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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백제

백제의 두 번째 왕도 웅진(공주)의 공산성 백제의 두 번째 왕도 웅진(공주)의 공산성

웅진백제시대(AD 475년 ~ AD 538년)

백제의 두 번째 왕도인 웅진(공주)은 적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공주를 끼고 흐르는 금강은 자연적인 방어선 역할을 하였으며, 왕성인 웅진성으로 추정되는 공산성은 산성으로서 평지성보다 견고하였다. 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금강의 수운 교통이었다. 백제가 비록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하였지만 그 장점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기존 항로의 변경은 불가피하였지만 한성시기 한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해상활동은 웅진시기 금강을 중심으로 재개되었다. 금강을 따라 번화한 포구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중국대륙과 일본을 잇는 국제항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웅진으로 천도 후 잠시동안의 정치적인 혼란은 불가피하였다. 유력한 귀족세력의 발호로 인해 왕권이 확립되지 못하고 63년이라는 기간동안 세 명의 왕이 유력귀족에 피살되는 정치적인 혼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24대 동성왕, 25대 무령왕을 거치면서 백제는 내부적인 안정과 더불어 재도약의 계기를 맞이하였다. 동성왕은 488.490년 북중국의 북위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백제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전쟁의 가부에 대해서는 요서진출과 마찬가지로 논란이 있으나 사실이라면 백제는 이 시기에 또 다시 중국대륙으로 진출했다고 볼 수 있다. 동성왕을 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고, 남중국의 양으로부터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북아시아의 패자였던 고구려를 이기기 위해선 백제만의 힘으로는 불가능 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남중국의 양, 한반도에서 동쪽으로 이웃한 신라, 일본열도의 왜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서 반고구려 전선을 구축하였다. 백제는 그 중심국 역할을 자처하면서 고구려에 지혜롭게 대응하고 또 아시아 여러 나라문화의 교류의 폭은 더욱 확대하하였다. 무령왕 대 백제는 그 어느때보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를 갖추게 되었다. 백제인들은 타문화를 수용함에 있어서의 반발과 거부감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뛰어난 장사꾼들이자 뱃사람들이며 또한 외교관들이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평탄하고 풍요로운 지역에서 생활하는 그들에게 열등감이란 없었으며, 오히려 여유와 부드러움, 온화함이 백제인의 성품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도약시켰던 아버지 무령왕을 이어 26대 성왕은 매우 영리하고 백성의 사랑을 받는 왕이었다. 백제의 왕실은 안정을 되찾았으나 고구려에 잃어버린 고토(한강일대)를 되찾고 왕실의 위신을 회복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을 위하여 백제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다. 성왕은 백제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천도를 결심하고, 웅진으로부터 금강을 따라 하류로 이어지는 중간지점인 사비(현재의 부여)에 신도시를 건설하는데 착수하였다. 바로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건설된 것이다. 새 수도 사비에서 백제의 새로운 꿈을 펼칠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