일간 단식을 하였으나, 일경의 집요한 제지로 실패했었고, 대전 형무소에서 또한 26일간을 계속 단식하니 수감된 지 19년6개월 만에 형 집행 정지라는 명목으로 풀려나서 출감하여 집에서 요양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했다.
그 뒤 한훈은 서울에 올라와 옛 동지들을 상봉하여 독립된 조국에 여생을 바치기로 뜻을 정하고 광복단을 재건하고, 그 단장에 피선되어 활동하다가 6.25 동란으로 귀향해서 신병 치료 중, 9.28 수복 직전에 충남 논산군(論山郡) 두마면(豆磨面) 정장리(丁壯里)의 자택에서 북한군에 연행당하여 논산군 두계역(豆溪驛)과 대덕군 흑석역(黑石驛) 중간에서 피살, 순국했다.

참고 문헌

《독립운동사》, 제7권, 의열투쟁사.
《3.1運動秘史》, p1007.
《韓國獨立運動史》, p91.
《殉國義烈士傳》, p71.
《東亞日報》, 1921. 1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