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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백제

백제의 마지막 왕도 사비(부여)의 궁남지 백제의 마지막 왕도 사비(부여)의 궁남지

사비백제시대(AD 538년 ~ AD 660년)



백제의 마지막 왕도 사비(부여)의 궁남지 성왕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며 538년 웅진시대를 마감하고 사비로 천도하였다. 국명(國名) 또한 ‘백제’에서 ‘남부여’로 개정하였다.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 동부여 등 많은 나라의 조상의 나라이며, 고조선 멸망 후 300년 이상 고대 한국에서 가장 국력이 강한 나라였다. 즉 성왕이 남부여로 국호를 개정한 것은 백제도 다시금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고자 했던 의미 때문이다. 성왕은 잃어버린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서 활발한 정복사업을 펼치는 동시에 백제의 문화발전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백제의 승려 겸익이 해상실크로드를 따라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번역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성왕 자신이 번역사업에 동참했을 정도로 문화군주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사비시대에 이르러 백제는 해상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진행하는데 이는 항해술과 우수한 선박제조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고구려에 한강유역을 상실한 이후 백제는 무수한 노력 끝에 사비시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대중국 직항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사비시대에 꽃피운 백제의 문화도 우수한 선박이 없었다면 일본열도에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성왕 대 처음으로 왜국에 불교를 전해준 이후 불교군주인 27대 위덕왕이 선니(善尼)와 혜총(惠聰)과 같은 승려와 노반박사.와박사(瓦博士).화공(畵工)과 같은 불교건축관련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사찰건립에 기여하는 등 일본의 아스카(飛鳥) 문화 성립에 공헌하였습니다. 현재의 일본에서도 백제인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까닭은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사비시대에도 백제는 중국의 수.당과 일본의 왜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 신라에 대응하였는데, 이는 무왕이 돌아가자 당태종이 현무문에서 애도식을 진행하였을 만큼 돈독한 것이었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매우 총명한 왕으로 ‘빼어나게 용맹스러웠으며 담대한 결단력이 있었다’고 '삼국사기' 에 기록되어 있다. 당과 왜와의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 하면서 한편으로 신라를 공격하여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는데 이에 신라는 당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당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신라에게서 빼앗은 땅과 백성을 모두 돌려주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였고, 의자왕은 20년 동안의 전쟁의 성과를 포기하기 보다는 당과의 외교관계를 끊기로 결심,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 당은 고구려에 이어 백제까지 당에 저항하는 세력을 형성하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신라와 연합으로 백제를 공격하기로 하고 13만 대군을 파병하였다. 결국 700여년의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게 된 것이다.

백제 멸망하고 난 후 곧바로 유민들의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는데 흑치상지(黑齒常之).복신(福信).도침(道琛).풍(豊)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임존성(任存城).주류성(周留城) 등지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켜 한 때 기세를 떨치기도 하였으나 나당연합군의 토벌과 내분 등으로 말미암아 임존성의 지수신(遲受信)이 고구려로 망명하는 것을 끝으로 백제의 부흥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백제는 멸망하였지만 백제인들이 창조한 화려한 문화는 신라와 일본 등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 이후에도 그들의 문화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