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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첩보활동과 닌자(忍者)

개념

일본의 전통시대에 있어서 첩보조직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공조직 속에서 별도의 독립조직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에는 닌자(忍者)가 독립된 조직으로서 형성되어 있다. 닌자는 전국시대 명문가에 소속되어 인술(忍術)을 사용하여 탐정, 모략, 후방교란, 암살 등을 행한 사람을 일컫는데, 忍びの者라고도 한다. 닌자는 전쟁사에 있어서 종종 완벽한 전투기계로 묘사되기도 하였는데, 검은 복장을 입은 이들은 죽음과 혼돈이 난무했던 일본의 거친 역사 속에서 당당하게 한 장을 장식했다. 윤리라는 것을 완전히 무시한 채 어떤 두려움이나 흔들림없이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자를 위해 살인을 했다. 닌자는 태어날 때부터 정탐, 무장 전투, 비무장전투, 독 그리고 심리전의 기술을 완벽하게 익히기 위해 훈련을 계속하였고, 이런 기술들은 닌자가 잠행을 통해 정보를 모으고, 입수한 모든 것을 상급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였다. 닌자들과 인술은 근대화가 이루어지기까지 600년 이상을 번창했다. 근대 이후 닌자는 정부조직에 일부가 편입되어 첩보조직으로 활동하였다.

닌자의 배경

닌자와 그들의 무술인 인술(忍術)은 아직까지 고대의 신비로 둘러싸여 있고, 그들의 초기 태동에 관해 많은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일본의 전설 속의 존재인 덴구(天狗)의 후예일 것이라고 믿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닌자라는 조직은 일본의 중세부터 근세까지에 걸친 정치적, 종교적인 혼란기에 탄생하였다고 정리한다. 하지만 최초의 닌자가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기원은 중국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기원전 6세기경, 중국의 전국시대에 전략가로 활동하고 있던 손자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이라는 병서를 집필했다. 이 책은 공격적인 전략, 적의 약점과 힘, 지형의 활용, 스파이의 운용, 게릴라전술, 이러한 것들의 취약점 등 각 주제를 매우 정밀하고 논리적인 분석과 접근을 통해 기술해놓았다. 《손자병법》은 당시의 지식인과 군부의 장교들에게 필독서로 여겨졌으며, 심지어 도가나 불가의 인물들도 최소한 그 대략적인 내용을 상식으로 습득하고 있었다.
손자는 전투라는 행위는 단순히 무장한 군대가 부딪혀 싸우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병법서를 통해, 단순히 수적 우세는 아무런 이점도 제공하지 못한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또 그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적의 작전에 관한 바른 정보수집과 적절한 전략의 사용이 뒷받침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가장 으뜸으로 지향하는 것은 “훌륭한 전략을 짜서 직접적으로 맞서 싸우지 않고도 적군을 진압하고, 공성전없이 도시를 장악하며 피비린내 나는 칼부림 없이도 땅을 정복한다.”였다.
손자는 언제나 자신의 군주에게 군사력만을 믿고 안주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는 전문적인 정탐조직의 결성과 잠복활동의 시작을 주창하고, 자신의 전술이 눈앞에 닥친 전쟁에서 빠른 효과를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라 조언했다.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가치 있는 정보를 수집하는 이 조직은 당시에 떠돌이 승려로 널리 알려진 집단을 모태로 삼아 태어났다.
1500년전, 상당수의 산적집단이 중국 북부에 위치한 거대한 삼림지역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숲의 악마들이라 불렀다. 여행자들은 도적단들이 활개를 치는 밤이 다가오면 몸을 숨길만한 피신처를 찾아야 했다. 도적들은 필요한 모든 것을 숲에서 제공받았고,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법을 깨우치고 있었다. 이들의 수법은 갈수록 전문화되어 적대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법, 숲속에 은신하는 법에서는 이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들이 인가로 내려갈 때는 약탈을 하거나 근처 성이나 도시의 영주들로부터 첩자로 고용되기 위할 때 뿐이었다.
이 시기의 중국은 극심한 내부 혼란에 의해 수많은 폭동과 반란이 피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수나라는 돌궐의 침입과 고구려와의 전쟁 등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지식인 층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많은 식자들이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하여 본국으로 부터 나와 일본으로 도피하기 시작했고, 앞서 말했던 숲속의 악마들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불가와 함께 당시 중국 종교계의 양대축을 형성하고 있던 도가의 도사들은 도교 자체의 기복 신앙적 관점과 비밀리에 전수되는 가르침에 수세기동안 깊게 빠져 들었다. 이런 가르침의 대부분은 티베트와 인도의 지식을 기반으로 발전한 것이었으며, 선택된 소수에게만 전해졌다. 도사들은 부적을 만들어 부리는 마술과 연금술을 익혔고, 특별한 호흡법과 명상을 통해 생명을 연장시키는 방법을 수련했다. 이러한 비전(秘傳)들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세대를 거듭하며 전수되었다. 이를 통틀어 선술(仙術)이라 불렀다.
선술을 수련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주로 동굴이나 산꼭대기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도사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우주와 하나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온갖 종류의 고행 속으로 던진 뒤 이를 견뎠다. 고통어린 수련 끝에 도사들은 각종 약초와 연단법(鍊丹法)의 도움으로 이 세상의 어떤 이들과도 구분되는 정신세계와 물리적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들은 정신적인 능력을 계발하여 그 영향력을 더욱 넓히고 깊은 명상을 통해 이를 강하게 단련시켜서, 독립된 존재로서 다른 동식물들과 조화를 이루며 극도로 제한된 환경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깨우치게 된 것이다.
미미하고 가늘게 이어지는 호흡과 그 조절을 통한 인내심의 수련은, 어리석고 미신에 쉽게 동요하는 일반 백성들에게 도사들이 사후에도 부활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불사의 소문이 곧 널리 퍼지게 되자, 근처 주민들은 그들의 수행에 충분히 넓고 알맞은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그 당시 장사치들이 신기한 이야기들을 이곳 저곳에 전하고 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하늘과 통하며 불멸이고 동식물들과 공존하는 도사들에 관한 이야기는 좋은 소재거리였다.
소문은 황제에게도 퍼졌다. 도사들의 성취에 경외심을 품은 황제는 그들이 정적들에게 도움을 줄 것을 걱정하며 불편해했다. 이 때문에 은거지에서 떠나 하산한 도사들은 발견되는 즉시 살해되었다. 군대의 지휘관들은 제대로 죽이지 않으면 도사들이 마술을 쓰거나 귀신을 부려 도망쳐 버릴 것이라고 믿었다. 황제는 도사들을 죽인 후에 그들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불태우라고 추가로 명령했다.
무지한 사람들은 미신을 쉽게 믿었고 그에 관한 허무맹랑한 이야기에도 쉽게 수긍했다. 이 점은 수세기가 지난 후 닌자들에 의해 심리적 전술로 즐겨 사용되었다.
박해 때문에 산속에서 은거하여 수행하고 있던 도사들은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나라를 벗어나 신천지를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결국 일본의 사원으로 눈을 돌렸다. 도사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수세기 동안 자신들의 지식을 축적했고, 또한 원래 교리와 신조를 포함해 일본의 전통 종교, 신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닌자 조직의 태동

중국에서 건너 온 도사들이 일본에 정착한 곳은 주로 이가(伊賀)와 고가(甲賀)지방 부근의 산이었다. 이들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퍼지자, 곧 일본의 정치적 분쟁에서 주요 역할을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방해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 조정의 실권을 두고 벌어진 암투에서 모노노베 모리야(物部守屋)를 제거하고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와의 물밑 공작을 통해 섭정을 한 쇼토쿠(聖德) 태자는 열렬한 불교 신자이기도 했다. 쇼토쿠는 불교신자의 충고로 첩자를 고용하여 숙적의 정보를 수집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일본에서 정탐 조직이 활용되었음을 증면하는 첫 번째 근거로 많이 인용되고 있다.
당시 쇼토쿠 태자는 하다의 가와가쓰(河勝: 향구사(香具師)의 선조)ㆍ핫토리 씨족(服部氏族: 이가 닌자의 선조)·오토모 호소인(大伴細人: 고가 닌자의 선조) 등을 이용하여 각지의 정보를 수집했다고 전해진다.
쇼토쿠가 최고 통치자로 나선 후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자 다른 모든 종교와 일본 토착 종교인 신도(神道)는 배후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621년 쇼토쿠가 사망하기까지 30여 년간 불교는 그의 비호 아래 번창했다.
쇼토쿠 사후 각 교파들은 지위 향상을 위해 타 종교와 격렬한 분쟁을 시작했고, 이 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 나라 전체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곧 구세주가 나타났다. 그는 엔노교자(役行者) 라는 이름의 야마부시(山伏)였다. 야마부시는 일본인들이 산속에서 은거하고 있는 무사나 수련자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그는 이 분규를 종식시키기 위해 기존의 종교 세력과 서열을 복구하고, 불교에서 슈켄도(修驗道)라는 형태의 신 종교를 탄생시켰다. 이 새로운 종파는 빠르게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매우 대중적으로 퍼져 나아갔다. 하지만 추종자가 점점 불어나고, 그들의 역량이 늘어날수록 귀족 사회와 주요 영주들이 견제를 해 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뜻을 같이하는 권력층의 인사들은 엔노교자를 치기 위해 많은 수의 병력을 파견했던 것이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야마부시들이 처참하게 살육당했다. 겨우 살아남은 몇몇만이 급히 피신해 혼슈 섬에 있는 이가의 산맥 안쪽으로 숨어 들어가 상처를 돌볼 수 있었다. 이 지역은 매우 황량하여 늘 안개로 뒤덮여 있고, 길은 간신히 접근할 수 있을 정도라 사람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았다. 즉 야마부시가 다시 모여 틀을 잡을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였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이들 말고도 정치적 도피자나, 반체제 인사, 박해를 피해 도망친 도가와 불가의 승려들이 피신처를 찾아 산맥 안쪽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조금씩 야마부시의 세력 아래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집단 상호간의 혼인도 흔하게 일어나 원래 몇 백에 불과했던 야마부시와 도사들은 수천의 인구를 가진 집단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집단은 400여년 후 각각의 일족으로 쪼개어졌다. 완벽하게 고립된 지형 속에서 야마부시는 세대를 거듭하여 살고 일하고 죽었다. 그들이 소유했던 모든 기술은 끊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자손들에게 전수되었고, 적절한 상황에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병법서인 《손자병법》또한 교양처럼 교육되어 산지식으로 흡수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간혹 막부의 군사들이 탈출한 정치범을 잡기 위해 산 주위를 어슬렁거릴 때 그 가치를 효과적으로 입증했다. 그리하여 많은 수의 병사가 이가의 지역에서 실종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일가를 이룬 야마부시는 불교의 철학과 도가의 연단법을 가르치고 배웠다. 슈겐도 불교를 뼈대로 한 이 새로운 종파는 신곤이라 불렸다. 신곤은 신비주의적 분위기에 깊게 영향을 받고 있었고, 믿음의 중심은 영원한 빛의 불타라는 뜻을 지닌 부처인 다이니치였다. 신곤의 추종자들은 다이니치가 만물의 근원이며 절대적이고 불멸의 존재라고 믿었다.
신곤에서는 종종 신비주의적인 밀교의 의식이 행해졌다. 밀교의 가르침은 자연에 존재하는 신령에 대한 중배(이는 산악 환경에서 생활하는 야마부시와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와 기복 신앙적 마술, 명상, 인간의 정신세계의 비밀을 깨우치는 것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런 류의 종교적 수련은 인간의 정신력과 초자연적 힘을 결합하여 우주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사용할 목적으로 행해졌다.
야마부시들은 티베트 고유의 탄트라 이론과 인도의 요가 체계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힘과 의지를 주어진 시간에 전력을 다해 집중시키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이는 손가락으로 복잡한 형태를 표현하는 결인법을 도입시켜 창시한 구자법이라는 것이었다. 구자법은 임, 병, 투, 자, 개, 진, 열, 재, 전 등 아홉가지의 결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아홉 개의 손 모양은 모두 81개의 형태로 분화되는 뼈대가 된다.
손가락을 이리 저리 꺽어 만든 81개의 수인은 닌자가 처할 수 있는 어떤 사왕에서도 그를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다. 닌자는 마음을 평온히 가라앉힌 후 일정 규칙에 따른 구자법을 시행해서, 스스로를 어느 정도의 최면 상태에 빠뜨려 자신의 몸에 특정 종류의 물리적 변화를 야기시킬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심박 수를 줄이거나 혈압을 낮춘다거나, 주어진 문제를 풀기 위해 극도의 집중을 한다든가, 짧은 시간 내에 지니고 있는 모든 능력을 일깨운다거나, 호흡을 최소 3분 이상 멈춘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구자법은 닌자에게 위험한 상황이나 특정 능력이 피요한 상황에서 몸과 정신 상태를 최고로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여기에 덧붙여 밀교의 정신 수련은 그의 오감을 매우 예민하게 만들어 주고, 긴명상 수련은 지각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 모든 능력은 직접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영지의 평민들에게 미치는 미신적 영향력을 포함해 엄청난 위력을 행사했다.
이렇듯 신곤 밀교는 인술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그 기법들은 계속해서 발전하게 되었다.

닌자의 황금시대

다시 수백년이 흐르고, 사람들 사이에 산악 생활을 하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너리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그들이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헤이암 시대 말기인 1185년.일본의 조정은 그 힘이 매우 약해졌다. 귀족 사회는 많은 당파로 나뉘어 끊임없는 권력 투쟁과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주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지속되는 충돌 속에서 힘의 경쟁은 치열해졌고, 간첩을 이용하거나 암살자를 동원해 숙적을 살해하는 들의 일이 점차 보편화되었다. 이리하여 천황의 직접 통치가 끝나고 일본 최초로 무가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 정치적 불안 시기를 가마투라 시대라고 한다. 이때는 ‘인술의 황금시대’라고 알려진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영주들은 닌자와 그들이 소유한 특별한 능력을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 이용했으며, 자신들의 정적으로부터 이들을 떼어 놓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기도 했다. 쇼군들은 무사들을 양성해서 힘을 키웠으며, 나름대로 선종 불교라는 종교적 신념 또한 가지고 있었다. 이는 이후 일본 무사 문화의 전반적인 기본 토대가 되었다. 즉 무사와 닌자는 문화적으로도 서도 닿을 수 없는 극에 존재했다.
대부분의 군대는 지방 영주들에 의해 제각기 조직었기 때문에, 상대 군의 행동 양식이라든가 부대의 힘과 약점들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강한 영주들은 스스로 제정한 법으로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고, 믿음직한 무사를 통해 이를 수행하고 관리 감독하도록 했다. 그 결과 닌자를 정탐꾼으로 이용하는 일은 점점 더 평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들에게는 닌자의 정탐 기술을 통해 입수할 수 있는 정확한 정보가 적을 분석하는데 필수였다.
이렇게 해서 영주들은 적의 주둔지에 한두 명의 첩자는 늘 침투시켜 놓았고, 잠입한 자들은 수집하루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입수했다. 닌자는 어둠 속에서 활동하거나 떠돌이 수행자로 변장해 적 요새로 자유롭게 이동하며 모든 정보를 모았다.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닌자는 첩보 작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정보 수집 차원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폭동 선동이나 암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범위에서 말이다.
그들의 목표는 다양한 군사적 지도자들이었다. 닌자는 성이나 요새로 침입해 적진의 배후에 깊숙이 스며들어 적 장군을 조용히 제거하거나 영주를 직접 살해했다. 그리고 수뇌를 잃은 적군은 전장에서 직접 부딪히는 일 없이도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인간의 생명을 구하고 경제적인 승리를 획득하는 두 가지 함축정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장점으로 인해 어둠의 암살자, 그림자 전사들은 활발하게 번성했다.
이 ‘황금시대’ 동안 닌자 조직은 70여 개의 유파로 나뉘었다. 그중 가장 중심에 버티고 있던 가문은 당연히 이가와 고가였다. 당시 닌자는 시노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각각의 닌자 조직은 무기 사용과 정탐 방법에 있어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특색은 아주 비밀리에 유지되었으며, 조직 내의 각 구성원은 그들 조직의 다음세대의 구성원에게만 전수해 주었다. 예를 들자면 뼈를 부러뜨리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골법 유술은 고토 닌자의 고유 기술이었고, 후도 닌자는 슈리켄이라는 암기를 전문적으로 사용했다. 복잡하고 정교하게 뻗어 있는 정보망으로 최고의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은 쿠소노키의 전매특허였으며, 이후에 나타난 토가쿠레라는 거대 조직은 성벽 기어오르기와 마름쇠 기술에 정통해 있었다. 이가 지역에는 두 개의 거대한 조직이 있었는데, 하나는 핫토리고 다른 하나는 오데였다. 이가는 북쪽에 자리 잡고 있던 고가와 함게 닌자 세계를 양분하여 지재하던 곳이었다.
14세기 무렵 닌자 일족은 조금씩 조직화되고 그 수 또한 불어나, 거대한 영향력을 지닌 정치적 세력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더 이상 산속 황야의 어둠 속에 만족하며 남아 있길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을 탐탁찮게 여기고 있던 영주와 그 아래의 지휘자를 암살하고 손쉽게 군대를 유린했다. 바로 이때부터 귀족들은 닌자라는 이름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아시카가 다쿠우지(足利尊氏:1305~1358.8.15)가 반란을 일으켜 최고 통치권을 거머쥐자, 바로 분열 세력과 불문 세력이 등장한 상태였다. 호조 가를 선두로 하는 불만 세력과의 무력 충돌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결국 내전으로 치달았다. 두파가 나뉘어 싸우는 바람에 중앙 통치력이 약해지면서 주위의 귀족들과 강력한 무사 세력은 독자적으로 이권을 챙기기 위해 움직였다.
1352년, 아시카가 다쿠우지는 동생 다다요시(足利直義)를 살해하고 1인 통치의 길을 열었지만 가속화되는 지방 분권현상을 막지 못했다. 이 결과 16세기 도쿠가와 막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일본의 각 지방은 영토를 늘이기 위해 옆 지방과 전쟁을 일삼게 되었다. 천황은 상징적인 의미로 물러나 다시는 권력을 회복하지 못했으며, 쇼군의 영향력은 중대되었으나 일본 전역에 완벽히 미칠 수 없었다.
닌자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200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닌자의 위기

전란의 종지부를 찍고 일본을 통일하고자 노력했던 많은 이들 중에 가장 두드러진 움직임을 보인 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6.21)였다. 오다 노부나가는 1549년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의 뒤를 이어 오와리의 태수가 되고, 이웃의 여러 제후를 평정하여 이름을 떨쳤다. 1568년에는 무로마치 막부 15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의 권고로 교토를 평정하고 막부를 재건해 실권을 장악하였다. 1573년에는 아시카가를 교토에서 추방하여 사실상 일본의 통치자로 군림했다.
노부나가는 종종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하고 냉혹할 때가 있는 통치자였다. 그는 1549년 가고시마에 도착한 예수회 전도사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스스로를 그리스도 교인이라 칭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지만, 호전적인 불가의 세력을 쓸어버릴 수만 있다면 나라 전체의 통수권을 쥐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리스도 교를 공인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불교계는 승병을 양성하고 사찰을 요새화한 뒤 강력한 정치세력 중 하나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을 지지하는 수십만 명의 불교 신도도 노부나가에게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니었다.
1571년, 노부나가는 히에이산(比叡山)에 있던 불교 사찰을 습격해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히에이 산에는 수천 개의 사원이 있어 승병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많이 머물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3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히에이 산을 포위하고 불을 질렀다. 이 만행으로 1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노부나가는 1577년 혼간 사와 강화하기 전까지 수십 차례의 종교 반란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하지만 불교 탄압은 도움이 되는 일도 있었다. 영주들이 그의 과단성과 잔혹함을 두려워하며 서서히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이다. 세력은 계속해서 뻗어 나갔고 결국 1580년이 되기 전에 그는 일본의 절반 이상을 수중에 넣었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닌자들 이었다. 이가 지방에 계속해서 범죄자와 반역자, 반체제 인사들이 모이면서 닌자들과 친분을 쌓고, 공공연히 그를 적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병법에 통달한 노부나가는 닌자들의 능력과 활동 형태를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로 닌자들이 자주 쓰는 테러와 게릴라 전법은 웬만한 방법으로는 막을 수 없는 전쟁활동이었다. 질서가 안정되어 있고, 모든 곳의 병권이 모두 그에게 있으면 대처하기 쉽겠지만 아직 일본은 통일되지 않은 전국시대였다.
노부나가는 위험 요소를 좌시할 수 없었다. 1579년 노부나가는 아들 노부카츠(織田信雄)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이가 지방의 닌자 조직을 괴멸시키라고 명령했다. 닌자들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교묘한 전술 전략과 게릴라 전법 때문에 노부카츠의 군대는 여러 가지로 애를 먹었다. 결국 노부카츠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퇴각해야만 했다.
이 패배는 그의 불안 심리를 더욱 부채질을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2년 후인 1581년에 직접 4만 6000명이라는 막대한 수의 병력을 이끌고 직접 나섰다. 노부나가는 신병기의 활용을 누구보다도 중시한 장수였다. 그는 일본에 도착한 네델란드와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해 유럽에서 들여온 총포를 분석한 후 대량으로 제조해 천하 평정을 추진하였다. 그의 군대는 언제나 최고의 장비로 무장하고 있었고, 전국을 통틀어 가장 진보되어 있었다.
총포대까지 거느린 노부나가의 군대는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통해 닌자 조직을 간단히 와해시켰다.노부나가는 한명도 남김없이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닌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당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달아나 몸을 숨겼다

닌자의 되찾은 영화

생존자들은 조직을 재정비하고 천천히 새로운 사람들을 모아 닌자의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훗날 이들은 성공적으로 조직을 재건해 역사 속에 재등장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1582년 6월 2일, 교토의 혼노사(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ㆍ습격을 받고 자살하였다. 어떤 이들은 이 사건을 그에 의해 일족을 잃은 닌자들이 독립적으로 활동하면서 꾸민 일이라고 보기도 한다.
노부나가의 사망 이후 공석이 된 쇼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두 명의 영주의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정권을 선점하고, 노부나가의 충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8.18)에게 협조를 당부했다. 히데요시는 미쓰히데가 정통성이 없고 지지 기반이 약하다고 판단해 4일 뒤 미쓰히데를 제거해, 주군의 원수를 갚은 후 후계자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잦은 폭동의 원인이 과도한 무장에 있다고 생각하고, 일반 평민의 무기 소지를 금지했다. 이어서 그는 거주 이전의 자유도 금지해 안정적인 세입원을 마련하려 애썼다.
종교정책도 노부나가와는 정반대였다. 히데요시는 선교사들과 개종자들을 경멸했다. 그는 전임자가 불교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박해정책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수천 명의 그리스도 교인들을 학살했다. 히데요시는 통일에 방해가 되는 요인으로 외국 세력의 간섭을 일순으로 꼽았던 것이다.
한편 노부나가의 두 번째 충신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2.26 ~ 1616.4.17)는 일본의 동해 쪽 영지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히에이산의 대학살이 있었던 바로 다음 해에 새로운 직책을 하사 받았는데, 새로 임명된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가의 산을 지나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직우에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는 닌자의 영역을 지나간다는 건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기지를 발휘하여 오히려 조직의 우두머리 핫토리 한조와 접촉했다. 그는 막대한 보수를 조건으로 보호와 길잡이를 요청했다. 핫토리는 이 의뢰를 닌자들이 다시 힘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로 보고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닌자의 우두머리가 직접 나서 수행단을 이끌어, 이가와 고가의 닌자들에게 이들에 대한 공격이나 방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의사를 전달한 것이었다. 모든 닌자들은 이 조치에 순응하여 이에야스는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핫토리의 결정은 후에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게 된다.
한편 히데요시는 자신의 통치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늘어났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기독교도들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일부 귀족 계층이 믿을 만큼 일본에 깊게 뿌리내렸다. 게다가 그가 종교와 씨름하는 사이, 휘하에 있던 영주들은 착실히 부를 축적하고 군비를 갖춰 쇼군이 되고 싶어 했다.
해결책으로 대규모의 전쟁을 계획했다. 1592년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빌린다는 핑계로 나고야[名護屋;현재 히젠 가츠라지역]에 본영을 설치하고, 15만 8천여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쟁은 일본군이 초반 우세를 보이다 명군의 참전과 조선의 의병 활동 및 수군의 선전으로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전쟁 지속 의지를 지닌 유일한 영주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사망한 것도 패배의 원인 중 하나였다. 당시 히데요시가 닌자를 어떻게 활용했는가에 대한 부분은 자세한 자료가 없다.
한편 히데요시의 집권으로 이권이 줄어들어 불만을 품은 사카이의 거상 이마이 쇼큐(今井宗久)가 닌자를 이용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암살을 추진했다는 설도 잇다. 당시 ‘이가의 난’에서 살아남은 닌자 쓰즈라 주조(葛籠重藏)는 스승 지로자에몬이 맡은 암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교토(京都)로 갔으나 실패한다. 이에 대해서는 《속본조통감(續本朝痛鑑)》에 “분로쿠 3년(1594) 8월 24일 이시카와 고에몬이란 자가 그의 어머니를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팽살(烹殺)’ 형에 처해졌다”는 기록과 아에노쿠니 신사에서 구전되어 전해지는 “분로쿠 시대에 후시미 성에 잠입했던 닌자가 있었다”는 이야기 등은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하겠다.
히데요시의 후임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전국의 통제력을 확보하고 새로운 지배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광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정보망을 통해 갖가지 정보를 입수해 제공해 주는 자가 있었다. 바로 핫토리 한조를 비롯한 닌자 조직이었다. 이가 닌자는 각 성과 요새, 그리고 에도(현재의 도쿄)를 제외한 모든 군사 시설에 잠입하는 대규모 활동으로, 반대 세력에 관한 소식과 여러 사건들에 관해 끊임없이 보고했다. 이 활동의 반작용으로 핫토리 한조는 지배 세력의 권력 내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에야스는 닌자들을 협력자로써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폭동과 반란을 거의 전문하게 만들었다. 이 시절동안 그림자의 전사들은 정탐활동과 이에야스에게 반항하는 영주들에 대한 암살을 행하느라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핫토리 한조와 그의 일족은 쇼군의 수족으로 남아 막부를 수호했다. 핫토리는 자신의 조직을 비밀 경찰과 정탐 조직으로 재편성했다. 덕분에 이에야스는 훗날 위협이 될 만한 정치적 선동가나 반체제 인사에 대해 늘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 어떤 탈권적 행위의 조짐이 조금만 보여도 한둘의 닌자가 적절한 시기에 그 원인을 제거했다. 몇 번의 큰 전쟁과 수십번에 걸친 암살 끝에 1603년 이에야스는 드리어 쇼군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 시기를 역사사들은 도쿠가와 막부라고 부른다. 곧이어 여러 가지 정책이 새로 시행되었고, 일본의 통치체제의 구조를 개편하여 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닌자들의 실질적인 힘을 조금씩 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야스는 나가사키(長崎)의 조그마한 무역항을 뺀 모든 항구를 봉쇄함으로써 외세로부터 나라의 문을 닫아 서구와의 교역을 막았다. 이후 260여 년간 일본군 전 세계로부터 고립되었다. 이어서 그는 전국을 250개의 지역으로 세분화하고 각각 통치자를 두어 지배할 것을 지시했다. 각 영주들은 1년 중 몇 달을 정해 수도인 에도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음모의 가능성을 줄이려는 조치였다. 몇 백년만에 처음으로 치안과 체제가 복구되고 나라는 통일되었으며 평화로운 세월이 도래했다.
평화는 닌자의 힘과 영향력을 조금씩 봉인시키기 시작했다. 음모나 술수를 동원해야 하는 일거리가 점점 사라졌기 때문이다. 거의 1000년간 일본 전역에 걸쳐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닌자들은 경비원이나 정원사 수준으로 전락했고, 그들의 기술은 그 무술과 함께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다. 많은 닌자들이 자신의 기술을 ㄱ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사회 분야의 직업을 택해 스며들었다. 어떤 이들은 더 이상 일반적인 생활에 적응하며 살 수가 없어 종교에 몰두하여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수행을 위해 방랑했다. 닌자 조직은 지속적으로 도태되고 결국 대다수가 해산했다. 며몇 작은 무리만이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기술을 연마하고 인술의 법을 전수했다.

근대시기에 있어서 닌자

이후로 일본에서 공식적인 닌자의 활동이 개시된 것은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네 척의 군함을 이끌고 우라가(浦賀)에 입항해 무역항로를 열도록 압력을 가한 사건부터 였다.
당시의 쇼군은 두명의 닌자를 파견하여 이 오랑캐들의 함정에 침투하여 서류를 훔치고,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조사하도록 했다. 그때 훔친 서류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며, 지금은 도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일본이 내부와 외부의 압력에 이겨내지 못하고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문화개방정책을 수리했을 때, 서구의 새로운 과학과 기술이 흘러 들어왔다. 이후 육군과 해군의 훈련법은 큰 변화를 겪기 시작했으며, 무사는 그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검의 휴대가 금지되었다.
이후 4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일본은 근대국가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그 과정에서 근대적인 첩보조직이 형성되었다.
1871년 7월 ‘대정치개혁’의 일환으로 병무성(兵務省)내에 참모조직인 육군참모국이 설치되었다. 육군참모국의 임무는 기밀탐지를 비롯한 첩보활동과 지도 제작 및 지지서(地誌書)의 편찬에 있었다. ‘간첩대(間諜隊)’로 불리웠던 정보원들은 평상시에는 지리 조사와 지도작성을 주된 임무로 하다가 필요시 주변국에 대한 첩보활동을 수행하였다.
이 조직은 이후 1873년 3월, 육군성과 해군성으로 분리되어 참모국은 제6국으로 개칭되고, 지도 측량 및 회화조각ㆍ兵史兵家政誌의 수집을 주요 임무로 삼았다. 그리고 1874년에 참모국으로 개칭되어 그 업무가 확장되어 하부조직으로 제1과에 아세아병제과를 두고, 제5과에 지도정지과를 두었다. 이후에 이 조직은 점차 확대되어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되던 1878년 12월에 육군성 내에 참모본부로 확대 개편되었다. 하부조직으로 관동국(管東局)과 관서국(管西局)을 두었는데, 전자는 사할린, 만주, 캄차카반도, 시베리아를 첩보업무의 대상의 삼았고, 후자는 한반도 및 중국 연해주를 그 대상으로 하였다. 그 이듬해인 1879년 만주와 한반도의 관할이 바뀌어 한반도에 대한 첩보활동은 관동국의 관할로 넘어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일본의 첩보조직의 확립기라 하겠다.
일제는 1872년 9월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의 수행원이었던 키타무라 시게요리(北村重賴) 중좌와 벳푸 신스케(別府晋介) 소좌는 육군 참모국의 지시를 받아 첩보활동을 개시하였다. 당시 조선내에서의 외국인 활동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국인으로 위장하여 삼남지방을 정찰하고 귀국후 결과보고를 하였다. 이들의 활동이 문헌상에 나타난 최초의 근대적인 첩보활동이라 하겠다.
이들 조선조(朝鮮組)와 동시에 만주에는 이케가미 시로(池上四朗) 소좌 외에 다케치 마사모토(武市正幹), 사카키 나카히라(彭城中平)이 파견되어 지리ㆍ풍속ㆍ정치ㆍ재정ㆍ병비 등의 첩보활동을 수행했다. 그들 만주조는 상인으로 변장하여 요동지방 일대를 답사하면서 정보를 수집하였다. 특히 그들이 주목한 것은 遼河의 결빙과 해빙상태를 면밀히 조사하였다.
이후 1873년에는 美代淸元 중위를 청나라에 파견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大原里賢 대위를 위시한 8명의 첩보원을 파견하여 인접국에 대한 본격적인 첩보활동을 개시하였다.
가이즈 미츠오(海津三雄) 소위도 1877년 개항장 교섭차 한국으로 파견되는 대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를 수행하면서 한반도의 정황탐색을 명령받았다. 참모본부의〈역사초안〉에는 이것이 한국에 대한 첩보명령의 시작으로 기술되어 있다. 가이즈 미츠오 소위의 한국 체재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진 것은 서울ㆍ부산ㆍ원산 등의 요충지에 밀파되어 정보수집에 바빳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참모본부가 설립된 이후 인접국에 대한 밀정체제 확립의 일환으로서 1880년 2월에는 어학연수생 10명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뒤를 이어 11월에는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중위가 서울에 파견되어 연수생들을 지휘 감독하였다. 참모본부는 한반도에서의 첩보활동을 위해서는 한국어의 습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가이즈 미츠오 소위가 활동 무대를 서울에서 부산으로 옮긴 후의 일이다. 호리모토는 1882년에 발생한 임오군란의 와중에 사망하였고, 그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참모본부는 다른 인물들을 파견하였다. 또한 그들을 조선 정부의 관리오 고용되도록 공작을 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882년 8월, 하나부사 공사는 첩보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瀨戶口中雄 대위 등 3명의 장교와 2명의 관서국 요원을 대동하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조선 내의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청나라와의 군사적 충돌이 예상되니 일본군을 동원하여 서울과 평양을 점령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참모본부에 올렸다. 이후 제물포조약과 한일수호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됨에 따라 파견장교들의 첩보활동이 더욱 용이해졌다.
한편 일본은 1904년, 뤄순(旅順)을 장악하고 있던 러시아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첩보기관의 치밀한 공작에 힘입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는데, 승리의 요인으로 일본의 첩보기관이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닌자의 지식과 경험을 계승한 기술로 정탐과 비밀공작활동을 벌여 러시아의 전력과 관련한 상당한 정보를 미리 보유하고 있었던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아쉽게도 1860년 후반 이후 닌자에 관해 기록된 것은 거의 없다.
20세기 이후 처음 수십여 년간 일본은 전 세계로 교역을 확장했고, 이는 중국 침략과 만주 침략의 완성으로 까지 이어졌다. 이런 광범위한 군사작전은 고대 닌자들의 수법을 아낌없이 시도하고 평가하기 적당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결국 닌자의 후예들이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발전된 개념과 기술력을 도입한 것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특히 일본의 거대한 첩보망이 일본에서부터 만주까지 뻗어 있어서, 저항세력의 중국 독군(督軍)들은 투장을 벌일 때마다 암암리에 실종되었다. 닌자의 전통에 따라 침략이 있기 오래전부터 이미 만주까지 요원들이 파견되어 있었던 탓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첩자들은 전시에 후방교란과 간첩행위 등으로 일본의 진격을 도왔으며, 중국의 마을과 도시에 자리를 잡고 중국인의 생활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 뿌리를 내렸다. 그들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일본 첩보부에 보고했고, 예정된 침략이 원할히 진행될 수 있도록 선무공작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들이 보내온 정보는 특정지역의 군사력, 군수공장의 위치나 운반경로, 사람들의 분위기, 효과적인 무기가 될 만한 선전방법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실질적인 국가 전복의 도구로 어느 때고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일본 첩보조직 활동과 관련을 맺고 있는 단체로 흑룡회(黑龍會)라는 조직이 있었다. 이 조직은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던 국수주의자들에 의해 1901년 설립되었다. 이들의 주된 활동중 하나는 만주와 시베리아에서의 정탐활동이었고, 이는 적절한 효과를 발휘했다. 이 조직을 결성한 하람은 우익 운동가이자 사상가이고, 폭력배였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였다. 물론 그 탄생의 이면에는 200여 년간 지하조직으로 활동하고 있던 닌자가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말이다.
역사적으로 1650년대부터 닌자 조직이나 그 전통을 이은 첩보조직이 지속적으로 소환되어 활동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공식적인 역사기록에는 도쿠가와 막부시대에 닌자의 조직과 그 기능이 사라져 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후에도 닌자는 현대의 정보망과 정탐법의 출현에 기여를 한 뒤, 그 특유의 비밀주의에 의해 더 깊은 곳으로 감추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