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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남조

바다를 건너온 돌짐승

무령왕릉을 지키고 있던 돌짐승(石獸)은 진묘수(鎭墓獸)의 일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다. 진묘수는 기괴한 형태의 상상 속의 동물을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서 악한 귀신을 쫓고 죽은 자를 지킨다는 신상(神像)으로서 중국의 시신을 묻는 풍속에서 나온 것이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던 과정에서 이러한 장례풍습이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다를 건너온 돌짐승

무령왕릉을 지키고 있던 돌짐승(石獸)은 진묘수(鎭墓獸)의 일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다. 진묘수는 기괴한 형태의 상상 속의 동물을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서 악한 귀신을 쫓고 죽은 자를 지킨다는 신상(神像)으로서 중국의 시신을 묻는 풍속에서 나온 것이다.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던 과정에서 이러한 장례풍습이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남조란 송(宋, 420∼479), 제(齊, 479∼502), 양(梁, 502∼557), 진(陳, 557∼588)의 양쯔강(揚子江) 하류지역을 점거하고 건강(建康:현재의 南京)에 도읍했던 4대 170년에 걸친 왕조를 총칭한다. 백제에서는 구이신왕 1년에서 위덕왕 35년에 이르는 시기이다.

백제는 초기부터 위만조선에서 낙랑, 대방으로 이어져 온 문화와 물자의 교류창구 역할을 대행하게 되었다. 동진(東晋)과 5호16국의 성립은 환황해권의 국제교역을 담당할 새로운 담당자를 필요로 했는데 백제의 성장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즉 백제의 해양을 통한 선진문물과 문화의 전달자 역할은 동아시아 사회에서 백제 성장의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백제는 중국대륙의 어느 한 왕조가 아닌 남북조 전체와 지속적인 교류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기록상에 나타나는 공식적인 교류 사례로는 남조 측과의 교류내용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북조의 이민족 왕조가 가지는 명분 및 문화적인 한계와 정치적인 역학관계에 따른 것으로 당시 양쯔강 이남에서 동진 정권이 성립되면서 중원의 한족왕조의 문화적인 역량은 강남을 중심으로 집중, 발전하였다. 백제의 선진문물의 수입은 이러한 강남 왕조와의 교류가 주를 이루었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백제 중심의 해상교역과 더불어 백제의 성장은 고구려에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결국 광개토왕, 장수왕 대의 대대적인 남진으로 백제는 수도인 한성(漢城)을 잃고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잠시 동아시아의 해상활동의 주도권을 잃고 고구려에 의한 연안항로가 통제되는 상황을 겪기도 하였다. 백제는 이에 새로운 항로의 모색과 선박기술을 발전시키는 한편, 외교적으로 반고구려 전선을 형성하여 고구려에 대응함으로써 무령왕 대에 이르러 해양강국의 지위를 다시 회복하였다. '양서(梁書)' 에는 이러한 모습을 “고구려를 여러차례 격파하고 비로소 다시 우호를 통하게 되었으니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웅진시대로 부터 사비시대에 이르는 동안 남조와의 교류는 건축, 공예에서 사상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데 무령왕릉과 그 출토유물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중국 남조문화에 대한 이해는 백제의 웅진, 사비기의 문화와 백제의 아시아 문화교류의 담당자 역할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남조와의 교류는 중국의 통일왕조의 성립과 함께 수, 당으로 그 대상은 바뀌지만 백제의 해양을 통한 교류는 백제의 멸망시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