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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왜

백제는 고대국가로 성립된 이후 점차 체제정비와 발전과정을 통해서 백제 나름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직 되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금동관이다. 금동관은 백제의 대왕이 지방의 수장들에게 하사하여 대왕의 권위를 확립하고 지방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금동관을 하사받은 제후 역시 그것을 통하여 지방지배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재백제의 금동관으로 최근발굴조사를 통하여 출토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서 백제계통의 금동관이 보여지는데 백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세력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의 일본전파를 잘 보여준다. 백제는 고대국가로 성립된 이후 점차 체제정비와 발전과정을 통해서 백제 나름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직 되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금동관이다. 금동관은 백제의 대왕이 지방의 수장들에게 하사하여 대왕의 권위를 확립하고 지방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금동관을 하사받은 제후 역시 그것을 통하여 지방지배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재백제의 금동관으로 최근발굴조사를 통하여 출토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서 백제계통의 금동관이 보여지는데 백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세력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의 일본전파를 잘 보여준다.

백제의 역사에서 대외교류는 흥망성쇠를 좌우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부분중의 하나이다. 마한의 소국에서 마한을 병합하고, 고구려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승리하여 동아시아 해상 국제교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비로소 백제는 동아시아의 해상강국을 건설하였다.

백제는 중국대륙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를 잇는 해상네트워크를 통해 선진문화와 기술의 전달자 또는 중계자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국제활동은 백제의 대내외적인 정치상황에 따라 민감하고 적극적으로 변화해왔다. 특히 일본열도에 위치한 왜국에 있어서의 백제는 선진문화의 전수자로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백제 역시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반고구려연대의 일원으로 왜국은 중요한 동맹국이였다. 백제와 왜국은 첫 외교로 부터 백제가 멸망하는 날까지 긴밀한 우호를 다지게 된다.

백제와 왜국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본에 남아있는 칠지도(七支刀)를 참고할 수 있다. 4세기 혹은 늦어도 5세기에는 제작되었을 이 칼에는 백제의 왕세자가 왜국의 왕을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길이 전해주라는 내용의 명문이 있는바, 이것이야 말로 백제 우위의 외교 실상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백제인들은 자신들이 중국의 남조 국가들로부터 각종 문화 요소를 전수 받았던 것처럼, 백제의 우수한 문화와 선진기술을 왜국에 전해주었다. 일본의 불교왕조사를 정리한 '부상략기(扶桑略記)' 에는 아스카(飛鳥)에 법흥사를 세울 당시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데 “천황에서 대신에 이르기까지 만조백관은 백제옷(百濟服)을 입고 도열했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고 하여 백제의 문화가 왜국에 끼친 영향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와 왜국 사이의 관계는 형식적인 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왜국은 고구려가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남하정책을 폈을 때 군사를 보내 가야 제국과 함께 백제 주도의 연맹군에 가담하였는가 하면, 백제의 전지왕이 쿠데타를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는 일을 돕기도 하였고, 백제의 멸망시에는 백제 편에 서서 신라와 당(唐)의 연합 세력에 군사적으로 대항하는 등, 시종 매우 긴밀한 정치.군사적 유대관계를 과시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유대가 있었기에 백제가 멸망한 후 많은 유민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게 되었다. 현재에도 남아있는 일본 내 수많은 백제의 흔적들은 고대 백제와 왜국의 돈독한 우호관계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