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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강효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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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복

시대 : 1499
인물 : 강효복, 연산군, 이영산, 최민
신분 : 미천한 출신

시대적 배경

조선의 외교정책은 사대교린이었다. 시대교린의 사대는 중국, 교린은 일본 및 여진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는 받들어 섬기고, 이웃나라와는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외교방침이었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해마다 사신들을 정기적으로 명나라에 보냈는데, 이러한 사신의 파견에는 중국황실에 보내는 방물이 뒤따랐는데, 이처럼 사대는 흔히 소국이 대국에 바치는 조공과 대국이 소국에 베푸는 책봉으로 나타났다. 한편 조선은 개국 초부터 대일교섭을 통하여 고려 말 이후 조선의 연안뿐 아니라 내륙까지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의 금지를 요구했고, 일본도 조선정부의 요구에 응하는 한편 조선과의 통교를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 여진에 대한 교린도 여진족이 국경지대에서 벌여온 노략질을 못하도록 달래는 회유정책이었다. 여진의 추장들은 조선의 명예관직을 얻고, 일정한 규정에 따라 1년에 1번 혹은 수년에 1번씩 조선에 와서 국왕에게 숙배하여 형식상으로 종속관계를 유지했다. 조선은 여진을 야인(野人)으로도 칭하며 회유하기도 하고 정벌하기도 했다. 그리고 귀화인에게는 관직·토지·주택을 주어 회유하는 한편, 함경도 경성과 경원 등지에 무역소를 설치하여 조공무역과 국경무역을 허락하고, 한양에는 북평관을 설치하여 각 부족의 사신들이 머무를 수 있게 했다. 여진은 말·모피 등을 바치고 식량·농기구·종이·의복재료 등을 받아갔다. 그러나 복속하지 않는 여진부락은 토벌하고 그 땅에는 민호를 이주시켜 영토로 편입했다. 이처럼 교린정책은 일종의 회유책이었으나 이것이 실패했을 때는 무력정벌을 병행했다. 따라서 교린정책은 온건과 강경, 회유와 토벌이라는 이중적인 내용을 갖고 있는 외교정책이었다.

세부 사항

연산군 5년(1499)에 야인의 침입이 더욱 심하였다. 이에 변방의 장수로 하여금 항상 방비를 강화하게 하였고, 기회를 보아 토벌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창성부사 이영산은 강효복 등 30명을 적진에 보내어 적의 상황을 체탐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강효복 등 30명은 적진에 들어가 원래 알고 있던 중국인 최민 등 5명을 만나 술과 고기를 주고 길을 안내하게 하여 배산의 적에 관한 정보를 체탐하여 돌아와서? 이영산에게 보고하였다. 강효복은 이영산에게 배산은 비록 높은 산과 절벽은 없을지라도 그 길이 다만 말 한 필이 통할 수 있는 정도이기 때문에 대군이 움직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러한 내용을 이영산은 연산군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연산군은 배산에 쳐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고, 강 건너의 기름진 토지를 헛되이 버릴 수 없다 하여 강을 건너가서 기름진 토지를 경작하였다가 만약 적의 침략이 있으면 미처 구하지 못할 형편이므로 강 건너의 토지에 대한 경작을 금지하하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강효복에게는 미천한 출신이나 체탐의 공을 세운 것을 인정하여 만호라는 벼슬을 제수하였다.

참고 문헌

《朝鮮王朝實錄》.
서인한, 《한권으로 읽는 역대병요·동국전란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 3.
《한국사》8, 한길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